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막걸리

브런치 10주년 기념 작가의 꿈

by 취중진담

아버지와 막걸리


밤사이 비가 왔다 가셨나 보다. 마당 잔디가 촉촉하다.

신었던 슬리퍼를 벗고 맨발로 걸어본다.

한 발짝… 두 발짝.

부드럽게 간질거리는 발바닥의 감촉.

어릴 때 꿈도 이랬었다.

어릴 때부터 애살스러웠던 나는 꿈이 참 많았다.

술독에서 술이 끓듯 이 꿈이 뽀글, 오르면 저 꿈이 또 뽀글, 올라와 머릿속엔 수많은 꿈들이 뽀글뽀글거렸다.

시인이 될까? 농부가 될까? 아니 아니 선생님이 될 거야.

수많은 꿈들은 비눗방울처럼 생겨났다 사라지고 또 생겨났다 사라졌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건 주모(酒母)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었다.

아버지 닮은 내 좋은 사람을 만난 이후였다.

바지런한 그가 지어준 곡식으로, 이슬인 듯 맑은 샘물을 길어 올리고, 자죽자죽 뒤꿈치로 밟아 띄운 누룩을 갈아 넣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롭고 건강한 우리 술을 빚는 주모로 살고 싶었다.

둥싯둥싯 걷어올린 하얀 저고리 소매깃.

앞치마로 동여맨 진주빛 한복치마.

가지런히 덮어쓴 머릿수건이면 어떨까?

밤사이 이불 곁에 술독을 두어, 차르르 차르르 빗소릴 닮은 술 끓는 소리 듣다가 잠이 들면 어떨까?

어제인 듯해도 아득해져 버린 어린 날의 오후가 꿈속으로 올 것 같았다.


“아부지! 막걸리 받아 왔어예!”


아롱다롱 가을볕에 영글어가는 벼논 사잇길을 걸어가면 볏고랑에 엎드린 아버지의 등이 활짝 펴졌다. 평생을 파먹고 살았던 등짝, 그 숭고한 두 뼘.


“오냐, 우리 딸. 아부지 중참 가져왔나베! 조심조심 오래이!”


여뀌꽃 흐드러진 논두렁에 앉아 어린 딸이 따라주는 막걸리 한 잔 걸쭉하게 마시던 아버지.

고추장에 찍은 멸치하나 당신 입이 아닌 어린 딸의 입속으로 밀어 넣어 주시던 아버지.


“그래? 오늘도 선생님한테 칭찬 마이 받응겨?”


조그만 머리통을 쓰다듬는 아버지의 거친 손바닥이 오늘따라 더욱 그립다.

아버지가 그랬듯 두 손바닥을 마주 비벼선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올리곤 발효실로 간다.


발효실이래야 주방 한켠, 조그만 공간이다

봄과 함께 솟아난 향긋한 송순.

수술을 말끔히 제거해서 찌고 말린 진달래.

가을볕 받으며 쫀득해진 곶감.

뱃멀미 견디며 먼 타국에서 예까지 와 준 망고.

각각의 향기를 품어 안은 술독들이 조신하다.


“여보, 이 술독들은 언제 제자리로 갈까?”


마침 들어오는 남편에게 투정을 부려본다.


“곧 갈 수 있을 거야. 당신이 그렇게 정성 들여 만든 술인데 좋은 환경에서 발효시켜야지.”

남편은 아마도 멈춰 있는 토굴작업장엘 다녀오는 길일 것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포클레인 삽이 벅벅 파고들던 곳. 세상에 제일 향기로운 술을 만들겠다는 아내를 위해 만들던 토굴.


“걱정 마, 잘될 거라니깐.”


샤워실로 들어가던 남편이 뒤돌아본다.


"그래야지."


억지로 웃어 보이고 돌아서는 남편의 등에서 아버지의 등이 보인다.


“얘들아, 미안하다. 잠시만 기다려. 토굴이 완성되면 꼭 거기로 옮겨줄게.”


눈길에 손길을 치대어 항아리마다 쓸어주곤 씨앗술을 살핀다.

추석 차례주 만들 술덧이다.

이 씨앗술덧으로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시던 막걸리를 빚을 것이다. 효모가 제일 좋아하는 선선한 온도에서 발효를 시키면 청주가 그리도 말끔할 건데.

유리용기 내벽에 끓어 넘친 흔적이 산금처럼 이어져 있다. 지난밤 힘차게도 끓어올랐던 거다.


오래 비워두었던 남편의 고향집으로 들어온 건, 가진 것을 모두 잃고서였다.

새옹지마라 했던가.

시골집으로 들어왔을 때는 다행히도 오래 잠자고 있던 가슴이 뛰었다. 그토록 그리던 느티나무 숲이 거기 있었던 거다. 거기 내 꿈이 몽글몽글 끓고 있었다.

마을어귀, 우람한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어 지나던 라이더들이 멈추어 땀을 식혀가는 곳.

오래전, 건장한 청년들이 콩을 짓고, 콩을 삶고, 콩을 끓이고, 콩을 디뎌서 메주를 만들던 곳.

그곳이 비어 있었던 거다.

이젠 마을도 늙고 청년들도 늙어 메주를 띄우던 방도 늙어 있었지만 나는 거짓말처럼 젊어질 것만 같았다.

거기 주조장을 짓고 진짜 술을 빚는 내가 보였기 때문이다.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일.

그런데 정말 주조장을 완성할 수 있기는 할까?

주조장 뒤 언덕에다 아담한 발효용 토굴하나 만들 수는 있을까?


“여보, 걱정말 라니까 그런다.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은 일이면 하늘이 도우실 거야.”

술독 앞에 우두커니 선 나를 향해 걸어오는 남편의 얼굴에 아버지의 미소가 어려있다.

예, 아버지. 하늘이 꼭 도우실 거예요. 돕고 말구요. 제 마지막 꿈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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