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소에서 매월 1회씩 의사, 간호사 선생님이 직접 방문해서 아빠의 건강상태를 점검해 주신다.
2년여 동안 팔다리를 쓰지 못하신 채 누워만 계시는 아빠를 병원에 모시고 갈 일이 있을 때마다 전에는 고가의 앰뷸런스를 불러서 가는 등의 수고를 했어야 하는데 직접 방문해서 건강을 체크해 주시니 우리 가족에게는 천군만마처럼 큰 도움이 된다.
아빠는 성격이 낙천적이고 유쾌한 분이시다.
할아버지는 6.25 전쟁통에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한 막내아들을 직접 등에 업고 피난길에 오르셨다. 비록 할머니와 아빠 위의 아들, 딸과는 그 길로 영영 이별이 되었지만 아빠와 함께 온 큰아버지, 고모, 아빠까지 삼 남매를 할아버지는 극진한 사랑과 정성으로 키우셨다.
그중에서 특히 돌 때 소아마비를 앓은 이후 다리가 불편한 막내아들은 할아버지에게 각별한 자녀였다. 할아버지는 그 아들을 학교에 업어서 등하교를 시키며 교육을 시키셨고, 대학교육이 드물던 당시 국내 유수의 대학까지 졸업하시도록 당신의 온 삶을 다해 지원해주셨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각별한 사랑과 기도를 받고 자라오셔서인지 아빠는 목발에 의지해 걸으시면서도 구김살없이 늘 긍정적이고 유쾌한 성격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재치 있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띄워 주셨고, 사람들의 비아냥에도 여유 있게 대처하시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나에게 아빠의 장애는 그저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불편한 점 하나에 불과했다.
어린 시절 길에서 우연히 아빠를 만나면 혹여 딸이 상처받을까 봐 아빠는 일부러 길을 돌아서 가시거나 모른 척하시려 했지만 그때마다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아빠에게 가서 "우리 아빠야. 인사드려."라고 자랑스레 인사를 시키곤 했다.
그런 일이 있던 이후에 아빠는 "그때 네가 아빠를 아는 척해줘서 아빠도 기뻤단다."라고 말씀해 주곤 하셨다. 나는 딸이 아빠를 아는 척하는 게 당연한 건데 우리 아빠는 왜 저렇게 말씀하실까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이유는 여고시절 친구를 통해 우연히 알게 되었다. 어느날우리 집에 놀러 왔던 친구가 아빠를 보고 인사를 하면서 내심 놀란 눈치를 보였다. 그때는 별 내색 않고 헤어졌는데 이후 나와 대화하는 도중에 우연히 "장애인들은 특유의 그런 표정이 있어. 그 가수 조덕배 있지? 그 사람도 가끔 인상 쓰는 이상한 표정이 보이는데 난 그런 게 싫더라."라고 얘기를 했다.
그때 나는 갑자기 목구멍에 큰 돌하나 걸린 듯한 당혹감을 느꼈다.
'내가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속으로 그런 편견을 갖고 있었구나. 친구는 지금 에둘러서 우리 아빠의 얘기를 하는 건가.' 마음 한편이 바람이 훑고 가듯 싸해졌다.
나는 이전까지 장애인과 정상인의 경계에 대해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친구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곤고한 편견의 빗장이 걸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공부를 유독 잘했던 그 친구의 꿈은 장래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이후 의대를 간 그녀가 자신의 환자는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가끔 궁금해지곤 했다.
아빠는 사람들의 편견 어린 시선의 폭력을 일상적으로 겪으시면서 길에서 딸이 아는 척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우셨구나.
집안 사정으로 몇 주 못 뵀던 동안 아빠의 몸도 야위고 목소리도 이전보다 힘이 없어졌다. 의사 선생님은 다행히 아빠가 고혈압, 당뇨는없다며 욕창을 위한 약처방을 내려 주셨다. 그러면서 아빠가 평소에 우울지수가 높은 것으로 나와서 "상담자 서비스가 있는데 집에서 상담받으실 수 있도록 보내드릴까요?"라고 했다.
