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느낀 순간 기록하기 #3
다음 주 여자 친구와 2주년이지만 워크샵을 가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이번 주 여행을 가게 되었다.
위치를 고민하다가 괜찮아 보이는 숙소를 발견했고, 마침 예약 가능한 상태여서 덜컥 숙소부터 예약을 했다.
여행은 토, 일 1박 2일로 짧게 다녀오기로 결정했고, 여자 친구는 월요일부터 유독 설레어했다.
여행을 그렇게 좋아하던 친구가 몇 달 전부터 공무원 준비를 하게 되었고 생활 패턴이 집, 학원, 도서관 이렇게 단순해져서 더욱 설레어했던 것 같다.
양양에 도착하고 간단히 점심을 먹고, 장을 보고 예약한 펜션을 갔다.
펜션에서 잠시 쉬다가 여자 친구는 얼른 바다가 보고 싶었는지 해질 녘 무렵 나가자고 보챘다.
쭉 뻗은 2차선 도로만 건너면 하조대 해변이라 외투를 걸치고 터벅터벅 나갔는데 여자 친구가 모래를 밟더니 쪼르륵 먼저 달려갔다.
그러고 한동안 멍하니 혼자서 바다를 바라봤다.
시간이 30분 정도 지나니 해가 져서 양양은 바닷소리만 들리는 암흑이 되었다.
간단히 아니 거나하게 저녁을 먹었다.;; 배 터질 듯이 밥을 먹고 방 안으로 들어오니 침대 위에 편지 한 장과 책 3권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게 뭐야?"
"2주년 선물! 편지는 나 없을 때 읽고 책은 오빠가 좋아할 것 같은 놈들로 골랐어."
어쩐지 며칠 전에 여자 친구는 이 책 읽어봤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 책은 왜?"라는 나의 질문에 "주변 사람이 그 책에 대해서 물어봐서" 근데 그 책이 나에게 선물할 책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책 하나하나 날 생각해준 게 너무 티가 났다. 공부할 시간도 부족할 텐데 언제 또 준비했을까. 그나저나 편지를 얼른 읽어보고 싶었다.
엽서 디자인을 보는데 우리가 같이 갔던 가우디 공원에서 구입한 자기가 아끼는 엽서라고 했다. 그러고는 아까는 자기 없을 때 읽어보라던 여자 친구가 이제는 "궁금하면 읽어봐~"라고 말을 해줬다. 저 멀리 공부하러 소파로 여자 친구는 갔고 나는 침대 위에서 편지를 읽었다.
편지를 읽는데 아까 멍하니 바다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는지 이해가 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쓸 수 없지만...
여자 친구는 색깔이 많은 친구다. 다채로운 색을 가지고 있어서 에너지가 늘 넘쳤다. 그런데 요새는 자신이 무채색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고 적혀있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나에게 간혹 푸는데 미안하고 고맙다고 했다.
추가로 내가 있어서 그래도 위로를 받는다고 적혀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불쌍해보였나보다.
아무튼 편지를 읽는데 짠했다. 얼마나 힘들고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까. 그리고 얼마나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할까. 아마 여자 친구가 바라봤던 바다는 내가 바라보는 바다와는 많이 다를꺼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단순한 2주년 여행이자 휴가이지만 여자 친구에게는 단순한 바다는 아닐 것이다. 편지를 읽고 답을 해줘야 하는데 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는데 그냥 잘하고 있다며 안아줬다.
다음 날 아침 7시쯤 여자 친구는 혼자 또 바다에 나갔다. 걱정스러워서 창 밖을 보는데 사실 좀 웃겼다. 먼가 포부를 다짐하고 오는 느낌...
이 글에서 가장 중요한 이번 양양 여행에서 느낀 '순간'은 바다도 그 바다를 바라보는 여자 친구도 아니다.
'바로 낙산사에서 양양 시외버스 터미널로 돌아가는 시내버스에서의 순간이다.'
바다는 좀 더 특별하기에 누구나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런데 10분 정도 타고 가는 버스 안에서 저렇게 송이 닭강정을 손에 꼭 붙들고 창 밖을 계속 바라보는 건 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집에 돌아가면 내일부터 다시 공부 해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 싫었나보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번 여행에 대해 너무너무 좋다고 말하더니 하나도 놓치기 싫은 모양이다. 중간중간 저기 봐보라며 웃으며 가리키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밭이고, 그냥 구름인데 여자 친구에게는 아쉬움이고 행복인 것 같았다.
어제는 아무 말도 못 해줬지만 그래도 편지에 대한 대답을 늦게라도 해주고 싶다.
'뭘 하든 다채로운 색을 가진 사람이라고. 내가 그 다채로운 색을 양양에서 이렇게 봤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