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장 무녀의 길(2)
발행일 2025.09.29. pm8:00
<전편 노트>
작품 속 첫 번째 등장인물 월녀.
월녀는 이 작품의 주인공 채선의 친모로 서해바다 뻘밭을 기며 자신을 키웠던 아버지에 대한 애증으로 살아가는데, 그 이유는 어머니가 세습무이기 때문.
즉, 세습무인 어머니를 만난 것은 곧 월녀 자신 또한 세습무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
그것이 운명이라면 이왕지사 능력있는 무당이 되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기 때문.
그래도 희망은 있다. 바로 딸 채선이 있었기 때문.
그럼에도 왠지 불안한 건, 채선에게선 무당의 냄새보다 기생의 냄새가 더 묻어나는 목소리며 자태가 있었기 때문.
월녀는 이를 악문다.
알아두기
1. 호롱:옛날의 조명기구
2. 공수:신이 들린 상태에서 신의 말을 그대로 내뱉는 것
3. 사당패:지금으로 치면 전국투어 버스킹하는 무리들
4. 또랑광대:사당패의 한 축
5. 아니리:판소리의 한 표현으로 창을 멈추고 말로 이야기하듯이 전개하는 표현법
제 1장 무녀의 길(2)
채선
“내림굿이요?”
호롱에 부을 기름을 따르던 채선이 월녀를 올려다 보았다.
“그랴. 내림굿.”
“나를 말이어요?”
“와? 좋아죽겄냐?”
가만히 바라본 딸의 낯빛이 지는 해를 받아삼키는 듯 붉게 빛나고 있었다. 갸름한 얼굴선, 오모록한 입술선이 빚어놓은 송편마냥 매끈했다.
저런 상판때기로는….
“엄니!”
“그랴.”
“다시 말해봐요. 나더러 내림굿을 받으라 했어요?”
“그랴아. 이 어미가 장씨 만신을 찾아갈겨. 가서 너 내림굿 할 날짜를 잡아 달라고 할껴.”
아직 단 한번도 어머니를 거역한 적 없었다. 굿을 청한 집의 내력을 캐오라면 캐왔고, 굿판으로 가자면 말없이 무구를 챙겨 따라나서 온갖 잡다한 수발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 말할 때가 왔다. 채선은 입술을 오다물었다.
“엄니!”
“그랴.”
“나는… 나는요….”
“뭐여? 주둥이를 텄으면 놀려야제, 와 그랴 뜸을 들이는 거여?”
채선은 꿀꺽 침을 삼켰다.
“나는요. 나는…무당…안해요.”
“뭐? 뭐시라?”
매섭게 날아오는 월녀의 눈매에 채선은 찔끔했으나 다시 입을 앙다물었다.
“내는 엄니처럼 무당 안 하나구요!”
“너! 너 거그이 무신 소리여. 만신 되는 거이 싫다했능겨, 시방?”
월녀가 팔을 휙 낚아채 올렸지만 채선은지지 않고 엄마의 손을 뿌리쳤다.
“안 해!”
“아니, 이 년이?”
순간, 등짝으로 얼음칼이 날아드는 것 같았다. 채선은 꼼짝않고 월녀의 따까운 손바닥을 고스란히 맞아냈다.
“너, 어미말 잘 들어보래이. 터진 주둥이라고 무당무당 허는디 무당이라고 다 같은 무당이 아니여.”
눈을 홉뜬 채 입술을 앙다문 딸을 향해 험한 소리를 퍼부으려다 월녀는 마음을 바꿔 먹었다.
“대만신이 된다는 거이 아가. 전지전능한 힘을 얻게 된다는 거여. 착한 사람헌티는 복을 주고 나쁜 사람헌티는 벌을 주고, 아픈 사람은 낫게 해주고, 서버븐 사람은 위해주는 전전능한 존재인거여. 부천님 보다도 거룩허고, 예순님보다도 높은 존재란 말여. 그라이 사람들이 우러러보잖냐? 우러러보이 온갖 재물도 생기잖냐 이 말이여.”
월녀의 말은 이어졌다.
“장만신을 봐라. 저 건너 변산땅, 부안땅, 영광땅꺼정 장만신 모르는 사람이 있간디? 액막이에도 부르고, 터잡이에도 부르고, 영혼굿에도 부르고, 부르고 부르고 또 부르니 몸이 열 두 개라도 모자라잖냐. 굿 끝에 잘되믄 모다들 장만시 덕이라고 침이 마르잖냐 이 말이여. 덕 본 사람들이 보내는 재물이 그 너른 집안에 그득그득 쌓이는데 내는 보기만 혀도 눈알이 뱅뱅 돌 지경이더라. 채선아! 울도 그리 살믄 안 되겄냐?”
