좋은 콘텐츠가 살아남는 길
저는 기자로 만 8년 조금 못되게 일 했습니다. 평생을 바쳤다 정도는 아니지만 결코 짧은 시간도 아니죠. 나름 나라를 뒤흔드는 특종도 해 봤습니다. 최소한 한국에서 기자가 어떤 직업인지 정도는 안다고 생각합니다.
'기레기'. 가슴 아픈 단어입니다. 기자가 되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던 제게는 더더욱 그랬습니다. 기레기를 놓고 밤새 토론할 수도 있지만, "결국 너와 너의 동료들로 이뤄진 너의 업이 전반적으로 쓰레기 아니냐"고 하면 사실 크게 할 말이 없긴 합니다.
기자는 왜 기레기가 됐을까요. '윤리의식 부재' 식으로 해석해선 안됩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언론사의 자체 혁신의지 부족'과 '포털 등 콘텐츠 플랫폼의 문제'로 저는 요약합니다.
저는 지금 인공지능(혹은 머신러닝) 기반 콘텐츠 큐레이션 플랫폼을 만들고 있습니다. 조만간 안드로이드 마켓에 공개됩니다. 저는 이 길이 미디어를 조금이나마 혁신할 수 있는 과정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믿는 이유를 좀 적어볼까 합니다.
과거 언론사는(혹은 방송, 신문은) 그 자체가 하나의 미디어 플랫폼 역할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정보를 봤다는 뜻이죠. 한국의 경우 군사정부가 언론사의 수를 통제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1980년대까지만 해도 방송 송출 기술과 윤전기로 신문 찍어내는 게 최신의 기술이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990년대, 인터넷이 생기고 그 인터넷의 관문(포털) 사이트들이 생겨나면서 판이 바뀌었습니다. 민주정부가 들어오면서 누구나 언론사를 만들 수 있는 여건도 조성됐고요. 권력과 돈이 있던 언론사들은 충분히 IT 플랫폼으로 진화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고, 지금도 안하고 있죠. 시장을 장악한 포털 사이트들은 언론사들에 푼돈을 제시했고, 수익과 영향력이 급감하던 언론사는 그 돈을 넙죽 받았죠. 언론은 포털에 종속되기 시작합니다. (언론사에서 비판 기사를 쓰는 걸 '조진다'고 하는데, 삼성만큼 조지기 힘든 곳이 네이버입니다.)
포털에서 기사가 많이 노출되는 방법은 두가지로 요약됩니다. 1. 뉴스 메인 페이지에 걸리기. 2. 검색어에 걸리기. 이 중 1번 방법은 포털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포털이 정말 '질 좋은' 기사를 올리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포털의 뉴스 인력들의 전문성이 아주 높지도 않는데다가, 여러번 이런 저런 논란에 휩싸인 뒤에는 그냥 기계적으로 통신사(연합뉴스 등, 언론사에 뉴스를 제공하는 회사) 기사들만 올립니다. (최근엔 이마저도 AI에 맡기는 추세죠.) 1번을 뚫으려면 불법적 로비를 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실제로 횡횡하던 일입니다. 포털 뉴스팀이 중소 언론사에게 접대받는 게.
검색어에 걸리는 건 시간 싸움입니다. 사건이 터지면 바로 기사를 쏟아내야 합니다. 취재 과정이라는 게 생략됩니다. 그냥 마구 쓰고 남의 것을 베낍니다. 검색 알고리즘을 공부하고 거기에 딱 걸리기 좋은 콘텐츠만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 저널리즘이 설 자리가 없습니다.
악순환이 시작됩니다. 언론사는 수익이 줄고 -> 좋은 인재가 안들어오고 -> 안에서도 진짜 취재보다는 검색 엔진 혹은 광고에만 신경쓰고 -> 그나마 좋은 인재가 나가고 -> 언론사는 수익을 메우기 위해 광고주와 친해지려하고 -> 제대로 된 비판이 안되고 -> 콘텐츠 퀄리티가 떨어지고...가 반복됩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에 한국의 대부분의 언론사가 포함돼 있습니다.
혹자는 이 같은 언론 문제의 대안을 공영방송에서 찾기도 합니다. 국민의 돈으로 운영되는, 그래서 국민을 위해 일하는 언론사. 한국에선 KBS죠. 전 시장 논리에 기반하지 않은 시스템은 반드시 곪아버린다고 생각합니다. (정확치는 않지만) 50대 이상 근로자가 전체의 30%에 육박한다는 KBS의 사정이 이를 대변합니다. (정권이 바뀔때 마다 파업으로 몇달씩 보내거나 하는 문제는 다 언급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요.)
