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반나절 동안 뒷통수를 세번 얻어맞았나

쟁이의 시대가 저문다

by HEROINES


저는 지난 금요일에 반차를 썼습니다. 반나절만 회사에 있었는데, 그 반나절 동안 제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세가지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덕분에 반차를 쓰고, 비싼 돈 들여서 호텔에서 묵었는데도 전혀 맘편하게 쉬질 못했습니다. 이렇게 도전을 받고 뒤통수를 후려 맞는게 스타트업 라이프의 본질이기도 해서, 뭐 결과적으로는 이 주말은 '좋은 주말'로 기억될 것 같긴 합니다. 여튼 혼자 생각하고 지나가긴 아까운 주제여서 일기 쓰듯 정리해 봅니다.



내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이유


저는 글쟁이 출신입니다. 일종의 기술자 입니다. 이 역시 쓰임새가 적진 않습니다. 그러나 반나절 동안 겪은 세번의 이벤트를 통해서 "쟁이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구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는 저 같은 '쟁이'들이나 지금도 어떤 기술을 익히기 위해 지금도 밤낮없이 노력하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별로 좋지 않은 소식입니다.


'너무 늦은 깨달음'은 없는 만큼,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이 키우는 아빠로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고 어떤 공부를 시켜야 할 지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제가 느낀 나름의 결론은 "전략적 사고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1. 퍼포먼스 마케팅 강의


작은 조직의 리더로 있으면서 '마(케팅)알못'인 저는 고민이 많았습니다. 저희 팀에서 만든 많은 콘텐츠를 잘 퍼트려야 하는데, 그게 잘 안돼서 입니다. 그래서 회사의 퍼포먼스 마케터한테 "퍼포먼스 마케팅을 가르쳐 달라"는 요청을 드렸습니다. 참 무식한 요청이지만, 그런 무식한 요청을 뻔뻔하게 하는게 또 제 장점이기도 합니다.


저는 퍼포먼스 마케터라고 하면 페이스북이나 구글 같은 곳에서 세팅을 잘 하거나 뭔가 툴 같은 걸 써서 광고나 콘텐츠를 가장 많이 퍼트리는 노하우를 가진 사람(쟁이)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뭔가 사례 중심의 강의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저희 회사의 퍼포먼스 마케터는 강의를 '퍼포먼스 마케팅의 역사'로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뭐지?" 했습니다. 기술 중심으로 빨리 가르쳐주지. 그런데 듣다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역사'를 중심으로 강의를 하는게 제 무식한 질문에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강의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2009~2010년 : 앱 마케팅 시대 시작

2) 2011~2015년 : 시장의 폭발적 성장, 다양한 tracking tool의 등장. 타게팅 광고기법 유행

3) 2016~2018년: 초대형 플랫폼 등장, non-타게팅 광고기법 유행, 머신러닝 고도화

4) 2019년 이후 : AI 광고기법 유행, 신 생태계 등장


음, 그러니까 내가 궁금했던 '세팅', '툴' 이런 건 이미 두세대 전의 얘기였던 겁니다. 그러니 제 무식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해주기 위해 '역사'를 설명해 줘야 했던 겁니다.


예전에 타게팅 다들 열심히 해봤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기들 장난감은 엄마가 좋아하겠지"라고 해서 엄마 타게팅을 열심히 해 봤다는 겁니다. 그게 2010년대 초중반의 얘기입니다. 일정 부분은 되는데, 시장 성장은 안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엄마 수는 제한돼 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 "에라 모르겠다 드립다 뿌려보자"해서 non- 타게팅을 했더니 의외로 삼촌도 조카 선물 사고, 할머니도 손주 선물 사고, 딸바보 아빠도 바비 인형을 사고 그러더라는 겁니다. (이는 행동경제학이 지적하는 부분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우리가 상식이라고 여겨왔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편견이라는 것. 제대로 된 사실은 통계 속에 있다는 것)


그럼 우리의 상식을 벗어나는 이런 소비자 수요는 어떻게 파악할까. '머신러닝' 하는 겁니다. 엄청나게 많은 사례를 실험을 해 보고 그 과정에서 데이터를 쌓고, 이를 학습시키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기존엔 생각치도 못했던 수요가 발견되고, 그곳은 새로운 시장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제가 쫌 잘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1. 엄청나게 많은 사례를 실험해 보려면 엄청나게 많은 돈이 필요한데, 우리 같은 스타트업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 2. 머신러닝이 다해주면 퍼포먼스 마케터는 뭐 하는 사람들이냐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랬습니다. 1. 그래서 돈으로 실험은 못하더라도 고객 데이터를 더 유심히 보고 혹시나 내가 빠트린 부분이 없는지 계속 치열하게 생각하면서 고객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2. '퍼포먼스 마케팅'이라는 용어가 점점 의미가 없어지고 있다. 'growth hacker'라는 말은 그래서 생겼다. 이젠 그저 고객에 대해 고민하고 성장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사실 기획자, 디자이너와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고객에 대해 고민하다보면 단순히 해당 고객에게 상품을 잘 알리는 고민 뿐 아니라, 그 고객이 어떻게 해야 가장 좋은 경험을 제품 안에서 할 수 있을지도 연구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모두 '고객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들' 이다.





