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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Oct 06. 2023

엄마 말은 힘이 세다

아이들은 기억한다

밤늦게야 돌아온 고2인 둘째 호가 온몸에 진액이 다 빠진 맥없는 표정으로 안방에 왔다.

휘청이는 몸을 간신히 가누며 낙엽 떨어지듯 침대 위에 풀썩 누운 아이가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목표를 설정해  마음을 다잡고 공부했어요. 내신 조금 올리면 되는 건데 생각해 보니 거기까지 가려면 내 앞에 있는 친구들 0명을 이겨야 하는 거예요. 친구 한 명 이기고 올라서는 것도 힘든데 그 잘하는 애들을 이기고 올라가려니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나는 가고 싶은  대학이 있어서 꼭 거기까지 해내고 싶거든요. 이를 악물고 계속 하니 이제 압박감을 느껴 힘들어요. 공부하는 게 재미가 없어지고 지쳐요.”     


그간 자신이 표하는 대학을 위해 내신 시험을 대비하느라 호는 학원이 끝난 뒤에도 늦은 시간까지 온 힘을 다해 공부하고 집에 돌아오는 일과를 반복했다.

 

“친구들과는 이런 고민을 나눌 수가 없어요. 같이 웃고 떠드는 얘기는 좋아하지만 내가 이런 심각한 얘기를 꺼내면 누가 좋다 하겠어요?

또 나같이 고민하면서 공부하는 아이도 있지만 그냥 시켜서 억지로 하거나 아예 안 하는  아이들도 있으니... 내가 말해야 잘 이해를 못 할 거예요. 그래서 공부의 압박감도 괴롭지만, 때로는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외로움 때문에 더 힘들어요.”     

성격이 무던하고 공감 능력이 높은 호는 친구들에게 제법 인기가 많다. 그럼에도 정작 자신의 가장 내밀한 고민을 털어놓지 못해 마음 한편에 늘 외로움을 안고 살았나 보다.


자신의 진짜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가 한 명도 없어 집에 와서야 눈물 흘리며 하소연하는 모습을 보니 내 마음도 함께 저렸다.  아이가 호소하는 그 막막한 심정의 실체를 알지만 엄마로서 마땅히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침묵하며 머릿속을 헤집었다.


이런 때 마땅한 위로, 힘이 되어주는 말을 찾기가 때로는 어떤 시험을 치르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겹다는 생각이 든다.


한참후 어렵게 입을 뗐다.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저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를 배운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인생의 태도. 설사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네가 익힌 삶의 태도는 어디 안 갈 거야. 다음에 또 필요한 기회가 생길 때 그때 경험을 상기하며 다시 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며칠 후, 몸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호를 학교 앞까지 태워주는데 아이가 뒷자리에서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행 발표를 열심히 준비하면 선생님이 꼭 내 발표순서를  미루시고, 정작 준비를 제대로 못간 날은 꼭 발표를 시켜요.”


나는 웃으면서 “그럼, 대충 준비해. 너도 힘든데 발표 준비하느라 고생만 한 거잖아.라고 말했다.


내 말에 호가 엷게 웃으며 건네는 말.
 “엄마. 인생의 태도를 배우는 시간이라면서요?

그럼 하나하나 다 열심히 하는 태도가 중요한 거 아니에요?”


순간 머릿속이 까맣게 덧칠 됐다.

저는 지금 태도를 훈련하는 시간이니까, 발표를 제때 하는 거에 상관없이 일단 열심히 할게요.”


운전대를 잡고 창밖을 바라보는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슬쩍 건네 놓은 뒤 채  잊고 살았던 내 말을 아이는 하나하나 다 기억했구나.

남몰래 가슴에 간직하고, 그리 살려 혼자 버둥거렸구나.


그런 아이에게 쉽게 말하고, 그 말을 생각 없이 번복한 내 모습이 한없이 미안했다.


흩어지는 기억의 파편들을 요모조모 맞추며 내가 던졌을 아픈 말들, 모순적인 말들을 추리느라 한동안 머릿속이 분주했다.

    

아이에게 건네는 엄마의 말은 힘이 세다.

 말을 자양분 삼아 마음의 근력을 키우기에 한마디 말도 조심스럽다.


수개월째 이상과 현실의 갭을 좁히지 못해 자기 점수에 좌절한 재수생 큰애에게는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엄마의 말이 힘이 센 만큼 고민도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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