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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레 Oct 30. 2021

올드보이

당신은 아직,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 작가 신청용으로 작성된 글이며 추후 사진 첨부  내용 보강 작업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들어가기 전에


갑작스럽지만 여러분들은 군만두를 좋아하시나요? 전 군만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트라우마가 있는데, 현장에서 작업을 하는데 유달리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기름진 걸 도저히 넘길 수가 없는 상황인데, 저녁 식사가 중국집으로 결정됐습니다.


기름진 것도 매운 것도 도저히 먹고 싶지 않아서 물만두를 부탁했습니다. 물만두라면 좀 먹을 수 있을 것 같았고 평소에도 물만두를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전달이 꼬였나 주문한 물만두가 오지 않았습니다.


대신 온 것은 군만두였는데 말이 군만두이지 튀긴 거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기름진 군만두였습니다. 그렇다고 굶을수도 없는 스케줄이었기 때문에 고작 만두 하나 때문에 화를 낼수도 없고, 그냥 먹고 작업했습니다만, 그날부터 전 군만두를 잘 먹지 못하게 됐습니다. 일종의 트라우마죠.


군만두하면 빼놓을 수 없는 영화가 있으니, 혜성처럼 등장한 군만두 홍보 영화 <올드보이> 되시겠습니다. <살인의 추억>과 함께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기를 상징하는 영화이기도 한데요, 오늘은 이 영화에 대해 얘기 나눠보겠습니다. 타래 시작합니다.



잠언과 거짓말


잠언 6장 4절,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인용되는 구절입니다. "웃어라, 온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와 함께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죠.


그리고 이 잠언 6장 4절은 인상적인 장면에 한두번 나오고 마는 구절이 아닙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6장 4절은 이우진의 펜트하우스에 들어가기 위한 문자 그대로의 '열쇠'거든요.


늦었지만 인물 소개를 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오대수,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오늘만 대충 수습하고 살자"해서 오대수라고 합니다.


이우진, 이 영화의 적대자입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오대수를 범죄자들이 이용하는 사설 형무소에 십년간 가둔 장본인입니다. 이 영화의 미스터리는 '이우진은 왜 오대수를 10년간 감금했나'입니다. 오대수는 이우진에게 잃어버린 10년의 복수를 하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 그거 아십니까? 영화에서 인용되는 잠언 6장 4절은 오류입니다. 개역성경에 근거한 잠언 6장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잠언 6장 4절) 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을 감기게 하지 말고

(잠언 6장 5절)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난느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잠언 6장 6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그렇습니다, 깐느영화제에 가서 상까지 받은 <올드보이>는 이런 치명적인 오류를 가지고 있습니다. 잘못된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료 조사를 철저히, 검토를 꼼꼼히' 명작 속에 남은 오류는 두고두고 창피가 될 테니까요.


그런데 잠언 6장 5절이 잠언 6장 4절이라며 잘못 인용된 것이 과연 실수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어떤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는 혼자서 만드는 게 아닙니다. 적게는 두자리수에서 많게는 세자리수의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영화입니다. 게다가 영화는 1년 가까이 만듭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성경책을 들여다보고 '이 인용, 잘못된 거 아녜요?' 질문할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는 건 상상하기가 어렵습니다. 편집 단계에서라도 재촬영 한 번 하고 녹음 한 번 다시 하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오류거든요. 게다가 영화에 이 오류가 실수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장면이 있어요.


<올드보이>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들이기도 한데, 오대수는 사설 형무소 안에서 개미에게 시달리는 환각에 시달립니다. 미도도 언젠가 지하철에서 거대한 개미의 환각을 경험한 적이 있지요. 다시 잠언 6장으로 돌아가봅시다.


(잠언 6장 6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언 6장 7절)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잠언 6장 8절)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언 6장 9절)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잠언 6장 10절)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있자 하면

(잠언 6장 11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영화 속 개미의 환각은 분명하게 잠언 6장의 내용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잠언의 6장 4절만이 아니라 6장 전체에 있었던 거지요. 잠언 6장의 전체 구절들이 <올드보이>라는 영화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잠언 6장 5절의 내용을 잠언 6장 4절이라며 인용한 것에는 어떤 의도성이 숨겨져 있다고 우리는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올드보이>가 사실은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이기 떄문입니다.


그럼 잠언의 다음 구절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잠언 6장 17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잠언 6장 19절)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올드보이>의 주제가 '거짓말'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를 독해하다보면 이 구절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오이디푸스와 근친상간


<올드보이>의 가장 보편적인 해석에 따르면 오대수는 '오이디푸스'입니다. 오이디푸스는 근친상간의 숙명을 타고난 자입니다. 예언 때문에 버려진 오이디푸스는 비극적인 운명에 의해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르고, 결국 나락에 빠집니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그리스 비극의 원형이죠.


