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문이불여일견 백견이불여일행

인연나무의 기고

by 연수

찻잔에 그리움 가득 채우니 인연이 이어지고 드디어 차를 덖을 기회가 왔다. 올 해는 어떻게든 차맛어때 차 만들기 행사에 동참하려 마음먹는다. 차맛어때는 그리움을 오래 저축하듯 인연을 담아온 다음카페 茶동호회다. 해마다 제다행사를 통해 서로의 정을 살피며 그리움을 맺고 푼다. 참여하고픈 마음이야 매년 피고 졌지만 참여하리라 마음먹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14년의 기다림이다.

휴대용 간편 2인용 다관 셋트 (2015년 작)


이번 2016 제다행사는 화개면 부춘리 '茶공간 한밭제다'에서 연다. 집결 장소인 하동으로 출발하기 전 아이와 함께 햇 녹차를 한 잔 한다.


녹차는 발효차와 달리 적당한 기다림을 요한다. 여기서의 적당함이란 개개인의 기호가 작용하겠지만 보편적으로 다수가 마셔보고 좋은 맛이 우러나오는 때라고 보면 되겠다. 차를 우리는 다관에 녹차 2~3g을 넣고 100도로 끓인 물을 다시 70도 내외로 식히고 그 물을 찻잎이 들어 있는 다관에 부어 첫회, 두 번째, 세 번째 뒤로 갈수록 시간의 간격을 늘이며 차 맛을 우려내는 것이다. 물론 다도에는 차의 종류에 따른 행다법이 있기도 하다. 이 행다법은 차를 우려내고 마시는 예절과 함께 차를 잘 우려내는 목적일 것이다. 다도회에서 행다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 그때 행다에서 남방 불교 수행법 위빠사나의 관하는 법과 일맥상통한 것으로 읽었다. 차를 우리는 동안 나의 행위 전체를 관하는 것이다.


차 우리는 시간이 짧아도 길어도 녹차의 신묘한 맛을 우려내기 쉽지 않다. 자신의 삶을 관하며 적당한 때를 맞추어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일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차를 접하고 마시기 시작한 지 이십 년이 넘었으나 차를 만드는 일은 처음이다. 놀라워하는 분도 계셨으나 인연이 그러했다고 답을 미뤘다.


차를 덖을 때 어떤 회원이 차를 못 덖는다고 타박을 줘서


"당신은 왜 (차는 안 덖고) 마음만 자꾸 덖고 있냐"고 농담을 던졌다. 그 타박도 마음의 친밀함에서 오는 것이라 안다. 그래서 또 반갑고 고맙다. 차를 만드는데 참여하는 것이 무어 그리 어려워 십여 년을 넘게 기다렸단 말인가. ‘마음만 덖고 있냐’는 농담은 어찌 보면 매사 무엇인가 결정하고 선택함이 진중하다 못해 머뭇거림이 잦은 나에게 던진 질문과도 같다. 때를 기다리며 마음만 덖었다.

진성요 도원 신한규 덩쿨 다관 (2014년 작)



차 만들기 체험은 과연 상상 이상으로 경이로웠다.


한밭제다의 차밭은 누군가의 손길을 받아 단정하게 가꾸어져 있었다. 터널 같은 녹차 밭의 고랑 사이로 첫 발을 내딛는 발걸음에 설렘과 기대가 실려 사뭇 진지하다. 뾰족뾰족 새 순을 밀어 올리는 풋풋한 찻잎을 따는 행위가 어쩐지 미안하고 애잔한 느낌마저 든다. 찻잎을 딴 줄기에서 차향기가 손끝으로 스며 붉은 혈관을 타고 심장을 거쳐 찻잎의 연두 향기가 코끝에 맺혔다. 차를 따는 일을 생계로 삼은 이들은 특별히 곡우 전후에 집중되는 노동으로 이마와 코끝에 땀방울이 맺히리라. 그러고 보니 나는 차와 함께 그들의 집약된 노동과 하늘과 땅이 보내온 선물을 한 잔 두 잔 마신 축복된 사람이었다.


고온의 가마솥에서 차를 덖는 행위는 깊이 체험하지 못했다. 첫 시작과 마직막의 손놀림이 달라야 하는 것이라고 어디선가 들었다. 마지막 수분을 증발시키는 단계에서 조금 덖어 보았다. 천천히 찻잎을 돌려가며 데쳐지듯이 덖기 시작했다. 뜨거운 가마솥에서 들어간 찻잎이 아우성을 질러대는 환청을 듣는다. 차츰 찻잎이 불의 기운에 순응하고 받아들여 차분해진다.


