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수돗가에서 땀 절은 작업복을 씻다가 화들짝 놀랐다. 오른쪽 가운데 손톱에서 예리하고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져서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손톱이 끊겨나가 밑살이 살짝 드러나 있다.
발그레한 손톱을 눌러보니 비닐같이 얇아져 말랑말랑해져 있다. 마치 방금 태어난 갑각류의 껍질같다.
그런 손톱 끝이 거친 시멘트 바닥에 긁혔으니 놀랄 수밖에.
비누거품 가득한 왼손으로 아린 오른손가락들을 꼬옥 감싸쥔다.
뭐랄까, 빨판에 강하게 흡착되는 느낌이랄까. 공기층 하나 없는 밀착감이 어쩐지 낯익다.
보호받는 느낌?
안심되는 느낌?
적확치가 않다.
아린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충만감에 젖어서 그 근원을 생각해 본다.
주방 한켠에 나란히 앉은 술항아리 때문일까?
어젯밤 오래오래 술덧을 치대며 느낀 혼일감을 소환해 본다. 그럴 수도 있지만 그 뿐만은 아닐 테다.
아버지의 고단한 노동을 달래주던 막걸리를 내가 빚고 있다는 만족감일까?
그 이유도 있을 것이다. 느즈막에 우리의 술을 빚게 된 것은 내 깊은 영혼 속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 테니.
잠시 눈 감은 동안 의식이 먼 과거의 어느 때를 향해 달려간다.
그랬다. 아린 손가락을 감싸쥐고 느끼는 이 안심되는 마음의 근원은 막걸리가 맞았다. 그런데 그 근원에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입술을 적신 후 혀를 휘감는 막걸리의 그 보드라운 감촉,
고추장 묻은 딸의 입술을 닦아주던 막걸리 묻은 아버지의 손바닥 그 거친 감촉.
부드러운 것과 거친 것이 계산속없이 버무려져 감싸쥔 손가락에서 고스란히 소환되었다.
아버지도 그랬을까?
어린 딸이 따라주던 막걸리를 마실 때 혀 끝에서 느껴지던 부드러운 감촉과 흙속에 묻혀 산 당신의 거칠어져가는 손톱이 속도 없이 버무려질 때 나처럼 이리 아렸을까.
열 살 이나 되었을 성싶다. 그날도 아버지는 아침을 먹은 후 삽을 어깨에 걸쳐 매고 논으로 나가셨다.
해가 중천을 향해 가며 열기를 뿜을 때, 나는 부엌 찬장을 뒤져 찌그러진 주전자를 꺼냈다. 그리곤 작은 접시에 생멸치 한 줌이랑 고추장 한 덩어리를 놓아 주전자에 얹었다.
“아지매예! 막걸리 한 되만 주이소.”
그때는 마을 구멍가게에서 막걸리를 팔았는데 돈이 있을 리 없는 어린 것은 곧잘 가게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외상으로 막걸리를 사서 논으로 가곤 했더랬다.
외상장부에 차곡차곡 쌓이는 막걸리값은 가을추수가 끝나고 쌀수매를 하면 한꺼번에 변상하곤 했는데, 아버지는 그것이 당연한 듯 나의 외상구매를 무언으로 허락하셨다.
“아부지 중참 가져 가제?”
멸치 접시를 내려놓고 주전자를 내미는 나를 보며 아주머니가 웃었다.
“저 딸래미 안 낳았으모 우짤 뻔 했노.”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다 커다란 막걸리 항아리를 여는 아주머니 등 뒤로 퍼져나던 막걸리 향이 어찌 그리도 달았던지.
“말고예, 오늘은 한 되 주이소.”
주전자의 반을 채운 채 뚜껑을 덮는 아주머리를 향해 말했다. 물을 것도 없이 대답할 것도 없이 늘 반 됫박을 가져가던 나의 느닷없는 소리에 아주머니가 뒤돌아보았다.
“오늘은 한 됩니더.”
아, 그날 나는 기다란 막대 끝에 90도로 달린 나무 됫박에 담겨 올라오다가 주르르 떨어지는 뽀얀 막걸리의 구수한 향에 그만 사고를 치고 말았던 거다.
묵직한 주전자를 들고 떨리는 마음으로 가게를 나오며 빌었다.
가을이 와서 외상값을 갚을 때 아버지가 알지 못하기를.
아니, 당장 논에서 돌아오는 아버지를 발견하고 아주머니가 오늘은 어찌 한 되나 먹었냐며 묻지 말기를.
마을을 벗어나 논까지 가려면 작은 모롱이 두 개를 지나야 했고 경부선이 지나는 아래로 작은 터널 하나를 지나야 했다.
그곳까지 가는 동안 내 가슴은 두방망이를 쳐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전자 주둥이에서 올라오는 달큰한 향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모롱이에 닿자 참지 못하고 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행여나 멸치 접시가 쏟아질새라 손으로 뚜껑을 누른 채 홀짝 한 모금을 들이마셨을 땐 그대로 천국이었다.
한 모금, 두 모금….
들킬세라 주변을 살피며 들이키다 보니 손에 들린 주전자의 무게가 훌쩍 가벼워졌던가.
“아부지! 막걸리 갖고 왔어예.”
마침내 엎드려 삽질을 하는 아버지를 저만치 보았을 때, 내 걸음은 아마도 비틀거렸을 것이다.
“아이고, 우리 딸래미 야무지기도 하지. 우찌 알고 요렇게 아부지 딱 묵을만큼 가져오누.”
아는지 모르는지 저만치 앉은 나를 아버지는 손짓했다.
“오늘은 멸치 안 묵을랍니더.”
아버지는 그래도 오라 손짓했다.
할 수 없이 다가간 내 입에 멸치를 까서 고추장에 찍어 주시던 아버지의 때 낀 손톱도 그렇게 닳아 있었다.
그런 아버지의 손톱은 나보다 더 아렸을 것이다.
옹기 속에서 발효중인 막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