오대수가 오이디푸스로 해석된 이유는 어렵지 않습니다. <올드보이>의 가장 큰 충격적인 결말에 숨겨진 비밀이 바로 '근친상간'이기 때문입니다.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자, 오호라 오이디푸스로구나. 하지만 이런 배치는 너무 노골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서 이런 가정을 해봅시다.



오디세우스와 거짓말


그건 바로 오대수가 오이디푸스가 아니라 '오디세우스'에서 따온 이름이라는 가정입니다. 사실 오대수와 오이디푸스보다 오대수와 오디세우스가 더 직관적으로 비슷해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디세우스는 그리스 신화 역사상 최고의 거짓말쟁이이기도 합니다. 오디세우스는 도저히 끝나지 않고 이어지던 트로이 전쟁을 끝낸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명예와 체면이 중요시되었는데 오디세우스는 명예, 체면, 아랑곳하지 않고 트로이 목마를 만들어 비열하게 승리를 거둡니다. 고대 그리스에선 존경받기 어려운 비겁한 행위였죠.


전쟁을 끝마친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가려다 신들의 분노를 사 장장 10년에 걸친 대모험을 하게 됩니다. 기막힌 여정 끝에 <오디세이아>의 마지막에 이르면 결국 우주까지 대항해를 하게 되는데 그걸 다룬 영화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라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죠. 물론 거짓말이지만.


여기서 오대수와 오디세우스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디세우스의 모험담 <오디세이아>를 좀 심하게 납작하고 폭력적으로 요약하면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개고생해서 10년 넘게 걸린.SSUL"이 됩니다. 오대수는 15년간 사설 형무소에 갇힌 채 집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오대수는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쓰고 있다가 사라집니다. 시적으로 표현하다면 빗물 사이로 사라진 셈입니다.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는데 장장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이유는 포세이돈 신의 분노를 샀기 때문입니다. 오디세우스는 포세이돈의 외눈박이 아들의 눈을 찔러 눈을 멀게 만들었거든요.


이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포세이돈의 인성입니다, 신이니까 신성이라고 표현해야 맞으려나요? 그리스 신화 최악의 인성갑 헤라클레스의 위협에는 깨갱하고 엎드린 주제에 자기보다 약한 자에게는 진심을 다해 싸우는 포세이돈을 보세요! 사실 이건 헤라클레스가 좀 너무한 거 같지만.


오대수와 오디세우스의 공통점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오디세우스도 '감금'을 당했던 인물입니다. 님프 마법사 칼립소는 표류하고 있던 오디세우스를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그래서 칼립소는 오디세우스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섬에 가둬둔 채 (전승에 따라 5년 혹은 7년간) 일을 시킵니다.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점도 오디세우스와 오대수 간의 공통점입니다. 오디세우스는 노인으로 변장하여 이타카로 돌아갑니다. 오디세우스의 늙은 개와 시종만이 그를 알아보고, 나머지는 문전박대합니다. 오대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가족들을 살해한 살인마란 누명을 써, 돌아갈 집이 없어졌습니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올드보이>의 레퍼런스가 되는 두 가지 고전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오디세우스 이야기(즉 오디세이아)이며, 다른 하나는 성경 속 잠언 6장입니다.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는 서구 문명을 이루는 두 축입니다.



이우진에 대하여


오디세이아와 잠언은 영화를 독해하는 '진짜 열쇠'가 되어줍니다. 영화에 인용된 잠언 6장 4절만을 놓고 보면 안됩니다. 그건 '거짓말'이니까요. 이 영화는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거짓말을 파헤치기 위해서, 우리는 영화를 더 깊이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우진이라는 인물에 집중해봅시다. 이우진은 물과 관련이 깊은 인물입니다. 이우진은 비가 쏟아질 때 오대수를 납치했고, 누이가 물에 빠져 익사하였으며, 그가 거주하고 있는 펜트하우스에는 수로가 설치되어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마지막에 오대수가 펜트하우스를 찾아왔을 때, 이우진은 오대수가 보는 앞에서 알몸으로 샤워를 하기까지 합니다. 관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 여유로운 모습입니다. 펜트하우스에 물이 흐르고 있다는 것부터가 좀 이상합니다. 한국에 이런 집은 없어요. 농담삼아 얘기하자면 풍수지리학적으로 안 맞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수맥만 흘러도 건강이 나빠진다고 믿는 한국인데 말이에요. 창작물에서 개연성이 맞지 않거나 이상할 때는 작가가 '의도'를 봐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 의도는 이우진을 바다의 신, 포세이돈으로 독해해달라는 요청이 아닐까요.


이우진의 펜트하우스는 사람이 사는 집 같지 않습니다. 박찬욱 감독이 펜트하우스를 만들 때 특별히 요청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는 집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고요. 우리는 그 이유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우진은 신이고, 그가 사는 펜트하우스는 신전입니다.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닙니다.


여기서 <올드보이>의 첫번째 실체가 드러납니다. 이 영화는 신과 인간이 대적하는 이야기입니다. 실수로 신의 분노를 산 인간은 더 이상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신이 분노한 이유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신께서는 그 과정을 모두 감시하며 내려다보고 있지만요.


