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덕통사고’는 단어가 주는 돌연적인 느낌과는 달리 아주 뭉근하고 따스하게 일어났다. 티셔츠의 가슴팍 부분을 잡고 팔락팔락 흔들면 후덥한 체온이 턱끝으로 올라오던 평범한 어느 여름에 나는 한 예능 프로그램을 자주 흘긋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MSG워너비’라는, 모방의 느낌이 물씬 나서 외려 귀여운 그룹명을 단 사람들이 나와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들 중 한 가수의 목소리가 좀 내 취향이라 언젠가부터 그 프로그램을 꽤나 집중해서 보게 되었는데 또 언젠가부터 그 가수보다 그 가수와 동갑이라는, 그런데 그 가수보다 한참 어려 보이고 키도 한참 작아 소파에 앉으면 발이 동동 떠있곤 하던 옆자리의 다른 가수에게 자꾸 눈이 갔다. 내내 해사하게 웃는 얼굴인 게 신기해서, 그리고 웃음소리가 ‘꺄르륵’이라는 글자 그대로인 것도 신기해서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이 그 가수의 라이브 영상을 나에게 들이밀었다. 이제 유튜브는 내 머릿속까지 꿰뚫는 건가, 약간 무서워하면서 영상을 눌렀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썼다는 그 노래의 제목은 <캥거루>였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의 이름은 원슈타인이었다.
노래의 후반부쯤 되었을까, 침대에 모로 누워 영상을 보던 나의 귀에 갑자기 물기가 들이찼다. 모로 누운 탓에 눈물이 옆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엥, 나 왜 울어. 당황스러웠지만 눈물은 생각보다 쉽게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당황스러웠다. 슬픈 노래를 듣다가 눈물을 한 방울 정도 흘린 적은 있어도 이렇게 펑펑 운 적은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밝고 따뜻한 노래를 들으면서 운 적은 더더욱 없었다. 그리고 기묘했던 것은 우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니, 오히려 눈물의 온도로 인해 내 마음이 훈훈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여름밤과 달리 후덥지근한 느낌 없이 보송한 느낌으로. 말하자면 엄청나게 커다랗고 보드라운 노오란색 담요에 폭 안겨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평소에 스킨십을 내켜하는 편은 아닌데 또 막상 누가 안아주면 좋아라 하는 사람이다. 게다가 당시의 나는 평소와 달리 어딘가에 안기고 싶다는 충동이 끊임이 없었기에 노오란색 담요에 안겨 있는 듯한 그 느낌이 유독 소중했다. 영상이 끝나고도 나는 촉촉해진 귓가를 느끼며 그 노래에 오래 안겨있었다. 이 날 내가 원슈타인의 목소리를 통해 온몸으로 경험한 감정의 이름은 사랑이었다. 참 따스한 덕통사고의 순간이었다.
원슈타인을 보고 들을 때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로마>라는 영화가 떠오른다. <로마>는 감독의 어린 시절을 반영한 자전적 영화로, 자신을 키워낸 여성들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영화 속 남자들이 가볍게 도망치고 남은 자리에서 여성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킨다. 그녀들이 그곳에서 희망을 잡아내는 원동력은 사랑과 평화다. 무술, 총, 자동차 같은 것들로 누군가와 대적하는 일이 아니라 서로의 무게를 받들며 꼭 껴안는 일이다. 영화를 보고 아이들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자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내는 사람으로 자란 감독 본인이 그 증거일 것이다. 그리고 감히, 원슈타인이라는 가수도 그 증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원슈타인이라는 사람의 자라온 환경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그가 여러 곡들과 인터뷰를 통해 반복적으로 해온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할머니와 엄마, 이모들에게서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그녀들에게서 받아와 체화한 사랑이 자신의 음악적 무기라고 말한다. 내가 <캥거루>를 처음 들었을 때, 그리고 이후 그의 다른 곡들을 접할 때에도 자꾸 사랑스러움을 느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는 언제나 사랑을 강조한다. 음악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 역시 사랑이며 디스곡조차 사랑을 바탕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에는 사랑이 답이라는 식의 이야기 결말을 좋아하지 않았던 내가 이제는 그런 결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며 너무나 뻔한 말이지만 뻔하지 않은 사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는 사실을 이 가수를 통해 새삼스레 체감했기 때문이다.
