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는 사랑 노래

앨범 ‘THIRSTY’(검정치마,2019)

by 권등대

검정치마는 자신의 앨범 《THIRSTY》를 이렇게 소개한다. ‘뻔뻔하고 그로테스크한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그럼에도 나에겐 하나같이 다 어쩔 수 없는 사랑 노래처럼 들린다.’ 앨범을 듣고 이 소개글을 읽었을 때 그저 사랑 노래라고 하기에는 너무 뻔뻔할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앨범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 앨범을 여러 번 반복해서 듣고 난 뒤인 지금은 나 역시 이 앨범이 ‘어쩔 수 없는 사랑 노래’로 들린다. 그 이유를 아주 개인적인 의견으로 기록해보려 한다.

이 앨범은 ‘그녀’의 입장에서 쓰인 타이틀곡 <섬(Queen of Diamonds)>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그’의 입장에서 쓰인 마지막 곡 <피와 갈증(King of Hurts)>으로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섬>은 (위태롭긴 하지만) 연애 중인 둘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 곡이고 <피와 갈증>은 이별곡이다. 그러므로 이 앨범은 한 연인이 헤어지기까지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러므로 <섬>과 <피와 갈증> 사이의 곡들은 그들이 어쩌다가 이별에 이르렀는지를 설명하는 전개 부분에 해당한다. 먼저 이야기의 시작점인 <섬>을 들여다봐야 한다.


-지금 무슨 생각해? / 티비가 시끄럽게 울려도 니 말이 짧아지면 비좁은 마음속엔 걱정만 커져 (…)

-너 지금 뭐라고 했어? / 샤워기 물소리만 대답해 / 젖은 내 양말보다 질척한 마음속엔 2등이 떠올라​


언젠가부터 그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이 짧아지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간결하기만 하고 질문과 대답 사이의 커다란 공백을 채우는 건 시끄러운 티비 소리뿐이다. 그녀의 비좁은 마음에는 시끄러운 걱정만 들이찬다. 그러나 반대로 그녀는 그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그가 샤워 중인 욕실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에도 ‘너 지금 뭐라고 했어?’라고 물을 정도로. 그러나 들려오는 건 샤워기 물소리뿐이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무슨 말이라도 했을까 봐, 물소리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잘 안 들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그녀는 급기야 샤워실에까지 들어가 본다. 그러나 애꿎은 양말만 젖었을 뿐이다. 젖은 그녀의 양말보다 더 질척해지고 초라해진 건 그녀의 마음일 것이다. ‘2등, 난 언제나 2등이다.’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을 것이다. 그의 일 순위는 언제나 그고 그에게 있어 그녀는 언제나 이 순위라는 것을 새삼스럽고 절망스럽게 그녀는 절감했을 것이다.​


너 사는 섬엔 아직 썰물이 없어 / 결국 떠내려온 것들은 모두 니 짐이야 / 이어질 땅이 보이지 않네 (…)

너 살던 섬은 이제 가라앉았고 / 내가 두고 온 것들은 다 저기 저 아래에 / 녹만 슬다 없어지겠지 (…)

​​You are my baby, but you ain't no kid / speak up now don't shut your lid / monolids blinking at me, I hear nothing, just tell me something, anything


그녀는 그가 원래 섬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도 그녀는 그와 이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가끔 섬과 육지 사이를 이어주는 땅이 있지 않은가. 그런 게 그들 사이에 있을 줄 알았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대도 가끔 썰물 때면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은 그라는 섬에는 썰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만조고 밀물이다. 그리하여 그라는 섬과 그녀라는 육지가 이어질 땅 따윈 보이지 않고 섬의 부산물들만 둥둥 떠내려올 뿐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결국 그라는 섬은 가라앉는다. 그의 입은 더 닫혔고 그나마 간간이 비추던 얼굴마저 감추었다. 그녀가 그를 위해 차곡차곡 쌓아놓은 마음들은 다 저 바닷속 아래에서 녹만 슬다 없어질 것만 같다. 그리하여 그녀가 서러움을 토로한다. 너는 나만의 ‘baby’(애칭으로써)가 맞지만 네가 진짜 애는 아니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는 아무것도 모른 척 그녀를 향해 눈을 깜빡이고만 있다. 그냥 아무 말이라도 해봐, 제발 아무 말이라도. 그녀는 애원하기에 이른다. 곡의 후반부에 들리는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는 그녀의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 정분 났다고는 생각지도 마 / 내가 원하는 건 오분 길게는 십오 분 (…)

너의 좁은 침대에 내 몸을 다시 포갠 것을 후회하긴 너무 늦었고 (…)

사랑 빼고 다 해줄게 더 지껄여봐 / 내 여자는 멀리 있고 넌 그냥 그렇고 / 눈물이라도 흘려봐 좀 인간이 돼봐

- <광견일기>


사랑의 세례를 세 번 입고 더러워질 대로 더러운 영혼

내 여자는 어딘가에서 울고

넌 내가 좋아하는 천박한 계집아이 (…)