캐스팅에서도 그 대비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오대수와 이우진은 '올드보이(=동창생)'입니다. 그런데 오대수는 한참 나이가 든 것처럼 보이는 반면 이우진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동안입니다. 누가 이 둘을 동갑이라 생각하겠습니까?


이 캐스팅도 다분히 의도된 것입니다. 메이킹 과정에서 알아볼 수 있는데 오대수를 연기한 최민식 배우는 박찬욱 감독에게 "오대수보다는 이우진을 연기하고 싶다" 요청했다 합니다. 그러자 박찬욱 감독은 웃으며 "이우진을 연기하시면 오대수 역할로는 신구 선생님 정도를 모셔와야 한다" 했다고.



시간


영화가 시작되면 시계가 등장합니다. 오대수가 15년이란 '시간'동안 감금된 비밀을 파헤치는 영화라서일까요? 그렇다기엔 도입부에서 '시간'이라는 요소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조합니다. 오프닝 크레딧에서는 등장하는 인물들의 글자는 초침처럼 똑딱똑딱 흐르며 시계를 흉내냅니다.


(모든 음악이 그렇지만) 클래식 음악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클래식 음악은 도입부에서 제시된 모티프는 음악 전반을 지배하게 됩니다. 마침 생각나는 작품이 <리즈와 파랑새>인데 이 작품은 도입부에서 오로지 미조레와 노조미만을 보여주고 동화 '리즈와 파랑새'를 소개하면서 모티프를 제시해요.


이를 통해서 영화는 도입부를 통해 이 영화가 '미조레와 노조미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라 선언하고, 그 매개체가 동화 '리즈와 파랑새'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올드보이>의 오프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이 영화가 '시간'에 대한 영화라는 선언입니다.


'시간'의 모티프는 영화 전반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오대수는 자신이 납치되었던 장소에서 다시 깨어납니다, 그런데 15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서, 아파트 옥상에서 깨어나죠. 다분히 작위적인 설정입니다. '시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계는 인상적인 소품으로도 쓰여요.


왜 시간일까요?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메멘토 모리'라는 것인데,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기억하라는 격언입니다. 이 세상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하나는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시간입니다.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 메멘토 모리는 바로크 시대에 유달리 강조되었습니다. 바로크 시대는 '메멘토 모리'의 시대에요. 더 재밌는 것은 박찬욱 감독이 바로 이 바로크 예술의 열렬한 마니아라는 것입니다. <올드보이>의 음악만 해도 바로크 음악의 모방입니다.


Old Boy OST - The Last WaltzYeong-wook Jo - Old boy soundtrack (EMI Korea) 2003youtube.com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유달리 기괴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이유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예술은 바로크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바로크는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인데, 우연과 자유분방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괴함'이 강조되면서도 그 안에서 질서를 갖추고 있습니다.


바로크를 공부할수록, 박찬욱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올드보이>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지 바로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크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도록 하겠습니다.



시간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흐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대단히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 영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오대수와 미도는 딸의 행방을 찾으러 딸이 사는 곳을 아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전당포 주인입니다. 전당포 주인은 끔찍한 사건 이후 오대수의 딸이 스톡홀름으로 입양을 갔다며 주소를 적은 메모지를 건넵니다. 이 장면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시계로 둘러싸인 시간의 세계라는 겁니다.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근친상간보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화의 진실입니다. 오대수의 딸은 스톡홀름에 입양을 갔다는 것. 그리고 이 전당포만이, 이우진의 감시와 조작에서 벗어난 공간이었다는 걸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근친상간 는 임포스터가 아니었던 것이죠.




근친상간이라는 거짓말


미도가 오대수의 딸이라는 걸 거짓말이라 가정하고 영화를 보면 의아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그 어디에도 오대수의 딸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둘의 혈육관계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단 하나밖에 없고 그나마도 몹시 모호합니다.


오대수는 사설 형무소 안에서 수많은 개미들이 들러붙는 환각에 시달립니다. 미도는 지하철 안에서 거대한 개미의 환각을 봅니다. 이 둘이 가진 공통점은 바로 '개미의 환각'입니다. 그런데 미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쵸. 고독, 하면 무조건 개미죠. 내가 만나본 진짜 외로운 사람들은 다 잠깐이래도 개미 환각 겪었어." 개미 환각은 사실 보편적인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본인은 모르겠지만) 늘 개미 환각에 시달리고 있을 겁니다. 그 이유는 뒤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영화에서 제시되는 미도=오대수의 딸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선물한 상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상자, 알고보면 대단히 작위적인 상자입니다. 그러니까, 진실을 담고 있다기에는 너무 많은 '연출'이 들어가 있습니다. 상자의 무늬부터가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이 상자의 무늬는 사실 오대수가 납치되던 날, 오대수가 쓰고있던 우산의 무늬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이라기엔 그 포장지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작위적입니다. 그리고 박찬욱 감독은 여기에 한 번 더 강조를 넣습니다. 오프닝 크레딧에서 '감독 박찬욱'이라는 크레딧은 우산의 무늬 위에서 떠오릅니다. 우산의 무늬에 '연출'이라는 레이어를 덧바르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탐미적인 보라색의 패턴은 '연출'을 의미합니다.


