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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Jul 05. 2023

인간관계도 업무의 일부입니다

한 사람이 한 우주임을

"한 과장, 조르디와 무슨 일 있었어? 도대체 이 사람이 우리를 이렇게 대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늦은 저녁 시간 전화를 걸어온 회사 사장님은 잔뜩 역성이 난 목소리로 나에게 따지듯이 질문했다. 뜬금없는 항의성 전화에 나는 할 말을 잃고 얼버무릴 따름이었다.

"글쎄요. 제가 그 친구와 일 있을게 뭐가 있겠어요?...."


막내를 낳자마자 주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비즈니스회의나 일이 있을 때 출근하는 조건으로 근무를 시작한 무역회사. 내가 담당한 업무는 통 번역 업무로 해외 사업자들과 주고받는 이메일 작성 및 각종 매뉴얼  번역, 그리고 외국 손님들이 올 때마다 통역을 하는 것이었다. 조르디는 스페인의 테크노 스피로라는 파트너 회사의 담당이었다. 나와 몇 차례 비즈니스 미팅 등을 위해 만났지만, 그가 나에게 화가 나서 더 이상 한국을 오지 않고, 우리 회사와의 관계도 소원해졌다는 사장님의 말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전화를 끊은 뒤, 한참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업무 관련 메일을 주고받고, 회의에서 만나고, 관련 논의한 게 전부이다. 물론 가끔 질문이 있을 때 전화를 걸긴 했지만, 출장이 잦은 그는 제때 대답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첫 만남 때, 사무실에서 제품들을 살피는 그를 보면서 형식적인 인사로 첫인상을 남겼지만 그게 그의 심기를 건드릴만 한 건가? 억울한 마음에 나는 그날 밤새 뒤척이며 잠을 설쳤다.


내 입장에서  딱히 집히는 건 없었지만, 사장님의 질책에 무언가 액션을 해야 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생각해 낸 건 그에게 정성 어린 이메일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가 우리 회사와 한국을 더 이상 방문하지 않는데 사정을 해서라도 와 달라고 해야 했다.


마침 일전에 조르디가 업무 메일에 자신의 딸 사진을 첨부하면서 곧 휴가를 가니 그 이후 연락하라고 했던 게 생각났다. 사진을 찾아보니 이제 갓 11세쯤 된 어린 소녀가 아빠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나는 조르디의 감성에 호소하기 위해 메일에 오해가 있으면 풀고 싶다, 그리고 기회가 되어 너의 예쁜 딸도 데리고 온다면 함께 관광시간을 갖게 해 주겠다면서 그의 감성에 한껏 호소하는 내용의 메일을 발송했다.


사장님은 한참 메일을 검토하시더니

 "이봐. 이 사람이 진짜로 딸 리고 오면 책임질 거야?"

라고 물었다.

 나는 "설마 데리고 오겠습니까? 제가 그저 감성에 호소해서 잘 지내자는 의중을 전달한 거지요."라고 대답했다.


그의 답장을 기다리면서 나는 매일 기도했다. 처음에는 이유도 없이 우리를 팽해서 그 화살을 나에게 맞게 한 그를 원망하는 기도로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새에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오해 살만한 행동을 했기에 이런 결과가 나왔고 사장님이 추궁했겠지.


그래서 그 이후 나는 그를 용서하게 해달라고, 그리고 관계과 회복돼서 더 이상 회사에 피해가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면서 그를 향했던 나의 원망도 차차 녹아지는 것을 느끼고, 이제 그를 이해하는 입장에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와, 드디어 조르디가 한국에 온다니. 얼마만이야.

한 과장, 통역 준비하고 0월 0일 회사에서 보자고."

이런 꿈같은 소식이 오다니.... 나의 메일을 받고 그가 마침내 한국에 진짜로 오겠다는 회신을 보낸 것이다.

사장님의 들뜬 목소리를 듣고 열심히 자료검토, 통역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문득 든 아이디어.


