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로부터

K선생님 옷자락의 해묵은 담배 냄새를 기억하며

by 권등대

생애 처음으로 가졌던 꿈은 고등학교 진학과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부서지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하면서도 그다지 슬프지 않았다. 애초에 그 꿈을 업으로 삼을 만큼의 열정도 재능도 없음을 일찍이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꿈의 이름은 ‘작가’였다. 하지만 책을 손에서 놓지는 못한 채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대학교 수강 신청처럼 학기마다 방과 후 수업 수강 신청을 해야 했다. 매번 운 좋게 듣고 싶은 수업을 신청하는 데에 성공해왔던 나는 그날따라 운이 따라주지 않았고 한 수업을 한 학기 동안 억지로 듣게 되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K라는 국어 선생님의 수업이었다. 첫 수업 시간, 선생님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조곤조곤하여 수업은 지루했으며 선생님의 뻣뻣한 셔츠에서 풍기는 오래된 담배 냄새가 교실을 채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이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자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이 안쓰러웠는지 선생님은 수업을 10분 정도 일찍 끝내셨다. 아이들은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기절을 택했으나 나는 애매하게 더운 날씨 탓에 쉬이 잠에 들지 못하고 우뚝 깨어 있었다. 그때 K선생님이 불쑥 다가왔다. 두 손을 내 책상 끝에 받치고는 말을 걸어오셨다. 잠이 안 오나. 필요 이상으로 조곤조곤하다고 생각했던 목소리는 다정한 목소리로 변해 있었다. 창을 통해 주황빛 햇살이 들이차던, 애매하게 더웠던 늦여름 늦오후의 한 교실에 선생님과 나만 조용히 깨어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책상 위로 일제히 엎어지는 아이들 가운데서 눈을 맑게 뜨고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은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시선을 멀리 둔 채 무표정하게 수업을 하는 버릇이 있으셨는데 그와 달리 말투는 자상했고 내용은 꼼꼼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아이들이 편히 잘 수 있게 꼭 남겨두시던 마지막 10분이었다. 그 10분 동안에도 나는 맑게 눈을 뜨고 깨어 있었고 선생님은 단 한 번도 그런 나를 지나치지 않고 말을 걸어오셨다. 간혹 나 외에도 점점이 깨어 있는 아이들이 있으면 나와 그러는 것처럼 따뜻하고 시답잖은 담소를 나누시곤 했다. 그 시덥잖음이 좋았다. 그 시간이면 눈을 꼭 맞춰주시는 것도 좋았다. 혼자 문제를 풀다가 막혀서 어버버 거리는 나를 보고 크게 웃으시면서 내 등을 툭툭 치는 것도 좋았다. 이렇게 웃으실 줄도 아시는구나, 싶었다. 언제부턴가 내가 선생님의 수업을 기다리게 된 것은, 그리하여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한창 ‘제인 에어’를 읽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보고 친구들은 무슨 그렇게 두꺼운 책을 읽냐며 놀렸고 야자시간에 ‘제인 에어’를 읽고 있으면 감독 선생님은 시험공부를 하라며 말리셨다. 하지만 K선생님은 내가 책상 위에 올려둔 ‘제인 에어’를 발견하시고는 슬쩍 책을 차르르 펼쳐 보면서 크, 제인 에어, 하면서 작게 감탄하셨다. 사실 선생님이라면 좋아하시지 않을까,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괜히 책상 위에 보란 듯이 올려 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시 몇 편을 복사한 종이를 나누어 주셨다. 그리고는 말씀하셨다. 이 시들은 사실 시험에 나오는 시들은 아니다. 하지만 너희와 함께 읽고 싶어서 들고 왔다.


(…)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프란츠 카프카 中

선생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열심히 시를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은 특히 ‘미친’에 줄을 그으라고 강조하셨다. 성적을 위한 것 외의 모든 것들은 시간 낭비 취급을 당하는 학교에서 선생님은 진정한 시를 가르치겠다는 ‘미친’ 선생이었고 나는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였다. 그날의 수업은 내가 막연히 꿈꿔온 수업이었다. 문학을 좋아해서 국어 과목을 좋아했고 좋아하다 보니 열심히 하게 되어서 매번 높은 점수를 받곤 했었지만 가끔 시어 하나하나를 기계적으로 분석하는 수업에 회의감을 느낀 적이 적지 않았던 나에게는 꿈같은 시간이었다. 그날의 수업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내 생에서 지울 수 없는 시간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토록 싫어하던 담배 절은 냄새마저 K선생님에게서 나니 괜찮았다. 수업이 끝난 교실에 들어온 아이들이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넌더리를 치면 오히려 화가 날 정도였다. 슬슬 여름이 지나가자 셔츠 위에 걸치시던 갈색 재킷에서는 유독 오래된 담배 냄새가 풍겨왔는데 나는 그것마저 좋아졌다.


한 학기는 눈 깜빡할 새 지나갔고 K선생님과의 국어 수업도 끝이 났다. 어느덧 2학년이 된 나는 K선생님을 다시 마주할 기회가 없던 차였다. 어느 날 마지막 순서로 석식 밥을 푸고 있었는데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식판에는 밥과 김치만 찔끔 이었다. 그때였다. K선생님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온 것은. 왜 밥을 그만큼밖에 안 먹노. 그러고는 밥주걱을 직접 손에 쥐시고는 내 식판에 밥을 양껏 덜어주셨다. 밤에도 공부해야 하는데 그렇게 적게 먹으면 안 된다느니 하는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선생님 손에 들려 있던 서류가방은 복도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채였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감사하다고 말하고 교실로 들어온 나는 그날 밥을 싹싹 긁어먹었다. 그날 이후로는 정말 선생님을 마주칠 일이 없었다. 정년퇴직을 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하게 박카스와 쪽지를 들고 교무실을 찾아갔을 때는 이미 선생님의 자리가 비워진 뒤였다. 옆 자리의 다른 선생님이 오늘 회식 자리에서 자신이 대신 전해주겠다고 쪽지를 가져가셨지만 제대로 전해졌던 건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때는 제발 내 쪽지가 잘 전해졌기를 바랐지만 지금은 아니다. 쪽지의 내용을 이렇게 뜯어고치고 싶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머릿속에 선명히 자리를 지켜요. 저에게는 대개 나쁜 경험이 그러해요. 절대 음식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으름장이 지배했던 교실 안, 식판 위에 올라온 싫어하는 반찬을 어쩌지 못한 채 점심시간 내내 끙끙 앓았던 경험과 같이 아주 사소한 나쁜 경험부터 아직까지도 꿈속을 헤집어 놓는 악질적인 나쁜 경험까지 다양한 나쁜 경험들이 제 머릿속에 자리해 있어요. 하지만 개중에는 좋은 경험도 자리해 있지요. 선생님과의 짧았던 수업시간은 개중의 개중에서도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특히 ‘프란츠 카프카’를 배운 그날의 경험이요. 선생님은 제가 한때 꾸었던 꿈의 아름다움을 상기시켜준 사람이고 비록 그 꿈은 놓더라도 책은, 문학은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 준 첫 번째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아이를, 식판에 밥을 적게 덜어 놓은 아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에요. 선생님의 옷자락의 해묵은 담배 냄새는 이제 아득한 향수로 남게 되겠네요. 그래도 담배는 꼭 줄이세요. 건강하고 또 건강하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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