미도가 오대수의 딸이라는 유일한 증거는 '연출'의 결과인 셈입니다. 이우진이 영화 내내 오대수를 감시하고, 도청하며, 어떤 행동을 하게끔 계속해서 유도했던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우진은 오대수를 '조작'하고 있다는 것을요. 이 상자는 사실 스스로가 '믿을 수 없는 존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


장르로 넘어갑시다. 미스터리 장르에는 두 가지 유명한 규칙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녹스의 10계이고, 다른 하나는 반 다인의 20칙입니다. 미스터리, 추리물의 기본이 되는 규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녹스의 10계 중 2계:  당연하지만 초자연적이거나 불가사의한 수단은 안 된다. (All supernatural or preternatural agencies are ruled out as a matter of course.)
반 다인의 20칙 중 8번째 규칙: 범죄의 수수께끼는 엄격한 자연의 법칙에 따라 풀려야 한다. 범죄를 해결하기 위하여 점을 친다든가 심령술, 최면술 등을 사용하는 것은 금물이다.


이제 우리는 영화에서 가장 의아한 존재를 얘기해야 할 순간이 왔습니다. <올드보이>는 미스터리 추리물로서의 자의식을 가진 작품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나와선 안될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바로 최면술사입니다.


미스터리 추리물에 최면술사가 나오면 안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공평한 싸움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최면술사가 범인의 편에 선다면 트릭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됩니다. 최면술사가 탐정의 편에 선다면 범인을 너무 쉽게 찾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최면술사는 추리물에서 금기입니다.


게다가 추리물 안에 최면술사가 등장하면 작품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어디부터가 최면에 걸린 거지? 하고요. 박찬욱 감독님이 영화는 잘 찍으시지만 아무래도 미스터리 추리물에 대한 조예는 깊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신인 작가도 잘 범하지 않는 실수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하시다니.


그런데 박찬욱 감독님이 <올드보이> 제작이 결정되었을 때 팬카페에 남긴 근황 글을 읽어보면 정반대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찬욱 감독님의 친구가 <39계단>이라는 미스터리 소설 동호회를 만들었는데 본인이 그 멤버 중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사실 장르에 조예가 대단히 깊은 인물 중 하나입니다. 다른 게 아니라, 박찬욱 감독은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평론가였던 사람이거든요. 어느 유명한 평론가는 박찬욱 감독의 성공에 이런 평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박찬욱이라는 위대한 감독을 얻었지만, 우리는 박찬욱이라는 위대한 평론가를 잃었다." 박찬욱의 영화가 촘촘한 레이어로 구성된 이유는 바로 본인이 평론가이기도 했던 경향이 있을 겁니다. 말하자면 영화의 독해법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죠.


'최면술사'는 관객들로 하여금 의문을 품게 만드는 존재입니다. 만약 최면술사가 사건의 트릭에 개입하고 있다면, 영화는 믿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관객들은 영화의 '이상함'을 눈치채고 그 이상함을 통해 작가의 '의도'에 접근하게 되겠죠.


다시 말해서 최면술사라는 존재는 일종의 고백입니다. "이 영화는 어딘가 이상하다. 미스터리 추리물로서 결함이 있다. (작품의) 장르가 아닌 (작가의) 의도를 보라," 하지만 후술할 어떤 이유로 인해 이 요청은 묵살되고 말았습니다.


<올드보이>는 이상한 영화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가진 기묘함의 근원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의도적으로 '이상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영화는 온통 거짓말을 하고 있는 데다, 의도적으로 장르의 '기본'을 지키지 않아서 작품 전체를 '믿을 수 없게' 만들었어요. 이렇게 '이상함'이 존재하는 이유는 게임으로 치면 바로 '히든엔딩' 즉 '진엔딩'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추리 과정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그대로 따라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진엔딩을 보지 못하고 노멀엔딩, 혹은 배드엔딩에 갇히고 맙니다. 그럼 지금부터 진엔딩을 해금하러 가봅시다.


++ 진엔딩이라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올드보이의 주제가 거짓말이라는 가정 하에서의 진엔딩이라고 명시할 것' ++


진엔딩을 위한 힌트는 사실 올드보이 10주년 기념 상영 당시 GV에서 던져졌습니다. 박찬욱 감독은 이 GV에서 <올드보이>가 486세대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고 만든 영화라 얘기했습니다. 제가 10주년 기념 상영 GV에 참석한 적이 있기 때문에 기억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런 불공평한 대결에서 숨겨진 조건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영화에 나온 모든 요소를 샅샅이 찾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인 '시간'을 주목해봅시다.