2. 보도자료 리뷰


앞서 말씀드린데로 저는 '글쟁이' 출신입니다. 뭐 세계 최고, 국내 최고 급은 아니지만 아마 우리 회사에서는 제가 글 제일 잘 쓸겁니다. (우리회사 60명 밖에 안되서 뭐 큰 자랑 아닙니다.)


그런데 몇 번 회사에서 나가는 보도자료를 쓰거나 리뷰했는데 결과적으로 CEO한테 지적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처음엔 "아니, 글에 대해 뭘 안다고 지적을 하지"라고 생각을 했지만, 지적당하는 내용을 듣고 보면 이해가 안가는 게 없어서 결국 수긍하게 되는 겁니다.


이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재 준비하는 신사업에 대해 CEO는 제게 출시를 가정하고 보도자료를 한번 써 보라고 했습니다. 일종의 'mission statement' 개념으로. 새로운 사업의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말 열심히 썼습니다.


저는 이 글도 30분 안걸려서 다 쓸겁니다. 전 아주 잘 쓰진 못하지만, 아주 빨리 알아먹게 쓸 순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도자료는 정말 몇시간을 들여서 썼습니다. 혹시나 비문이나 알아듣지 못할 표현은 없는지 프린트까지 해서 빨간줄 그어가며 몇시간이나 봤습니다.


그렇게 그걸 들고 CEO와 리뷰하러 갔습니다. CEO는 두 줄도 읽지 않고 첫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래서 이게 간단하게 말하면 무슨 제품이죠? 어떤 시장을 타게팅하죠?"


그러고 보니 완벽할 것 같았던 나의 보도자료의 첫 문장은 두 줄이나 되더라는 겁니다. 이런 젠장. 고객에게 주는 핵심 가치를 정리하지 않고, 줄줄줄 기능 설명을 한 문서를 만들어 놨던 겁니다.


정말 (거짓말 아니라) 그간 받아왔던 수 많은 보도자료들이 머리 속을 주마등처럼 스쳐갔습니다. 기자 출신으로 보도자료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좋은 보도자료는 두 줄을 읽기 전에 그 제품이 머리 속에 그려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첫 문장이 두줄이었던 거죠.


매트릭스 부터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시장을 나눠놓고, 우리가 하려는 일을 정리하고, 고객이 받을 밸류를 정리한 뒤 이를 가장 적확한 단어로 변환시키는 작업을 리뷰 받으면서 다시 했습니다.


시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고객을 이해하고. 언어를 정리하는 건 그 다음이다. 그런 겁니다. (돌이켜보면 적확한 단어를 선택할 때는 제가 조금 밸류가 있었던 것 같긴 합니다.)



3. UX 디자인


리뷰 직후에는 이 신사업에 대해 디자인팀이 만든 '이미지'를 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는 글로, 디자인 팀은 이미지로 일단 풀어보기로 한 거죠.


이 프로덕트는 물론 아직 기획 전 단계지만 방향성은 명확합니다. 이 방향성에 대해 다들 논의도, 공감도 했고요. 그래서 머리 속에 그려놓은 막연한 이미지를 디자인 팀이 구체화 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디자인 팀은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려왔습니다. 당혹감 마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아마 대기업 같았으면 "시키는 거나 해 오지, 뭔 짓을 해 온거야?"라고 혼날 수도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떻게 결정될 진 모르지만) 말이 안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듣다 보고, 잠깐 토론하다 보니 "아 고객은 저걸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우리 디자인 팀은 '쟁이'가 아니었던 것이죠. 말 그대로 UX(User eXperience)를 고민한 겁니다. 그리고 CEO가 뭐라 했든, 사전에 어떻게 협의했든 UX 관점에서 최선의 결과물이라고 생각되는 어떤 것을 갖고 온 것이죠.


지금은 SADI 원장으로 현업에선 은퇴하셨지만, 삼성의 모바일 디자인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장동훈 부사장과 인터뷰 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그에게 "(속칭)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우수한 디자이너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흔히 쓰이는) '디자인 씽킹' 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디자인 씽킹이란 단순한 모양 뿐 아니라 그 모양 안에서 고객이 경험하는 모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 그게 기획자랑 뭐가 달라요?" 그는 답했습니다. "이젠 그런 경계는 없어질 것"이라고. 앞서 마케팅의 사례와 마찬가지 였습니다.




