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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등대 May 09. 2023

우울에 의한, 우울에 대한 영화

라스 폰 트리에, 멜랑콜리아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멜랑콜리아〉는 단순히 우울한 영화라기보다는 우울에 ‘의한‘, 우울에 ‘대한’ 영화다. 〈멜랑콜리아〉는 감독 라스 폰 트리에가 우울증을 겪고 있을 때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우울에 의해 만들어졌고 우울에 대해 적확하게 이야기한다.


너무 크고 긴 리무진이 좁은 시골길을 통과하느라 애쓰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 곧 신혼이 될 남녀는 마냥 행복하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결혼식장-이자 언니 클레어 부부의 저택-에서도 당연히 마냥 행복하다. 그러나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저스틴의 표정은 굳어가고 저스틴은 자꾸만 결혼식장을 벗어나며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사건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사실 저스틴은 심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 큰 몸집을 좁은 시골길에 애써 욱여넣던 리무진처럼 애써 유지하고 있는 밝은 미소 아래 욱여넣고 있던 검은 감정들이 미소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그렇다. 저스틴은 자신의 결혼식에서조차 행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저스틴의 형부 존은 이 결혼식에 매우 많은 돈이 들었고 그 돈을 상환할 수 있는 것은 저스틴의 행복이라고 말한다. ‘무조건 행복할 것’. 이것이 저스틴과의 거래의 조건이다. 다른 이였다면 이 조건이 감동스러웠겠지만 저스틴에게는 너무 가혹한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저스틴이 말한 바 있다. 잿빛의 줄들이 자신의 발을 묶고 있다고. 그 줄들은 너무도 무겁다고. 그래서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든 저스틴에게 식장 속 사람들은 자꾸 행복을 강요한다. 사람들은 우울한 사람이 우울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밝은 것 좀 보라고 말한다. 우울해하고 있으면 우울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지금 불행한 사람에게 행복을 들이미는 것은 지금 행복한 사람에게 불쑥 불행을 들이미는 것과 같다. 당황스럽고 무력해진다. 식장 속 사람들은 다른 날도 아니고 본인 결혼식이니 저스틴은 당연히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저스틴은 당연히 행복해야 할 시공간 속에서도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인 것을 모른 채.


또한 지금 힘든 사람에게는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하등 쓸 모 없다. 마이클이 노후를 함께 보낼 사과 농장을 샀다며 저스틴에게 사진을 보여줄 때에도 저스틴이 진심으로 기뻐하지 못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과 농장에서 나는 사과가 달콤하다는 사실은 지금 미트 로프에서 담뱃재 맛 밖에 느끼지 못하는 저스틴에겐 너무 먼 얘기다. 그러나 마이클은 나중에 흔들 그네도 달까, 라며 계속해서 미래를 이야기한다. 저스틴에게 체감되는 것은 현재뿐이다. 현재의 고통뿐이다. 생살이 찢어질 때 그 아픔과 그 아픔이 일어나는 현재의 순간 말고 무엇이 체감될 수 있겠는가. 저스틴에게는 사과 농장이 고맙지만 와닿지 않는다. 그리하여 저도 모르게 사과 농장 사진을 소파에 놓고 간 것이다.


클레어는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지구와 충동할까 봐 불안에 떤다. 클레어는 종말을, 즉 죽음을 두려워한다. 반면 저스틴은 눈에 띄게 평온하다. 저스틴이 두려운 건 삶이기 때문이다. 저스틴은 클레어에게 지구의 생명체는 악하기만 하기 때문에 지구의 종말을 애석해하지 않아도 된다고까지 말한다. 멜랑콜리아의 푸른빛 아래 매혹적인 표정으로 자신의 나체를 비추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저스틴은 얼른 종말이 오기를 바라는 것인가? 이 악한 지구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인가?


그러나 저스틴은 종말을 두려워하는 어린 조카 레오를 안으며 눈물을 삼켰다. 종말의 순간에 클레어처럼 울부짖지는 않았지만 레오와 클레어의 손을 잡아주며 눈물을 글썽였다. 저스틴은 종말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종말을 찬양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종말을 거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게 된 자신의 모습을 슬퍼하는 사람이다. 오랜 세월 우울로 너덜너덜해진 끝에 지구의 종말 앞에서도 울부짖지 않는 태도를 갖게 되어 버린 자신의 모습을 슬퍼하는 사람이다. 저스틴은 종말의 순간에 멜랑콜리아에 잠식된 자신을 새삼 발견한 것이다. 멜랑콜리아 행성에게 잡아 먹힌 지구처럼 우울에 잠식된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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