영화의 기본적인 컨셉은 명확합니다. 오대수는 15년간 감금되었고, 5일동안 그 이유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중간에는 오대수가 진실을 파헤치는 기간이 언제인지가 명확하게 제시됩니다. 7월 2일입니다.


오대수가 감금된 시기는 1988년부터 2003년까지 15년입니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오대수의 성장배경은 바로 80년대 학번, 60년대생 - 즉 486세대입니다. 이는 시대의 흐름을 보여주는 인서트로 분명시됩니다. 이러한 오대수와 이우진의 성장배경은 오대수가 본인의 모교인 상록고등학교를 찾아갔을 때 다시 한 번 강조됩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사회적 배경, 그리고 성장 배경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민하게 보지 않으면 넘어갈 수밖에 없는 어떤 지점을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불필요할 정도로 큼지막하게 강조되는 '날짜'입니다. 7월 2일이라는 날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날짜입니다. 인터넷에 검색해보니 로스웰 UFO 추락사건이 일어난 날이긴 한데, 아무래도 로스웰 UFO 사건과 <올드보이>는 무관해보이죠. 그런데 범위를 '486 세대'로 한정지으면 어떤 역사적 사건이 드러납니다. 1987년 6월 9일,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세상을 떠납니다. 이 사건은 국민의 분노를 일으켜 '6월 항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후 7월 9일 민주국민장으로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이 치뤄집니다.


여기서 <올드보이>의 새로운 레이어가 드러납니다. 바로 (기괴하게 얽힌) 한국의 근현대사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근현대사를 의식하지 않은 적이 더 드뭅니다. 그의 영화 속 개인의 행동은 늘 시대의 어떤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진엔딩을 여는 열쇠


근친상간 엔딩이 <올드보이>의 진엔딩이 아니라는 사실은 클라이막스에 돌입하기 직전, 펜트하우스에 들어가려고 하는 장면에 노골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오대수는 잠언 6장 4절에서 유추한 비밀번호로 펜트하우스에 들어가려 하지만, 번번히 실패합니다. 오대수가 펜트하우스 비밀번호를 계속 틀리자 이우진과 그 수하가 엘리베이터에 들어와 비밀번호를 누릅니다. 0604. 그리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충격적인 결말이 펼쳐집니다. 근친상간과 그로 인한 자해입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비밀번호가 애초부터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이-' 이라는 구절은 처음부터 6장 4절이 아니라 6장 5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아예 다른 관점에서 이 장면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올드보이>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오대수가 되어 0605라는 비밀번호를 입력할 수는 없습니다. DVD에 숨겨진 엔딩이라도 넣어주셨더라면 좋았을런만, 그러면 영화라는 매체가 아니게 되어버리죠. 결국 우리가 새로운 히든엔딩을 찾아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독해'입니다.


비밀은 두 남자의 얼굴 속에 담겨 있습니다. 둘은 분명히 같은 나이인데 이우진은 여전히 젊고 생기 있습니다. 반면에 최민식은 바로크 회화 속 인물처럼 주름이 깊고 훨씬 나이가 많아 보입니다. 이 둘의 근원적 차이는 바로 계급에 있습니다.



계급


하루하루 대충 수습하고 살아가는 평범한 샐러리맨인 오대수와 달리 이우진은 분명한 상류층이고, 부르주아입니다. 이 계급의 차이가 둘의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집중해서 영화를 다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 숨겨진 마지막 레이어입니다. 바로 자본가와 노동자입니다.


이우진, 자본가입니다.

늘 정돈된 수트를 입으며 머리를 뒤로 넘겼습니다.

자기관리에 철저하고 요가를 통해 몸을 단련하기도 합니다.


오대수, 노동자입니다.

골방에 갇힌 채 삶의 이유 없이 살아갑니다.

오대수에게는 그 어떤 향락도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는 아무 옷이나 입으며, 머리는 정돈되지 않았습니다.


이 레이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오대수가 15년간 감금되었다는 설정은 사실 은유입니다. 노동자들은 좁은 공간에 갇힌 채 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삶의 재미와 향락을 모두 박탈당한 채 살아갑니다. 감금된 것이나 다름없는 삶입니다.


잠언의 인용은 이를 더 분명히 합니다. 잠언 6장 4절(사실은 6장 5절)만 놓고 보면 잠언이 마치 속죄와 구원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6장 4절을 6장 5절로 인용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는 거짓된 유도입니다. 잠언 6장은 사실, 게으른 자에게 노동을 하라고 훈계하는 내용입니다.


(잠언 6장 4절) 네 눈을 잠들게 하지 말며 눈꺼풀을 감기게 하지 말고

(잠언 6장 5절) 노루가 사냥꾼의 손에서 벗어난느 것 같이, 새가 그물 치는 자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 같이 스스로 구원하라.

(잠언 6장 6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언 6장 6절)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잠언 6장 7절)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잠언 6장 8절)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언 6장 9절)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잠언 6장 10절)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있자 하면

(잠언 6장 11절)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잠언의 6장은 훈계입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게으른 놈들아! 저 개미들처럼 열심히 일을 하란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가난해지고 말거야!"