차라리 날 욕하고 미워했으면 좋겠네

그럼 나 가진 상처 다 옮겨 줄 수도 있는데

- <빨간 나를>


한편 그는 그녀를 두고 일탈을 즐긴다. 이름 모를 ‘너’의 좁은 침대에 여러 번 몸을 포갠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말한다. 우리는 정분난 게 아니라고, ‘너’와는 사랑의 감정을 나누지 않는다고, 그가 원하는 건 ‘오분 길게는 십오 분’의 어떤 행위뿐이라고. 반복되는 이 구절은 어쩐지 자기 최면처럼 느껴진다. 정분이 나면 안 된다고, 사랑의 감정을 나눠서는 안 된다고 반복하고 있는 것만 같다. ‘눈물이라도 흘려 봐 좀 인간이 돼 봐’라는 말은 뻔뻔한 그 자신에게 던지는 마지막 일갈일 것이다. 그러나 <빨간 나를>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자기 최면을 벗어났다. 사랑 빼고 다 해주겠다던 ‘너’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껴버린 것이다. ‘너’와 여러 번 사랑을 나누어 버린 그는 자신의 영혼이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졌음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뻔뻔하다. 천박한 것은 저 자신이면서 괜히 ‘너’를 ‘천박한 계집아이’라고 낮잡아 부르며 탓한다.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그녀가 자신을 차라리 욕하고 미워하길 바란다. 그러면 자신도 같이 화를 낼 수 있으니까. 네가 나를 외롭게 만들어서 내가 이런 짓까지 한 거 아니야, 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쏟아부을 수 있으니까. 그는 지독히도 뻔뻔하다.


날 쓰다듬는 그 손길이 이젠 너무 덥고 싫은 걸 (…)

사랑했던 사람아 내 때 탄 인연아, 철 지난 신상으로도 넌 입을 수 없어

설움만 알던 여자야 내 흉한 과거야, 넌 목이 졸리면서도 날 불러댔었지

- <Put me on drugs>


연인과의 권태를 이야기하는 이 곡의 대상은 ‘그녀’일까 ‘너’일까. ‘그녀’라고 지정하면 유독 잔인하게 느껴진다. 그가 그녀를 ‘설움만 알던 여자’라 칭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섬>에서 알 수 있듯 그녀는 그에게 깊은 서운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는데, 그리고 그것은 그의 무심함 때문이었는데, 그는 그런 그녀의 설움을 알아주기는커녕 그녀는 맨날 저에게 우울한 모습만 보여주는 사람이라며 툴툴대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대가 가고 싶은 섬, 나는 못 가요

알다시피 내 지은 죄가 오늘도 무겁네요

우리가 알던 그 장소는 무덤이 되었겠죠

- <하와이 검은 모래>


나를 따라다니던 그늘이 짙던 날

잠든 너를 보며 나는 밤새 울었어

이제 우리 다시 나란히 누울 순 없겠지

나를 아직 사랑한다 믿어도 되는지 확인해야 하는데 내 입이 떼지지 않네

- <그늘은 그림자로>


<Put me on drugs>에서 권태의 대상을 ‘너’라고 설정하면 <하와이 검은 모래>와 <그늘은 그림자로>에 나타난, 그녀에 대한 그의 죄책감과 후회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순간 타올랐던 ‘너’와의 관계가 권태를 맞고 거의 끝났을 때야 비로소 아니, 그제야 그는 그녀의 소중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죄가 너무도 무거워서 그녀와 함께 약속의 장소로 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다시는 그녀의 곁에 나란히 누울 수 없음을 깨닫는다. 추억의 장소는 무덤이 되어버렸음을 깨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그녀가 아직 저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되는지 확인하고 싶어 하는 뻔뻔함이 남아있다. 그러나 잠든 그녀의 고단한 얼굴을 보고는 차마 입이 떼어지지 않았으리라. 그녀의 고단함은 다 자신으로 인한 것이므로. 그래서 그는 그녀를 보며 밤새 우는 일 밖엔 하지 못한다. 깨어난 그녀는 그에게 이별을 고했으리라. 그리하여 마지막 곡 <피와 갈증>이 시작된다.


