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둘째 아들 호가 비밀스럽게 안방으로 와서 나와 남편에게 "엄마, 저에게 주실 유산을 미리 주실 수는 없을까요?"라고 물었다.
이유를 물으니 "제가 둘째라서 중간이잖아요. 제 몫이 거의 없을까 겁이 나서 미리 받고 싶어요."
이제 초등학생에 불과한 아이가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한 내용이 하두 기가 막혀 한참을 웃었다.
나는 물려줄 유산이 없다고 잘라 말하려 했는데 옆에 있던 남편이 선수를 쳤다.
"야, 대출을 물려줄게. 너 대출도 자산인 거 아니? 너에게 특별히 아빠 대출을 물려줄 테니 네가 다 가져가라."
아빠의 말에 아이는 대출이 뭐냐고 묻더니 뜻을 설명하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방을 나가 버렸다.
그 이후부터 아이들이 유산을 미리 달라는 둥의 말을 일절 안 함은 물론이고 받을 유산이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 살지 궁리하는 눈치이다.
며칠 전 우연히 신문에서 제약 1위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박사의 손녀 유일링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았다.
유한양행 창업주인 유일한 선생님은 죽을 때 손녀의 대학 학자금 1만 달러를 제외한 전 재산을 사회에 내놓는다는 내용의 유언을 남겼다. 국내 1위 제약회사로서 당시 비자금, 부정축재, 정경유착 등이 난무하던 사회 분위기 속에서 그의 유언은 사회적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었다.
유일링(62)씨는 바로 그 유산의 주인공으로 그녀는 도쿄에서 유년기를 보낸 뒤 예일대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마케팅 디렉터로 일하다가 현재는 애리조나 사격학교에서 코치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유언이 섭섭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녀는 "전혀! 능력이 있어야지,-----1만 달러나 주셔서 오히려 놀랐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통해 유일한 선생님이 생전 태평양전쟁 때 미 전략사무국 특수 요원으로 가족에게도 신분을 숨기고 활동한 것과 당시 만난 펄벅과의 우정으로 그녀의 소설 '살아있는 갈대'의 모델이 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불과 열 살 때 그녀는 그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최고의 할아버지를 잃었다."며 울었다.
그녀는 인터뷰 말미 할아버지가 준 최고의 선물을 묻자 "등록금 1만 달러와 내가 나로 살 수 있게 해 준 자유, 그리고 책임감이다.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최고의 인생을 개척해서 살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엄청난 부자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할아버지를 닮았다고 느낄 때를 묻는 질문에 "스스로를 아웃사이더라고 느끼는 것, 소신이 강해 홀로 외로운 길을 간다는 것, 그러나 할아버지는 너무 큰 분이라 내가 닮기는 힘들 것 같다."라고 말했다.
사진 속의 환갑이 넘은 나이 답지 않은 그녀의 세련되고 젊은 외모. 자기 삶을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서 풍길 법한 당당하고 여유 있는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그녀는 할아버지에게 1만 달러를 유산으로 받았으나 진짜 유산은 바로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삶의 자세라는 것을.
인터뷰를 다 읽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우리 아이들에게 남겨줄 진짜 유산은 무엇일까?
이담에 우리 아이들은 엄마의 삶을 회상할 때 뭐라고 기억해 줄까?
엄마의 삶과 기도가 아이들의 길을 밝혀주는 참 등대, 삶을 지탱해 주는 든든한 유산이 된다는 생각에 오늘 하루치의 시간 앞에 더 겸허해진다.
엄마의 죽음 앞에 그처럼 "최고의 엄마를 잃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