앞서 '여러분들도 늘 개미 환각에 시달리고 있을 겁니다'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늘 강박에 시달립니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을 해야 제대로 된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고요. 그래서 개미 환각은 보편적 감각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교육 받으니까요. <개미와 베짱이> 모르는 분 있으신가요?


그러나 이런 잠언 6장 4절을 인용하는 것은 '자본가'인 이우진입니다. 그런데 이우진이 영화 속에서 일다운 일을 하는 장면이 단 한 번이라도 나왔던가요? 한가롭게 복수 계획을 세우고, 자신의 욕망만 충족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이우진은 기만하는 자입니다.


자본가들은 늘 노동자들에게 훈계합니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고요. 왜냐하면 '그래야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짐승이나 다름 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고요.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늘 세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딱히 잘못을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마치 감옥에 갇힌 것만 같은 감각으로 인생을 삽니다. '죽을만큼 노력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우리는 늘 노력의 강박에 시달립니다.

"노력해! 노력 안했어? 속죄해! 더 노력을 하란 말이야!"


우리는 개미를 보며 소외를 느낍니다.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것 같아서,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것 같아서. 이런 감각을 뜻하는 단어도 이미 존재합니다. 바로 '인간소외'입니다.



15년의 의미


이제 우리는 이야기의 실체에 점점 더 다가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대수는 왜 하필 '15년간' 감금되어야 했던 걸까요? 살인죄의 공소시효가 15년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 레이어는 이미 의도적으로 엉망진창이 된 레이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해답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사실 그 해답은 영화 속에 직접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바로 IMF입니다. IMF는 대한민국 사회를 급격하게 변화시켰습니다. '구조조정'이 시행되고 노동자들의 지위는 극도로 불안정해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내쫓겼습니다.


인생의 모든 자유와 향락을 대가로 일해왔던 노동자들은 이제 세상 밖으로 내던져집니다. 해고를 당한 사람들은 상자를 들고 회사를 나가는 것처럼, 오대수는 상자에 담긴 채 원래 있었던 길거리로 내던져집니다. 푸른 초원인줄 알았더니 아파트 옥상 위더라는 연출은, 일자리로부터의 해방이 사실은 벼랑 끝(아파트 옥상 위)으로 내몰리는 것과 다름이 없더라는 은유가 아닐까요.


그래서 노동자인 오대수는 자신을 길거리로 내던져버린 자본가인 이우진을 찾아갑니다. "나를 왜 감금했나" 그리고 "나를 왜 내던졌나"고 묻기 위해서요. 그러나 자본가인 동시에 신이기도 한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대답합니다. "그건 네가 잘못했기 때문이야."



오대수가 파멸한 이유


결말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오대수가 저지른 '진짜 잘못'을 파악할 필요가 있습니다. 15년의 감금으로 오대수는 짐승 즉 야수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대수는 '인간다운 삶'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야수'입니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전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바로 그 '산낙지 장면'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일식집에 들어가서도 오대수는 그것을 온전히 즐기지 못합니다. 인간다움을 상실해버렸기 때문에, 그는 산낙지를 생으로 씹어먹다가 목에 걸려 쓰러집니다. 유희를 즐길 수 없게 된 거죠. '인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또다른 해답은 영화의 초반에 제시됩니다. 오대수는 자살하려던 남자의 넥타이를 붙잡고 말합니다. "얘기를 하고 싶다." "뭐?" "얘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넌 도대체 정체가 뭐야... 씨발..." <올드보이>는 바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대수는 자살하려던 남자에게 자신의 사연을 일방적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리고는 자살하려던 남자가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려고 하자 오대수는 듣지 않고 떠나버립니다. 그 결과 자살하려던 남자는 결국 아파트 밑으로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맙니다. 바로 여기에 오대수의 잘못이 있습니다.


오대수는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 나아가 연대하는 방법을 상실해버렸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입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소통이고 연대인데, 오대수는 야수가 되어 소통과 연대의 방법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대수가 이우진의 덫, 근친상간이라는 거짓말에 속아버린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는 딸이 해외로 입양을 갔다는 명백한 증거가 눈 앞에 있는데도 오로지 개미 환각을 공유한다는 모호한 사실 하나만으로 '근친상간'이라는 죄를 믿어버립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이건 사실 보편적인 감각입니다. 박찬욱 감독은 <친절한 금자씨>를 만드신 분답게 대단히 친절한 감독이라 아예 노골적으로 미도 또한 노동자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장면을 넣었어요. '오늘도 무사히'라는 액자 앞에서 기도하는 미도입니다. 노동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장면이죠.


즉 오대수가 미도를 보고 노동자로서의 보편적 감각인 '인간소외'를 깨닫고 '연대'와 '소통'을 했더라면 이우진의 덫에 넘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오대수는 자신의 경험을 특수하게 여겼고 '연대'하지 않았습니다. 남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인 겁니다.