원슈타인의 앨범뿐만 아니라 방송 출연, SNS를 통한 라이브 방송 등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섭렵한 내가 특히나 좋아하는 것은 그의 SNS 라이브 방송을 지켜보는 일이다. 느릿한 말씨로 몇 시간 동안이자 자신의 일상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마음에 평안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한참 불면에 시달렸을 때에도 팬분들이 녹화해 놓은 지난 라이브 영상을 틀어 놓으면 거짓말처럼 잠이 들곤 했다. 그즈음의 나는 아침마다 뭔가에 눌리는 기분에 침대에서 쉽게 일어나지 못하기도 했었는데 그럴 때마다 약을 찾듯 원슈타인의 영상을 찾았다. 그러면 가위눌린 듯했던 몸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고 무사히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깜짝 이벤트로 가면을 쓰고 라이브 방송을 하던 날이었다. 한창 소통을 하던 중에 갑자기 그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알고 보니 우울증 약을 안 먹게 기도해달라는 댓글에 잠시 눈을 감고 기도를 하느라 그런 것이었다. 그날의 기도는 그분을 위한 것이었지만 나도 그 기도를 받은 것만 같았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다. 유성을 보며 빈 소원의 내용은 ‘숏다리 샀는데 두 개 들어 있는 사람 많아지게 해 주세요’이고 자신을 욕하는 악플러에 대한 대답은 ‘세상이 저들을 돌보길’이다. 원슈타인 팬이에요, 라는 말에 ‘저도 님의 팬이에요, 님의 인생의 팬이에요!’라고 말한다. 바람에 나부끼는 바닥의 먼지에도 눈길을 주고 남들은 징그럽다며 죽이거나 피하는 벌레와 함께 라이브 영상을 찍는다. 그런 그를 보는 나는 피가 맑아진다. 그리하여 쓴 짧은 이야기가 있다.
‘생의 허무함을 참지 못하여 밤마다 살인을 저지르는 살인자가 있다. 숨이 끊어질 때의 신음소리, 절정에 이르는 듯한 그 소리 이후에 축 늘어지는 몸, 검붉은 피, 그런 것들을 보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다. 그는 생의 허무함을 자극으로 채우는 저 자신을 혐오한다. 그래서 자신의 손을 자르려 안간힘을 쓰지만 쉽지 않다. 어느 날, 살인이 끝난 후 인기척 때문에 갑작스레 몸을 피한 숲 속에서 그는 비를 맞았다. 비는 빼곡히 늘어선 나무의 잎들을 지나쳐 살인자를 적셨다. 그는 입을 벌려 비를 삼켰다. 난생처음 맛보는 맛이었다. 시원한데 따뜻했고 맑은데 가볍지 않은 맛이었다. 그는 자신의 피가 깨끗해짐을 느꼈다. 이전의 악행들이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성수, 이것은 성수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인자는 한참을 서서 비를 맞았고 비를 맛봤다. 그날 이후 살인자는 비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여름엔 ‘성수’를 자주 맛볼 수 있었지만 가을, 겨울로 접어들자 그렇지 못했다. 그리하여 살인자는 기우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어찌나 열심히 지냈던지 그의 손에서는 어느새 피 냄새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범인을 특정하지 못한 전대미문의 연쇄살인사건이 몇 달째 끊겼다는 뉴스가 들려오는 살인자의 방안은 텅 비어 있다. 비가 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짧은 이야기의 제목은 ‘살인자의 기우제’ 정도였다. 모든 의미를 잃어버리고 어떠한 것으로도 배를 채우지 않으며 잠깐의 자극과 흥분에만 반응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말하자면 퇴폐적인 일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잠깐의 자극과 흥분 뒤에 남는 건 죄책감과 나를 향한 혐오감뿐이었다. 그럴 때 문득 이 가수의 목소리를 들으면, 더러웠던 피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때 묻었던 혀 끝이 다시 선홍빛을 띠는 듯했다. 칭칭 꼬여 있던 속이 기름칠한 듯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자극만 찾던 생활패턴과 틈만 나면 엄습해오던 허무함은 조금씩 종적을 감추었다. 사랑이 살금살금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지금의 나는 삼시세끼 밥을 볼 빵빵하게 챙겨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덕질이 나를 밥 먹여준 것이다. 덕질이 나를 살게 만든 것이다. 혹자는 이런 말들이 너무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를 열렬하게 덕질해 본 사람, 혹은 누군가로 인해 지하에서 지상으로 끌어올려진 경험이 있는 사람은 나의 이 거창한 덕질의 문장들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이다. 뭐든 받는 것에 익숙했던 내가 주는 일의 기쁨을 체감한 데에는, 여전히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자아의식에도 불구하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데에는 덕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리하여 이 글은 나의 영원한 덕질의 대상일 그에게 바친다. 나를 살린 나의 따뜻한 성수(聖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