뜨거운 불기운과 사람의 인위적인 압력으로 비비는 과정에서 찻잎은 상처를 입는다. 이때의 상처란 사람이 가져다 붙인 슬픈 말에 불과하다. 차가 차의 본성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 억지를 부려본다. 차 덖기의 후반부로 갈수록 차 만드는 체험장이 차향으로 가득 찼다. 찻잎을 양손에 담고 자주 킁킁거리며 향을 맡는다. 오감을 통해 전해오는 찻잎의 변화는 사랑스러웠다. 풋풋하고 싱그러운 찻잎이 덖음과 유념을 거치며 쫀득 쪽득한 사랑의 밀당을 속삭인다. 진정한 사랑(본성)에 이르는 길을 찾아내듯 드디어 그들만의 맛을 내기 시작하고 향기를 품어낸다. 드디어 차가 자기만의 고유한 향과 맛을 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생각한다. 각자 고유의 본성을 찾아 연을 맺고 사랑도 익히고 수행도 해야 하는 것이리라.


가마솥에서 익은 찻잎을 비비는 유념 과정이다. 꼬들꼬들한 찻잎을 손바닥에 감싸듯이 쥐고 손으로 빨래하듯이 한쪽 방향으로 돌리며 적당한 압력을 가하며 비빈다. 이때 덜 비비면 차맛이 덜 나고 너무 많이 비비면 찻잎이 으스러진다. 다시 덖을 때 차 찌꺼기가 많이 발생한다. 찻잎의 손실이 많다. 비비는 행위가 끝나면 서로 엉켜 붙은 찻잎을 털어 낸다. 엉겨 붙은 찻잎을 제대로 털어내지 않으면 다음에 덖을 때 수분이 증발한 뒤 잘 분리되지 않아 찻잎이 부서지기 쉽다. 털면서 수분도 증발시키는 것이다. 돌돌 말린 찻잎이 툭툭 떨어질 정도가 되도록 털어 준다. 유념을 마친 찻잎을 건조기에 말렸다. 수분을 증발시키는 작업으로 적당한 온도에서 말려야 공기 중에 향을 빼앗기지 않는다고 한다.

진성요 도원 신한규 발효차 다관 셋트(2012년 작)


마지막 맛내기 과정은 덖을 때의 가마솥 온도보다 낮은 온도에서 수분을 완전히 증발시키는 작업이다. 이때 차의 맛이 결정 난다고 하는 이도 있다. 가마솥을 손으로 만졌을 때 뜨겁다는 느낌이 드는 은은한 불에서 열이 고루 전달 되도록 찻잎을 돌린다. 온도가 너무 높거나 낮아서 일정하지 않으면 맛이 제대로 나지 않으니 온 정신을 집중시킨다. 5조였던 법명스님이 정성 들여 혼신을 다해 홀로 집중해서 덖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을까? 차맛 품평에서 5조가 1등을 차지했다.


차가 완성되면 찻잎에서 뽀얀 분이 나오며 부풀었던 찻잎이 차분해진다는데 그것을 보지 못했다. 다음 기회에는 좀 더 유심히 보아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마지막 맛내기의 과정을 거치면 드디어 차가 완성된다. 열기를 머금은 찻잎을 충분히 식힌 다음 밀봉 포장을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차가 불냄새를 머금고 있어 차의 맛이 떨어진다고 한다.


차를 직접 만들어 보기 전에는 그저 어떻게 하면 차의 떫은맛이 덜나고 맛나게 우려낼까에 관심이 대체로 집중되었다. 직접 차를 따고 덖고 비벼서 만들어 보니 차를 마실 때마다 재배되어 만들어지는 전 과정이 함께 연상된다. 차를 마시며 한 잔의 차를 대하는 마음이 예전과 사뭇 다르다. 직거래하는 농가나 텃밭에서 직접 길러 먹는 채소에서 느끼는 그 맛이랑 멋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맛을 지나치게 분별하며 좋고 나쁨을 따지던 마음을 반성하고 그 맛의 떫고 달고를 떠나 차를 마실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마음에 찰싹 달라붙어 그 마음에 끌려 다니다가 조금 더 멀리서 스스로를 바라보며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기뻐하고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것과 같다.


코끝에 맺혔던 싱그럽고 풋풋한 연두빛 향기를 붉은 심장에 듬뿍 담았다. 연두빛 녹차의 새순과 같은 첫마음과 영원히 식지 않을 붉은 사랑을 이웃과 나누는 일이 숙제로 남는다.


그리워하던 녹차를 조금 더 가까이 만나기 시작해 기쁨이 되었다. 반가운 인연과 함께하니 즐거움 또한 배가 되었다.

발효차를 주로 마시다가 녹차를 마시니 우려내는 시간의 틈이 늘어난다.

추억의 다관


그이가 다관에서 녹차가 우러나오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비어있는 숙우나 차따르개를 자꾸 들여다본다. 찻자리에 기다림과 여유로움이 깃든다. ▷ 월간 차의 세계 7월호(차맛어때 제다 체험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