오대수가 조금만 더 미도에게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미도의 가정환경에 대해 '듣고', 사연을 '들었더라면' 이런 파국에 이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오대수는 인간다움을 잃은 야수라, 미도의 이야기에 애초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대수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근친상간의 엔딩에 따르면, 오대수의 죄는 '함부로 말을 한 죄'입니다. 하지만 이건 그 어떤 교훈도 주지 못합니다. '함부로 말하는 것'이 죄라면, 우리는 모든 부조리와 잘못에 침묵한 채 넘어가야만 한다는 건가요?


하지만 이 독해에 따르면 오대수의 잘못은 정반대가 됩니다. 오대수는 '듣지 않았기' 때문에 파멸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오대수의 잘못입니다. 오대수가 단 한 번이라도 '이상함'을 느끼고 타인의 말을 '듣고' 또 '연대'했다면 그는 속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요.



진엔딩을 향해서


우리는 히든 엔딩을 보기 위한 조건들을 충분히 갖추었습니다. 이제 진정한 <올드보이>의 히든 엔딩을 해금하러 이우진의 펜트하우스에 들어갈 시간입니다. 비밀번호는 0604가 아니라 0605입니다.


펜트하우스에서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말합니다. "(박철웅) 손을 잘랐으니까 그 사람이 날 미워할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게 함정일 거라는 생각은 못해봤어요? 그런 머리로... 어떻게 자기 여자를 지켜? 난 미도가 네 살 때부터 자라는 걸 보아왔는데... 당신은 이게 뭐야?"


"박철웅 씨 손은요, 이 븅신아, 그 감금방 있죠? 이사가야 한다고 해서 그 건물 주고 산거란 말이야, 내가!!!!!!!"


이 장면,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단히 이상합니다. 잘 생각해보세요. 그걸 어떻게 압니까? '건물을 주고 손을 샀어' 논리적으로 추리를 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잖아요? 추리물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트릭입니다. 이 '이상한 트릭'이 가리키는 방향은 정해져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이우진이 자본가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대결은 애초에 불공평합니다. 자본가는 신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지요. 신과 인간의 대결은 근본적으로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오대수는 의문을 제기하는 대신, 믿어버립니다. 그래서 이번 글의 제목이 "당신은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했다"인 것입니다. 오대수는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이우진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어버리고 맙니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야수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대수는 개처럼 구르며 피 묻는 얼굴과 손으로 이우진에게 애걸복걸합니다. 이우진의 말을 믿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대수는 이우진에게 빌며 기도합니다. 이 모든 것이 제 책임이라는 것을 이제는 믿겠습니다라고. 여기서 잠시 <잠언>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잠언 6장 17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잠언 6장 18절)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잠언 6장 19절)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오대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잠언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가 가리키는 것은 오대수입니다. 오대수는 무죄한 자입니다.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가 가리키는 것은 이우진이겠지요. 이우진은 거짓된 혀를 가진 교만한 자입니다. 거짓과 세뇌, 그리고 조작을 통해 이우진은 자신이 책임져야 할 모든 것들을 오대수에게 전가해버렸습니다. 이제 이우진의 책임은 오대수의 책임이 되었습니다. 오대수는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개처럼 멍멍 짖고 구두를 햝으며 복종을 약속합니다. 개는 충성의 상징이니까요.


이우진의 심장을 멈추게 만들 수 있는 리모콘은 이우진이 남긴 최후의 기만이자 이우진이 온통 거짓말로 가득한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치입니다. 이우진은 이 리모콘을 누르면 (선천적으로 심장이 약해 기계에 의존하고 있어서) 자신을 죽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리모콘을 손에 넣은 오대수는 리모콘을 누르지만 이우진에게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거짓말이었던 거죠. 이우진은 거짓말쟁이라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하는 장면입니다.



자살


제가 존경하는 분이 또 존경하는 사람이 있는데, 테라야마 슈지라고 합니다. 테라야마 슈지는 글 '자살론'에서 자살이야말로 가장 부르주아적인 행위라고 역설한 적이 있습니다. '사회적 타살'과 '자살'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말이에요.


테라야마 슈지는 언젠가 "먹을 것이 없어 고구마만 먹다가 자기가 뀐 방귀에 질식사를 한 남자는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역으로 사회적 압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본인의 의사로 자살하는 건 극도로 부르주아적인 행위라는 게 테라야마 슈지의 생각이었습니다. 이우진의 자살도 이런 부르주아적 행위로 볼 수 있습니다.


'책임전가'라는 모든 일을 끝마친 이우진은 '신'이자 '부르주아'답게 퇴장합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끝내는 것이죠. 이것은 극도로 부르주아적인 기만입니다. 사실 박찬욱 감독이 구상했던 자살의 방식은 더욱 기묘했습니다. 바로 한계령으로 가서 높은 언덕을 직접 달려 심장에 무리를 줘서 자살하는 것이었습니다. 죽는 방법마저도 고상하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신입니다. 이우진은 이렇게 신으로서 '완성'됩니다.