내 불을 켜줘 마마 꺼진 적 없지만

날 미워하지 말아 난 어린애잖아

그대여 손길만 닿아도 난 붉어지잖아 (…)

늦은 밤 틑어진 꽃잎을 주워와도 난 그대가 남겨둔 온기에 또 무너지겠지


그의 방의 불이 꺼진 적은 없다. 그는 언제나 그가 우선이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그가 스스로 그의 불을 꺼뜨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지금 아무래도 너무 힘들다. 그의 방 불은 여전히 켜져 있지만 한참 부족하다. 그래서 떠난 그녀에게 투정을 부려본다. 니가 와서 내 방 불을 더 더 밝혀달라고. 니가 와야만 내 방은 눈이 시리도록 밝아질 수 있다고. 너는 이런 나를 미워할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너의 어린애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날 미워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그는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올 생각을 않는 것 같다. 마음이 헛헛해진 그는 그녀 아닌 다른 아름다움을 찾아보려 늦은 밤 길을 나선다. 아름다운 꽃잎을 한 아름 주워서 방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토록 아름다운 꽃잎도 그녀가 내 방안에 남겨 놓은 온기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다. 그걸 체감한 그는 무너지고 만다. ​


나를 기다릴 줄 알았던 사람은 너 하나였는데 이제 나 혼자 남았네

술이 가득한 눈으로 날 미워한다 말했었지​ (…)

니가 없으면 난 작은 공기도 못 움직여요 한 줌의 빛도 난 못 가져가요 난 애가 아닌데

니가 잠들면 어둠이 이불 끝에 올라와요

저린 내 팔베개를 가져가요 이건 내가 아니에요


첫 두 줄은 《TEAM BABY》 앨범의 <Love is all> 가사를 비튼 버전이다. ‘우리 둘만 남았네’는 ‘이제 나 혼자 남았네’로, ‘술이 가득한 눈으로 날 사랑한다 말했었지’는 ‘-날 미워한다 말했었지’로. 그는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이 한 사람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한 사람마저도 그를 떠났다. 술이 가득한 눈으로 이젠 그를 미워한다고 차갑게 정정하고. 그는 자신이 어린애라며 투정을 부리면서도 사실 그녀의 말대로 잘 알고 있다. 자신이 진짜 애가 아니라는 걸. 그러나 그는 그녀가 없으면 혼자서 작은 공기도 못 움직여서 숨을 못 쉰다. 눈꺼풀을 들지 못해서 한 줌의 빛도 못 가져간다. 밤이면 어둠이 그의 이불 끝에 올라와 그를 누른다. 이럴 때면 그녀의 침대 위로 올라가 그녀에게 팔베개를 내어주고 싶다. 그러나 그는 이제 그녀에게 팔베개를 해줄 수 없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저린 팔이라도 들고 가라고 말한다. 어차피 지금의 그는 도저히 자기 자신이 아닌 상태라고 말할 정도로 망가져 있으니 팔 한 짝 없다고 달라질 건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이 없다. 한때 그녀의 말에 그가 대답이 없었던 것처럼. <피와 갈증>은 《THIRSTY》 앨범의 수록곡 중 가장 길고 느리다. 그는 길고 느리게 후회의 아픔을 겪고 있다. 이 곡의 부제대로 그는 ‘고통의 왕’이 되었다.


이 연애를 망친 건 결정적으로 그의 탓이므로 ‘고통의 왕’이 된 그의 결말은 쌤통이어야 한다. 그런데 마지막 곡까지 듣고 나면 왜인지 마음 한편이 저릿하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섬> 이후로는 자세히 들을 수 없는 그녀의 아픔은 어느 정도였을지 헤아려보게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이 앨범이 보편적이고 실패적인 사랑의 노래로써 와닿기 때문이다. 《THIRSTY》 앨범 속 연인은 주체할 수 없이 사랑에 빠진 후(<Lester Burnham>), 소통의 문제를 겪고 (<섬>), 권태를 느끼며 (<Put me on drugs>),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멀어진 후 (<광견 일기>, <빨간 나를>) 멀어짐에 후회를 느끼지만 (<하와이 검은 모래>, <그늘은 그림자로>), 결국은 이별에 이른다(<피와 갈증>). 이는 연인들의 보편적인 사랑과 이별 서사다. 물론 ‘그’의 바람까지 보편적인 것으로 취급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의 바람이 둘을 멀어짐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청자는 자신의 지난 연애를 되돌아보면서 그때 ‘우리‘를 멀어지게 한 것은 무엇이었는지를 떠올릴 수 있다. 그리하여 ‘그’의 ‘그로테스크한 바람 행위’에 자신 혹은 상대방의 ‘그로테스크했던 연애 망치기 행위’를 새로이 대입해 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보편적이고 실패적인 사랑의 노래가 특별하고 아프게 느껴지는 것은 검정치마의 가사들이 모든 사랑과 이별은 각자에게 특별하고 아프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들은 ‘후회’라고 짧게 요약할 그 감정을 검정치마는 ‘내 심장은 구긴 종이 같아요 / 주름 하나하나 모두 후회예요’(<상수역>)라고 말하는 가수이므로. 그리하여 《THIRTSY》는, 검정치마의 소개글 대로, ‘어쩔 수 없는 사랑 노래’들이자 실패한 사랑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슴 저리게 들을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사랑-이별 노래들이다. ‘사랑이 틀렸을 때엔 다 틀린 거야 / 틀린 게 많았을 때도 난 다 사랑이었어’(<Put me on drugs>)라는 노랫말처럼 다 틀려버린 사랑의 모습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사랑인 것들의 연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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