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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Dec 17. 2022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수능 합격자 발표를 보고

온몸이 촛농을 뚝뚝 흘리며 녹아져 내리는 양초처럼 무기력하고 소멸되는 느낌이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 도리어 몸은 물 젖은 솜처럼 축 늘어진 채로 모든 기운과 혈기를 거부한다.


수능 합격자 발표일. 아이는 밤새 잠을 못 이룬 수척한 표정으로 내내 거실을 오갔다. 아이는 수시 접수한 학교 중에 유난히 신경 쓰는 학교가 딱 한 군데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


화면 앞에서 경직된 아이의 표정. 우리 주위의 모든 시간이 멎은 것만 같았다. 그 세 글자 앞에서 평정심을 잃은 아이는 숨이 끊어지도록 오열하며 흐느낀다.

엄마인 나는 그런 아이를 진정시킬 적당한 말조차 찾기 버겁다. 나머지 학교 중 두 군데에서 예비 번호가 떴다. 최초 합격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나 아이가 원했던 학교는 오직 그 하나의 학교뿐. 오열하는 아이를 보며 나도 같이 울음이 터졌다.

엄마 노릇 너무 힘들어서 더는 못해 먹겠다는 원망이

내 입에서 절로 나왔다.


해가 지도록 배가 고픈 줄 몰랐다.    예비 번호는 번호가 한 자릿 수라 , 다음 주면 합격 두 글자를 볼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나만의 것이다. 아이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은 채 슬픔에 겨워하다가 지쳐 쓰러진 채로 잠이 들었다. 남편은 전화상으로 들어서인지 퇴근 한 이후 내내 침묵을 지킨다. 누구보다 그가 힘들었을 것이 짐작이 간다. 그를 따라다니는 온갖 병명이 그가 얼마나 아이를 보면서 조마조마하고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말해 주기 때문이다.


실낱 같은 희망의 여지를 믿으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이었고, 남편과 아이는 원하는 학교가 되지 않은 이상 모든 희망을 잃은 표정이다. 나는 어떻게든 이번에 되는 학교로 입학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에 골몰했지만, 아이는 이미 재수로 마음을 굳혔다.


밤이 돼서야 잠에서 깬 아이에게 슬며시 말을 건다.  네가 속상해하는 걸 보니 엄마도 마음이 아프다고 하니 아이가 한숨을 쉬며 말을 잇는다. "저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나 자신에게 화난  거예요. 당연한 결과예요. 그렇지만 막상 닥치니 많이 힘들어요."


아이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물론 엄마인 내가 봐도 힘이 빠진 아이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이렇게 빨리 승복을 하고 잘못을 시인하다니... 마음이 짠했다.

한숨 쉰 채로 누워서 아픈 몸을 가누느라 힘들어하는 남편에게는 차마 아무 말도 건네지 못했다.

오늘은  여기저기서 최초 합격소식이 들린다. 모두 고생한 아이들과 엄마들이라 마음으로 축하해주면서도 한 편으로는 내 아이가 그 속에 들지 못한 게 못내 섭섭하고 가슴 아파 하루 종일 자리보전하고 누워만 있다.

 발표 당일에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소식을 들으면서 현실이 실감 나는 거였구나.


아이는 나에게 조심스레 재수 얘기를 건넨다. 다음 주에 예비가 합격으로 바뀌어도 자신은 절대 들어갈 생각이 없다고.. 1월부터 재수를 하겠다고 한다. 1년간 집요하게 재수 얘기를 해왔는데 이번의 아이 눈빛은  전과 다르다. 촉촉한 슬픔과 절박함이 어려있다.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부모는 살면서  아이에게 한 번쯤은 크게 져줘야 한다고 한다.  다음 주에 추가합격이 되면 아이를 설득해야겠다고 마음먹었건만.... 아이의 눈빛을 보니 더 이상 그 말을 해줄 자신이 없다. 나는 직감적으로 이번에 내가 져야 함을 깨닫는다.  


아이가 어떤 고생을 하고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부모라는 이유로 져주고 지켜봐야만 한다.

우린 어떤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무언가 시도하지 않았거나 스스로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 깊은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중

아이가 무력감에 빠지지 않도록, 이제는 내 손에서 놓아주어야 하나보다.  내가....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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