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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쉬는 것도 여행이지

백조의 마을에서만 일주일간 둥둥 떠다녔다

by 이인규

나의 여행은 늘 바빴다. 오전 7시면 일어나 카페에 가는 걸로 하루를 시작해 밤 10시, 11시가 다 되도록 돌아다닌다. 하루에 3만 보 이상 걷는 건 당연하다. 탐험해야 할 동네를 정하면 발길 닿는 대로 걷고 걷는다.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여유는 커피 마시는 동안에만 허용했다. 커피를 다 마시면 또 다른 카페로 옮겨 또 다른 커피를 마셨다. 하루에 카페만 4-5군데 가보기도 하고, 지하철 몇 정거장 거리를 정처 없이 걷기도 하고, 미술관에서 나와서 또 미술관을 가기도 했다. 과한 인풋을 즐겼다. 터질 듯이 채워지는 느낌이 좋았다. 이것이 내가 도시를 여행하는 방식이다.


이번 여행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랬을 것이다. 베를린에 도착하고 첫 아침을 맞이한 날에도 2만 보 넘게 걸었으니까. 카페 3군데, 음식점 2군데, 서점 1군데, 미술관 1군데, 그리고 상점 여러 군데. 한국에서 떠나올 때 컨디션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돌아다녔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에 그 일이 일어났고, 모든 것이 멈췄다.


에너지가 모두 소진된 나는 크로이츠베르그의 Landwehr Canal 주변을 표류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강가 주변의 카페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커피를 다 마시면 숙소에 들어와 또 한참을 멍하게 창밖 풍경을 보며 앉아있었다. 오후엔 강가 주변을 걷다가 또 한참을 앉아 있었고, 백조만 한 시간이 넘게 쳐다보기도 하고, 맥주 한 캔 마시면서 일기를 쓰기도 했다. 이쪽 방향으로 걸었다 저쪽 방향으로 걸었다를 반복했다. 매일 봐도 좋은 풍경이었다. 이 동네에 머물게 된 것이 너무 감사할 따름이었다.


하루는 백조를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 둑의 끝자락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막상 백조가 가까이 다가오니 얼음이 되어 버렸다. 예쁜데 무서웠다. 또 하루는 Summer와 Admiral 다리 방향으로 걸으며 강이 넓어지는 탁 트인 풍경을 마주했는데,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었다. 라들러를 한 병씩 손에 들고 둑에 앉아 한참 동안 백조를 바라봤다. 오후 4시가 넘어가면서 해는 물을 향에 더 내려왔고 반짝이는 물빛에 마음의 파장도 따뜻하게 퍼져나갔다.


일주일 가까이 이곳에 머물며 한 일은 2-3일에 한 번씩 열리는 장터 구경과 (내가 머무는 동안 세 번이나 열렸다) 동네 카페 가기, 개천에 앉아있기, 집에 누워있기가 거의 전부였지만 충분했다. 현관문을 열고 나왔을 때 마주하는 알록달록 가을의 나무들과 개천의 풍경은 하루에 몇 번씩 봐도 계속 좋았다. 많은 걸 보고 듣고 채우는 여행도 좋지만 좋은 것을 반복해서 깊게 담아내는 여행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이 동네가 우리 동네인 것 같은 기분이 들기 시작했는데 두 밤만 더 자면 집에 간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고마운 사람들 덕분에 빨리 집에 가고 싶었던 마음이 어느새 아쉬운 마음이 되었다. 저녁엔 지인의 동네로 피자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내일은 서울에서 친구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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