비록 그가 이번에 딸을 데리고 오지는 않지만 그토록 아끼는 그의 외동딸을 위해서 선물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확실하게 그와의 관계가 회복되리라는 기대로 지인을 찾아가 특별히 직접 만든 여자아이용  머리핀들을 주문했다. 그녀는 세상에 하나뿐인 예쁜 핀을 4개 만들어서 곱게 포장해줬다.

마침내, 조르디가 회사에 온날. 아침부터 떨리는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며 회사로 향했다. 회의실에서  small talk를 하고 있는 그에게 다가가 한껏 반가워하는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Hi, It's so good to see you again. How was your flight?"

오랜 비행에 지쳤을 법도 한데, 그는 호텔에서 쉬고 오니 괜찮다며 환히 웃었다. 그간의 안부를 나눈 뒤, 나는 정성껏 준비한 선물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그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볼 때, 나는 너의 예쁜 딸을 위해 준비했다. 돌아가면 딸에게 세상에 하나뿐인   핀이라고 전해달라 했다.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그의 얼굴이 빛나는 게 느껴졌다. 그 이후 우리 대화는 그야말로 화기애애, 훈훈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함께 식사하면서 그간의 근황을 조심스레 물었다.

나와 불과 1살 차이 나는 그는 그간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를 겪었다고 고백했다. 그제야 우리는 그가 겪은 그간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위로해 줬다.  식사 시간에는 업무 시간과 다르게 항공기에서 겪었던 일들, 다른 비즈니스 출장 중의 일화들, 딸아이 교육 문제 등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했다.  


형식적인 비즈니스파트너에서 이제 친구 같은 동반자로 우리의 관계가 진화하는 순간이었다.

그 이후 우리의 업무가 그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순조롭게 성공적으로 진행됐음은 물론이다. 그의 한국 관광에 이사님이  매일 동행했는데, 이전보다 한결 밝은 분위기에서 했다고 후일담을 들려주셨다.


이후에도 조르디는 우리 회사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는 지원자가 되어, 수시로 한국을 방문했고, 회사의 편의를 대폭 봐주면서 함께 했음은 물론이다. 코로나로 3년 가까이 발이 묶인 상황에서도 그는 스페인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우리를 배려하고 지원해 줬다. 


정작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 뒤, 나는 회사의 권유로 퇴사를 했다. 비록 내가 그 자리를 비워도 이제 그와 우리 회사가 잘해나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르디는 나에게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결국 관계를 기반으로 함을 뼈저리게 알려주었다. 피부색, 인종, 국적이 달라도, 결국 사람 사는 방식은 어디나 비슷하다는 것을.  오해로 인한 관계의 균열이 생길 때 결국은 일도 지장을 받는다. 그러나 관계가 단단하고, 신뢰 위에 선다면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함께 헤쳐 나가며  성장할 수 있다.


관계에 있어 설사 누군가 나에게 오해를 해도 내가 모르는 그만의 사연과 아픔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그것을 다 이해할 수 없기에 한계를 인정하고, 이해해야만 한다. 한때의 오해로 관계가 소원해져 우리의 비즈니스도 휘청였지만, 그 오해가 해소되고 단단한 관계가 될 때,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군으로 서로를 도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인간관계도 업무의 중요한 일부라는 것이다. 세상에 혼자서 다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누구나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조르디와의 경험을 통해서 한 사람을 품는 것, 내 잘못이 없더라도 무조건적으로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 관계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고 결국 그것이 우리의 업무는 물론이고 삶까지 바꾸어 놓을 수 있음을 여실히 깨달았다.


일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이후에도 간혹 나의 부아를 치밀게 하거나, 차마 용서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관계의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나는 조르디와의 관계를 위해 기도했던 시간을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추스른다. 그러면서  내가 상대를 더 아프고 힘들게 했음을  비로소 깨닫곤 한다.

 

신문에서 본 영화 소개 글 중 한 귀절이 떠오른다.

우주를 한 사람으로 축소하고, 그 존재를 다시 신으로 확대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빅토르위고-

글 속에서 결국 개인의 크기는 우주와도 같고 신과도 같다고 한다.


우리는 날마다 무수한 우주를 만나고 산다.  그 우주를 신으로 확대하느냐에 따라  관계가 결정되고 그것이 업무도, 삶도 결정함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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