전략적 사고와 고객에 대한 고민이 '전부'


기자 때 "스타트업 계에서 컨설턴트 출신이 뜬다"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회사 CEO도 컨설턴트 출신이고 요즘 잘나가는 사람 중에서 컨설턴트 출신 많지요. 당시에는 "공부 잘하는 자기들끼리 끌어주고 밀어주고 하니 투자도 잘 받고 그럼 성공하는 거지 뭐"라는 식으로 '평가절하' 했던 기억이 납니다.


사실 MBA는 금융위기 이후 '무용론'이 많이 퍼졌었고, 컨설턴트는 LG전자 사태(2000년대 후반 맥킨지가 LG전자에 스마트폰 시장에 진출하지 말라고 조언했던 사건) 이후 이미지가 옛날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정신차리고 보니 시장 여기저기에 컨설턴트 출신 들이 눈에 띄는 겁니다.


그날 오전 세 차례 뒷통수를 후려 맞으면서 그 이유가 어렴풋이 깨달아 졌습니다. 사회 생활 초년부터 전략적 사고를 배워온 사람들. 내가 영업을 배우고 글을 배울 때, 시장을 나누고 고객을 이해하는 법을 배운 사람들. 시장이 격변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로 무장한 스타트업 들이 뜬다는 건, 결국 이전과는 다른 고객이 등장하고 그 고객의 속성을 남들보다 빨리 잘 이해하는 사람이 뜬다는 것. 그러니 컨설턴트 출신이 스타트업 시대에 주목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기본을 생각하자


그러나, (당사 CEO를 비롯한 컨설턴트 출신 분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컨설팅에서 배운 각종 매트릭스 그리는 것과 전략적 사고 연습도 딱히 대단한 건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거야 책 한권 읽으면 금방 배울 수 있는 것들.


결국 내 제품에 대해 얼마나 깊게 이해하는가, 또 제품과 고객을 이해하기 위해 얼마나 시간을 쏟느냐, 또 그 고민의 결과를 누구랑 토론하면서 디벨롭 하는가. 그게 기본. 그 과정에서 매트릭스를 그리거나 경영학적 방법론을 알고 있는 건 도움이 되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그래서 내가 컨설팅 펌 안나오고 MBA 안 간것 때문에 절망할 필요는 없는 것.


아울러 당연한 말이지만 '기술'도 당연히 의미는 있습니다. 누군가는 실행해야 하니까요. 또 결과물의 완성도도 점점 중요해 지는 때 입니다. 그러나 리더십이 될 수록 누가 무슨 기술을 가지고 있느냐의 경계는 점점 모호해 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객에 대한 고민에 충분한 시간을 쏟고 있느냐"는 질문으로 이어졌습니다. 뭐 물론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건데. 내가 게을러서 인가. 아니 그건 아닌데. 하루에 12시간 넘게 일하는데. 주말에도 일하는데 왜 그러지?


결론이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피곤해서. 12시간 일하면 피곤하겠지. 근데 그게 핑계가 될 순 없으니 안피곤하게 해야지. 어떻게 하면 안피곤하지? 일에서 일희일비 하지 않고.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체력을 더 기르고. 기도로 마음을 다잡고. 쓸대없는 열등감으로 안받아도 될 스트레스 받지 말고. 겸손히 남의 조언에 귀 기울이고. 등등.


결국 금요일 오전 반나절에 맞은 세번의 뒤통수 덕에 주말 내내 삶의 자세와 가치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남들 다 아는 소리를 겁나 길게 적어놔서 죄송합니다. (혹시나 여기까지 읽으신 분이 있다면)


여튼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렇게 써 놓으면 좀 그렇지만) 이런 경험들이 적어도 지금은 즐겁습니다. 어린이가 글씨 배우듯 재미 있습니다.


저도 할 줄 아는게 몇 개 있고 (종이에 글씨도 쓸 줄 알고, 은 는 이 가도 맞출 줄 알고) 하니 여기에 이날 얻어맞은 펀치를 되새기면서 이런 저런 능력들을 더해 간다면, 나중엔 어떤 세상이 펼쳐질 지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굳이 홍보도 좀 하자면,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우리 회사(드라마앤컴퍼니, 리멤버 만드는 회사)는 꽤 괜찮은 것 같습니다. 기획자, 마케터, 디자이너, 개발자, 영업 그리고 저 같은 콘텐츠 쟁이 조차도 다 같이 진정한 그로스 해커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쟁이'도 좋지만, '쟁이'를 뛰어넘는 어떤 것이 되고 싶은 분들은 한번 살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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