간호사의 그 말에 아빠는 잠이 쏟아지듯 나른해진 눈을 갑자기 크게 뜨시더니 목청을 높이셨다.
"아휴, 지금도 우리 와이프, 딸들, 손주까지 돌아가면서 말 시켜피곤해 죽겠는데 뭔 상담까지 보내요? 냅둬요."라고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말씀하시면서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빠의 모습이 웃겨서 모두 엷게 미소를 지으며 헤어졌다.
나는 아빠의 그런 점을 좋아한다.
2년여간 누워만 계시며 갑갑하고, 외로우실 법도 한데 늘 유머의 끈을 놓지 않으시는 것.
어떤 경우에도 상대를 배려해서 편안하도록 말해 주시는 것.
불쑥 튀어나오는 농담으로 함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예기지 못한 때 환히 밝혀 주시는 것.
나이 들면서 주변에서 몸이 쇠약해지면서성격도 강퍅해지거나 가족들을 괴롭히는 사례들을 간혹 듣는다.
다행히 아빠는 불평 한 마디 없이 주변 가족들을 배려하신다.
"당신이 내 곁을 지켜줘서 고마워. 당신은 최고의 아내야."
"옛날에는 딸만 셋 낳았다고 아쉬워했는데 너희들이 아니면 어쩔 뻔했니? 딸만 있어 참 좋다."
"우리 사위들만 한 사람들 없지. 이렇게 장인한테 하느라고 애쓰니 내가 그저 고맙지."
"우리 손주가 대학 다닌다고 우리 집에 와 있으니 내가 마음이 든든하고 좋다."라는 등의 늘 고맙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담아 말씀하신다.
예전에는 무심히 흘려듣던 아빠의 언어들이 이제는 다시 듣지 못할 유언처럼 들린다.
물론 가끔 "네가 하는 게 제일 못해. 넌 왜 이렇게 일을 엄벙덤벙 하니?"등의 핀잔도 주신다. 그러나 나는 그런 순간의 아빠 핀잔도 좋다. 나에게 그렇게 애정 어린 꾸중을 하는 아빠가 아직 계시다는 뜻이니까.
어쩌면 그런 아빠 특유의 낙천성과 긍정의 힘, 세상을 향한 애정 어린 시선이 있기에 우리 가족들도 때론 힘들지만 이렇게 아빠를 돌보는 것을 감사하며 버텨왔는지 모른다.
가끔 엄마가 말씀하신다.
"네 아빠가 성질부리는 사람이었으면 난 못살았을거야. 그나마 이 정도로 사람이 순하니까 감당한 거지.
네 아빠가 그런 건 참 좋아."
당신 때문에 마음 쓰는 가족을 배려하러 아픈 것도 묵묵히 참고 견디시는 아빠, 그 마음을 헤어리고 묵묵히 곁을 내주는 엄마.
나도 아빠처럼 나이 들고 싶다.
나이들 수록 주변을 더 품어주고, 말 한마디에도 배려를 담아서 해주는 어른으로 나이 들고 싶다.
여고시절, 장애인 특유의 표정이 불편하다고 나의 면전에서 불평했던 그때 그 친구는 이런 아름다움을 알기나 할까.
이기주의 '언어의 온도'책에서 아픈 아이를 알아보는 할머니를 향해 손주가 할머니는 어떻게 그리 잘 아느냐고 물을 때 할머니가 대답한다.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은 더 아픈 사람이란다."
다리의 장애로 아팠던 시간만큼 우리 아빠는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게 됐고, 그 눈으로 주변의 가족들과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더 깊어졌나 보다.
이번 주말 다시 아빠를 뵈러 가야겠다.
예전 학교에서 돌아와 책가방을 놓기 바쁘게 학교에서 쓴 글이라며 자랑스레 읽어줬던 그 어린 딸로 돌아가 아빠께 내가 쓴 글을 읽어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