재물타령을 하곤 있지만 진짜로 자기를 만신 만들고 싶어하는 이유가 다른데 있음을 채선은 알았다. 남들에게 우러러보이는 집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별볼일 없는 세습무당이 아니라 관우나 최영장군 같은 힘쎈 몸주신을 턱 뫼시고 서리같은 공수를 퍼붓는 신묘한 만신을 만들어 아무도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임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래도 싫어요.”
딱 잘라 뱉어내는 소리에 월녀는 심장에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다시 말혀보라. 정이 만신 되각 싫다고 하는겨?”
“예. 무당 싫어요.”
“그라마! 그라마 뭐 헐라고 하냐 넌?”
채선은 침을 껄꾹 삼켰다. 그간 가슴 깊숙이 묻어두었던 말을 할 때가 드디어 온 것이다.
“소리…꾼이요.”
“뭐? 뭐뭐뭐? 소리꾸운?”
낯색이 파랗게 질린 월녀가 채선을 잡아채어 앉혔다.
“지금 니년이 소리 헌다고 했냐? 사당년들이나 허는 그 소리르을?”
다시 주워담을 말이 아니었다. 이왕지사 내친 김에 다시는 만신 만든다는 말을 않겠다 단단히 확답을 받아야 했다.
“응. 난 소리꾼이 되어서 천지를 주유할 거여요.”
순간, 월녀의 손이 채선의 뺨을 후려갈겼다. 채선은 오른쪽 뺨이 예리하게 찢기는 것 같았다. 신칼이 지나가는 섬뜩하고 서늘한 절개의 느낌.
“소리혀서 머헐라고 이년아! 이넘 저넘 바짓가랑이 속이나 핥아주는 사당패가 되아서 워쩌자는 거여. 그거이 떼돈을 벌게 해 주냐. 우러러 보이길 허냐. 어미가 그렇게 알아듣기로 이르면 그러커니 할 것이제. 쓸개 빠진 암캥이마냥 뚫린 주둥이라고 나오는대로 지껄이고 있어 이 년이!”
채선은 월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오싹함에 부르르 진저리가 쳐졌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무당으로 살아가는 건 어머니의 운명이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비록 세습무의 업을 짊어지고 태어났으나 단 한번도 무당으로 살아가리라 생각한 적 없었다. 삶의 희노애락을 창과 아니리에 담아 노래하는 소리꾼이 되고 싶었다.
채선은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이 지겹고 지겨운 곳을 떠날 수 있을까.
방법은 딱 한 가지 뿐이었다. 또랑광대가 오면 그들을 따라가는 것이었다. 지난 겨울에 왔었던 또랑광대 패거리 중에서 젤루 나이먹은 노인이 그랬다. 넌 무당될 팔자 아니라고. 그러면서 자기들이랑 같이 가자고 했다.
채선은 오늘밤 당장 야음을 틈타 집을 떠나기로 했다. 그들을 찾아 떠돌다보면 제대로된 스승을 만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팔 하나가 없는 사람이면 팔을 잘라 줄 것이고, 다리 하나가 없으면 다리 하나 잘라 줄것이며, 눈이 멀었따면 눈알도 빼줄 것이다. 단한가지! 목청만 앗아가지 않는다면, 그것만 요구하지 않는다면 사지육신을 다 떼어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하지만 아버지는?
채선은 그만 눈을 감았다.
-달구가 알을 낳는다고 만날 쌍란만 낳는답디까? 그럴 때도 있고 저럴 때도 있는거지라. 그짝들 심정이야 이해가 가지만서두 우선 이 사람 말부텀 좀 들어보란 말이제요.
어머니에게 굿을 청한 사람들이 몰려와 굿발이 받지 않았다며 난동을 부리기라도 하면, 낮고도 진득한 음성으로 분기를 가라앉히게 하던 아버지.
-무당도 사람 아니어요? 그라이 몸주신이 바로 일러주어도 잘못 들을 때도 있것지라.
그러면서 뻘밭을 기어서 번 돈을 주섬주섬 꺼내 굿비를 되돌려주던 아버지. 채선은 그런 아버지를 두고 떠날 자신이 없었다.
“아버지 일 마칠 때 됐어요.”
채선은 사금파리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는 월녀를 두고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