시스템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은 시장 경제에 기반해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좋은 콘텐츠를 만들라"가 아니라 "좋은 콘텐츠를 만들지 못하면 생존이 안된다"가 돼야 합니다. 전 AI 기반 큐레이션 미디어가 그 역할의 일부를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AI 혹은 머신러닝 기반 콘텐츠 큐레이션이 어떤 방법으로 이뤄지는 지는 이 글을 참조해 주시면 되고요.
머신러닝이 돌아가려면 일단 읽혀야 합니다. 누군가 읽으면 그 콘텐츠의 키워드가 추출되고, 그를 기반으로 peer group도 만들어지고 다음 콘텐츠도 추천이 됩니다. 자 그럼 마구 자극적이면 되는 거 아니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냥 자극적이기만 하고 질이 낮은 콘텐츠는 계속 읽히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질도 담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한 제프 베조스는 "낚시질이 나쁜게 아니라 낚시 당해서 들어갔는데 콘텐츠가 쓰레기인게 나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딱 이렇게 말한 건 아니고 이런 취지로...)
제목은 좀 더 자극적이 되겠지만 여튼 여러 사람에게 읽히는 콘텐츠가 살아남습니다. 한 사람이 읽으면 다른 Peer Group에도 추천이 되고, 그 사람이 읽으면 또 다른 사람에게 추천이 됩니다. 콘텐트에 오래 머물면 더 잘 퍼집니다. (알고리즘에 retention을 반영하면 되니까요.) 즉 검색어에 걸리는 콘텐츠가 아닌 읽히는 컨텐츠가 퍼지는 구조입니다. 질 낮은 콘텐츠는 결국 멀리 퍼지기 힘든 구조입니다. 언론사를 비롯한 contents provider들은 검색 알고리즘이 아닌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또 오래 머물게 하는 콘텐츠에 집중하게 됩니다. 종국에는 질 낮은 '우라까이' 언론사들이 시장에서 밀려나고, 새로운 문법과 형식을 갖추고 제대로 취재하는 언론사들이 살아남게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머신러닝 기반 큐레이션은 필터버블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사람의 큐레이션과 머신러닝의 큐레이션을 적절히 섞는 건데요. 유럽의 업데이가 이 방법을 쓰고 있고, 제가 만들고 있는 플랫폼도 비슷한 방법을 적용하려 하고 있습니다. 다만 얼마나 공정한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CP들에게 설득할 수 있을지가 문제죠.
언론을 냉소적으로 보면 안됩니다. "어차피 기레기들" 식으로 치부해 버리면 안됩니다. 언론은 살려야 합니다. 비이성적 정권을 내려버리고 새 정권을 세운 것의 시작도 결국 그 기레기 들이 한 겁니다.
그러나 국민들한테 성금 모아서 언론사에 준다고 언론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언론을 오히려 타락시킬 뿐입니다. 콘텐츠가 하나의 상품이 되고 그것이 시장에서 팔리는 구조가 되야 합니다.
포털은 그 유통과정을 왜곡시켰습니다. 그렇다고 언론이 포털의 희생양은 아닙니다. 언론이 워낙 못하니 포털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데로 시장을 키워온 것 뿐이죠.
언론 혁신은 사실 언론이 하는게 제일 좋습니다. 미국 등 선진국에선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이죠. 그런데 한국에선 좀처럼 움직임이 보이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 언론사 내부에서 사내벤처까지 해 봤지만, 큰 변화는 만들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기자를 그만뒀고 전문가와 머신러닝이 힘을 합쳐 콘텐츠를 골라주는 큐레이션 플랫폼을 만들었습니다.
얼마나 영향력을 만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사실 아무 영향력도 못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겠죠. 철학과 콘셉이 있다고 훌륭한 IT 플랫폼이 나오는 건 아니더라고요. 여튼, 수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만든 앱의 초기버전이 곧 나옵니다.
저희 뿐만 아니라 네이버, 다음도 점점 이 머신러닝 추천 비중을 늘려갑니다. 일정부분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언론계가, 미디어 생태계가 혁신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기자생활이 다시 할만한 것이 되고, 기자가 충만한 자부심과 높은 연봉으로 살 수 있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가끔은 두근거리며 데스크가 내 기사를 고치는 과정을 보다가 출고됐을 때의 짜릿함이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