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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Aug 29. 2023

나는 네게 여친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왜 숨기는데?

사랑하는 나의 둘째 아들 호야.

지난번 냉장고에서 맛난 조각케이크들이 들어있는 선물상자를 발견했을 때 엄마는 실은 속으로 누가 서프라이즈를 준비한 건가 기대했다.  

그런데 설마 하고 묻는 엄마에게 "엄마 드세요. 전 별로 안 좋아해요."라고 하는데 느낌 이상했던 거 니?


그때 엄마의 촉이 비상하게 발동해서 너에게 대놓고 물었지.

"너.... 여자친구 생겼구나."

한참을 뜸 들이다가 네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못 이긴 척 "네"라고 대답했을 때 엄마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엄마가 뭐라 할 것도 아닌데, 초등 6학년때에 이어 고 2가 되어서도 여자 친구가 생긴 걸 또 비밀로 하는구나.


"예쁘니? 착해? 얼마나 사귀었어?"라는 엄마의 속사포 질문에 너는 최대한 말을 아끼며 딱 한 마디 했지.

"공부 잘해요. 엄마는 모르는 애예요."


야, 속 시원하게 얘기해 주면 어디 덧나니?

엄마가 알면 그 아이를 쫓아가기라도 한대?

뭐가 그리 심각한 비밀이라고 그리 말을 안 해주는 거니? 우리 고작 그런 사이였니?


엄마는 그 케이크.. 한 조각도 안 먹었다. 먹고 싶지도 않았고, 네 형이 밤에 들어와 4개 중에 제일 맛없는 거 하나 남겨놓고 다 먹었더라.


네가 늘 입을 거 없다고 옷 좀 사달라고 졸랐을 때, 헤어 스타일 만든다고 아침마다 드라이하느라 부산 떨 때, 용돈 모자르다고 볼멘소리로 하소연할 때... 그때 알아봤어야 는데 엄마는 왜 그리 둔했을까.

너는 그게 뭐 대수냐고, 엄마는 신경 좀 끄시라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내 마음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네가 이전에도 여자 친구 사귀는 것을 꽁꽁 비밀로 해서 동네 아줌마 제보로 알게 된 이후, 엄마는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입을 다무는 네게 나름 섭섭하기 때문이다.

너도 알다시피, 세 아들 중 네가 엄마에게 가장 딸 같은 아들 아니었니? 과묵하고 진중한 네 형, 까불이 막내와 달리 너는 딸처럼 공감 잘해주고, 엄마와 대화도 통하고, 엄마를 제일 많이 닮아서  아들만 셋인 우리 집에서 그나마 에게 위안을 주고 말이 통하는 딸 같은 아들이었는데.  그런데 그 딸이 엄마에게 이리 비밀이 많아지니 솔직히 가슴이 써늘하다.  


너 전에 치킨 집 앞에서 여자친구와 지나가다 아빠 차 보고도 모른 척 지나갔다며?

그때 아빠가 아는 척 안 해서 너도 안 했다고 하지만, 그러는 거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아빠가 계시면 인사하고 여자 친구에게도 인사 시켜 줬어야지.


뭐? 엄마는 너무 고리타분하다고. 꼭 그래야만 하냐고?

그래, 치사하다. 싫으면 하지 마라. 우리도 엎드려 절 받기 싫다.


솔직히 네 아빠가 그때 네 여자친구 보고 좀 놀랐다고 하더라. 생각보다 통통하고 얼굴도 네 스타일이 아니어서 정말 호가 저 아이랑 사귀는 게 맞나 속으로 의심했대.   


그러나 그날 네가 유난히 아끼던 새 옷을 입고 나간 걸 익히 아는 엄마는 그 아이가 너의 여자 친구인걸 속으로 백 프로 확신했지.

다른 집 아들들은 여자친구 생겼다고 자연스레 얘기도 해주고, 집으로 초대해 식사도 같이 한다는데... 나는 그런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할 여력도 없다.

다만, 부모에게 그리 철저히 비밀로 하는 네가 낯설고 어색할  따름이다.

너, 그제는 밥 사 먹으라고 준 카드로 영화 보게 해달라고 톡 보냈지?  데이트한 거 다 안다.

그런데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뭐니? 그런 심각한 영화를 보고 집에서 그렇게 투덜대니? 앞으로 그런 때는 영화를 좀 알아보고 예약해라.


호야,

나는 네 연애사에 앞으로 참견 안 할 거다.

너네 둘이 잘 사귀어봐라. 대신, 나중에 헤어져도 구차하게 징징대지 마라.


엄마 삐졌냐고? 나 안 삐졌다. 안 섭섭하다. 화 안 났다.

너는 네 인생 살아라. 엄마도 엄마 인생 살 거니까...

단지 이 말이 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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