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 날씨에 난방비 아낀다고 난방을 하지 않아 냉골같이 차가운 집에서 노구의 몸으로 반찬을 하시느라 얼마나 수고하셨을까?
각종 반찬들 속에서 어머님의 진한 사랑이 베어 나왔다.
아이들과 함께 어머님이 해주신 파김치, 김치찜 등의 지극한 정성으로 빚어낸 반찬들로 상을 차리며 문득 어머님과의 첫 만남이 떠올랐다.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갓 29세 되던 해, 3년여간 사귄 남편과 결혼을 앞두고 시댁에 인사를 가게 되었다.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며 남편과 함께 미리 사둔 새 옷으로 한껏 단장하고 시댁에 처음으로 인사 간 날, 며느리감이 이사 온다고 빨간 니트를 곱게 차려입으신 어머님이 햇살만큼 밝은 웃음으로 나를 반겨주셨다.
어머님, 아버님은 과묵한 편이셨지만 인사 온 예비 며느리를 위한 나름의 따뜻한 배려가 느껴져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화기애애했다.
식사를 마친 뒤, 어머님은 함께 먹을 과일을 잔뜩 내오셨다. 사과, 배 등의 과일이 풍성히 담긴 바구니를 앞에 놓으셨는데 풍성한 과일이 놓인 접시를 보고 나는 한동안 쭈삣거렸다.
맏며느리감으로 인사를 온 내가 당연히 칼을 들고 보기 좋게 깎아야 될 텐데 손을 쓰는 일이라면 도통할 줄 모르는 내 모습을 들킬까봐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과일과 나를 번갈아 쳐다봄을 의식하고 나는 당연히 내가 할 일이라는 듯이 호기롭게 칼을 들었다.
나는 드라마에서나 볼법한 야무진 며느리 포즈로 능숙하게 배를 깎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의도와는 달리 깎으려는 껍질 뿐 아니라 야속하게 하얀 속살까지 깎이는 게 아닌가.
그때였다.
한동안 낑낑대며 배를 깎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던 어머님이 잽싸게 나의 손에서 칼을 가져가신 것이.
어머님은 아무 말없이 나에게서 가져가신 칼로 다른 배를 골라 능숙하게 쓱쓱 깎으셨다. 비로소 황금빛 껍질만 얄판하게 벗겨지고 마침내 배가 하얗고 탐스런 속살을 드러냈을 때, 보기 좋은 모양으로 배를 조각조각 자르신 어머님은 만면에 웃음을 띄우며 나에게 깎은 배를 포크에 찍어 내미셨다.
아마 어머님은 그때 서툰 솜씨로 살점까지 댕강댕강 깎는 예비 며느리의 모습이 안쓰럽고 그 손에 깎여 나가는 배가 아까워 칼을 뺏으신 게 아닐까.
어머님은 그때 나에게 단 한 마디도 나무라거나, 핀잔의 말씀을 안 하셨기에 나는 차라리 칼을 뺏기길 다행으로 생각하며 식은땀에 흠뻑 젖은 목덜미만 훔쳤다.
만일 그때 어머님이 나를 나무라셨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창피한 나머지 첫만남 때의 어머님 잔소리가 두고두고 각인되어 섭섭한 일이 있을 때마다 생각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0여년 결혼생활 동안 어머님은 며느리의 부족하고 못난 모습을 보셔도 일절 잔소리를 하지 않으시고 몸소 사랑을 보여주셨다.
20년이 넘도록 매년 며느리의 생일마다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용돈을 직접 챙겨 주셨으며, 두 아들을 낳고 직장 다니는 며느리를 대신해 두 손주들을 손수 키워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당신도 연세 들어 체력이 기울기 시작했던 때인데 외손주까지 손주 3명을 어떻게 키워 주셨는지 어머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며느리에게 한 번도 힘들다는 내색 없이 손주를 키워 주시던 어머님은 내가 매월 드린 용돈을 모아 어느날 수천만원의 목돈을 건네 주셨다.
그날 나는 그 돈 속에 숨겨진 어머님의 사랑에 목이 매어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셋째 아이를 가지면서 사업을 정리하고 두 아들을 데려와 직접 양육을 했을 때, 어디서든 무던하게 뒹구는 웃음 많은 아이들 모습 속에 그동안의 어머님 수고와 눈물이 선명하게 보여 가끔씩 뭉클해졌다.
일절 잔소리를 하지 않고 늘 사랑만 베푸시는 모습을 보며 남편에게 어머님의 과거를 물은 적이 있다.
그때 남편은 “우리 엄마는 이복 여동생만 6명인 맏딸이잖아. 성격과 개성이 각기 다른 이복 자매들과 자라오신 경험을 통해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해진다는 생각을 항상 하셨대.”라고 말했다.
6명의 말 많고 개성 강한 이복 여동생들과 사시며 어머님이 터득하신 삶의 지혜는 바로 당신이 참고 사랑하시는 것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신만의 이익을 취하느라 안달인 세상의 야단스런 소음 속에서
‘나 하나만 참으면 모두가 편해진다’고 하셨던 어머님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그리고 가끔 생각한다. 나는 과연 세 아들에게 우리 어머님 같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아이들의 모습이 못마땅할 때마다 비수 같은 지적과 잔소리를 날리고, 내 마음에 맞지 않는 모습을 견디지 못해 늘 닦달해 왔다. 어머님에 비하면 여전히 갈길이 멀기에 나는 아직 팔순이 넘은 어머님께 배울 게 많다.
당신의 삶을 통해 나에게 말보다 삶으로 가르치는 게 남는 것임을 친히 가르쳐 주신 어머님.
그것이야말로 부모가 자녀에게 남겨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임을 그때 갓 29세였던 며느리는 이제 50이 넘은 반백의 나이에야 깨닫는다.
그날 어머님은 내게서 단순히 칼을 뺏어가신 게 아니었다.
내 안의 혈기와 하고픈 조잡한 말들은 참고, 그저 사랑하며 살라는 엄중한 가르침이었다. 어머님은 당신의 삶을 통해 그것을 몸소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올해 설 명절 동안 몸이 쇠약해지셔서 더 이상 칼을 쥐시지 못하고, 며느리에게 일임하신 어머님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