이우진이 '신'이 되어 승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대수가 이우진에게 충성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우진이 전가한 모든 책임을 스스로 짊어진 채, 혀를 잘랐습니다. 침묵을 약속한 것입니다. 이제 그 누구도 이우진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은 이렇게 완성되었습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였고, (당대 486 세대로 대표되는) 사람들은 거기에 속아 자신의 혀를 자르고 침묵을 약속했습니다. 이렇게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앞에서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민주주의는 시끄러운 것입니다. 사람들이 광장에 나서 목소리를 낼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하지만 자본 앞에 굴복하여 혀를 자른 사람들은 어디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오대수는 기억을 잃었을까?


일이 끝나고, 오대수는 최면술사를 찾아가 기억을 지워달라 부탁합니다. 이 장면은 <올드보이>에서 가장 논쟁이 되는 장면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오대수가 기억을 잃었는가, 남았는가가 아닙니다. 오대수가 그 기억 자체를 지워버리려고 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비밀을 모르는 자는 오대수이고, 비밀을 아는 자는 몬스터입니다. 이것이 박찬욱이 내린 결론입니다. 한국 사회는 침묵의 사회입니다. 알면서 침묵하는 괴물들과 모른 채 침묵하는 오대수들이 사는 나라. 자본주의 한국이 완성되었습니다.


결국 기억을 지우려는 행위의 의미는 '외면'입니다. 한국이 이제 계급 사회가 되어버렸다는 것, 그래서 486 세대를 위시한 박찬욱의 세대는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 이런 사실을 한국 사회는 '외면'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올드보이>라는 제목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진실, 그것은 바로 오대수와 이우진이 한때는 '올드보이' 즉 '동창'이었다는 겁니다. 둘은 사실 같은 높이의 공간을 공유하던 사이였습니다. 둘은 같은 학교(=상록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한 명은 신이 되고 한 명은 짐승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걸까요. 그 근원에는 계급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자본가들도 처음부터 신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한때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높이'가 생겨났고 '격차'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을 같은 출신의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오대수는 소통과 연대를 포기한 야수였기 때문에, 자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가해자는 누구이고 피해자는 누구일까요?


이들 싸움의 피해자가 누구였는지를 생각해봅시다. 이우진의 누이는 거짓에 속아 자살했습니다. 오대수의 아내는 이우진에 의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대수의 딸은 그 때문에 스웨덴으로 해외입양을 가야했습니다. 미도는 오대수와 이우진에 의해 인생이 통째로 조작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대수가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은 남자는 자살했습니다.


이 싸움의 진정한 피해자는 바로 '여성'을 포함한 '약자와 소수자들'입니다. 이들은 단지 약자라는 이유로, 소수자라는 이유로 둘의 싸움에 휘말려 덧없이 목숨을 잃거나 인생에 막대한 피해를 입어야만 했습니다.


이것이 '연대 없는 싸움'의 결과입니다. 소통과 연대가 없으면, 복수는 허망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는 사이에 더 많은 약자와 소수자들은 짓밟히고, 세상을 떠나고 말 것입니다. 싸움은 늘 약자인 소수자들의 피해를 동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올드보이>를 비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을 반영하려 한 결과라지만, 이 영화는 여성을 너무 손쉽게 도구화하고 대상화하고 말았습니다. 박찬욱 감독도 그 사실을 분명히 인지했고요. "현실을 반영해라 했다"는 것은 편하고 나이브한 변명일 뿐이라는 걸요. 그래서 이 영화는 <복수 3부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올드보이>가 자기완결성을 가진 한 편의 완성된 영화가 되어버린다면 영화의 중요한 메시지를 놓쳐버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에서 '현실을 반영하려 했다'는 나이브함 속에 죽거나 도구화된 여성들이, 약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무리하며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는 <복수는 나의 것>과 <올드보이>의 속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체나 도구가 되어 죽어간 약자들이, 나아가 여성들이 '부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절한 금자씨>는 박찬욱 감독의 여성 부활 프로젝트입니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 속 금자씨는 성모 마리아의 패러디로서 대응됩니다.


사실, 박찬욱 감독의 관심사는 늘 사회적 소수자를 향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에 의해 드러나지 못하거나 외면되어 왔습니다. <JSA 공동경비구역>의 주인공을 동성애자로 설정하려 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죠. 지금도 <JSA 공동경비구역>에는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테마가 <올드보이>를 기점으로 '여성'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이런 관점에서 필연적인 과정이었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속 여성은 <친절한 금자씨>로 부활하여, <스토커>를 통해 성장한 뒤, <아가씨>로 완성됩니다.


그래서 더욱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습니다. <친절한 금자씨>부터 박찬욱 감독과 함께 모든 각본을 집필하며 그런 테마와 세계를 키워온 인물인 정서경 작가입니다. 모든 메시지는 실천을 동반해야 하고, 우리는 그런 실천을 집중해서 지켜볼 의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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