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무녀의 길(7)
발행일 2025.11.03 pm8:00
<전편노트>
채선을 자기의 꿈을 이룰 대상으로 결정한 월녀는 외동딸 채선을 만신 장씨에게 보낼 결심을 한다.
채선이 만신 장씨의 애동제자로 가는 날 아침, 채선의 목욕물을 데우기 위해 가마솥에 물을 끓이다 마른 장작에 손이 찔리는 상처를 입는 월녀.
앞일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란 예감이지만…
내림굿(2)
굿당으로 가는 길은 가팔랐다.
만신 장씨가 맨 앞장을 섰다. 그 뒤를 채선이 따랐고 이어서 월녀가 따랐다. 나머지 농익은 무당이 둘, 애기무당이 둘, 그리고 무악법사가 둘, 제물을 진 장정 셋이 차례로 뒤를 따랐다.
채선을 가운데 세운 것은 월녀였다. 이렇게 앞과 뒤를 단단히 막고 걸어야 또 도망을 가지 못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월녀는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곤 진저리를 쳤다.
솔가지에 찔려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찢은 치마로 동여매고 윗채로 올라갔을 때 채선은 보이지 않았다. 놀라 뛰어나가 보니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룰 딸이 동구 밖 멀리까지 나가 줄행랑을 놓고 있었던 것이다.
썩을 년.
만약 손가락을 다치지 않았더라면 몸팔고 일품팔아 마련한 내림굿 자리가 파토 나 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앞만 보고 걸어 이것아!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딸을 다짐시키려 월녀의 목소리에 결기가 졌다.
채선은 이제 정말 내림굿을 받고야 마는구나, 절망스러우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 애를 썼다. 도망을 가다 잡혀 왔지만 아직은 기회가 있을 것이라 이를 악물었다. 설사 작두 위에 오르고 정말로 몸주신이 자신을 삼키려 기웃거린하여도 끝내 거부하리라 마음을 다져먹었다.
좁다란 산길을 한나절이나 걸어서야 도착한 굿당 앞에서 채선은 무너져내렸다.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바위절벽, 그아래 깊게 파인 동굴 앞에 서고 보니 도무지 도망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 신묘한 기운에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끝내 몸주신을 받고야 말 것 같은 절망감에 사지가 짓눌렸다.
이것아! 뭐허는겨?
제물 내리던 것을 거들던 월녀가 외고개를 하고 선 채선의 옆구리를 월녀가 찔렀다.
여그만큼 영험한 굿당이 워디 있는 줄 알어? 이곳 빌릴라고 을매나 눈에 불을 켜는지들 알기나 하냐고, 이년아.
모두들 제 역할에 충실히 몸을 움직이는 동안에도 채선은 언제 어느곳에서 기회가 올까 긴장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니 머리 위에 올라가 있어. 뭔 생각을 하고 있는겨.
딸의 속을 읽은 월녀는 자신 있었다. 어제 저녁 채선을 데리고 삼산을 이미 돌았다. 그냥 할머니 뵈러 간다고는 했지만 그게 삼산이었던 거다. 삼산이란 내림굿을 받기 전에 조상들께 미리 고하는 사전 의식을 말한다. 삼산을 돌고나면 어쩔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게 이 판의 생리다.
이윽고 제물을 모두 내린 짐꾼들이 돌아가자 내림굿 준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제단은 바위 아래 움푹한 곳에 차려졌다.
그동안 두 모녀를 유심히 보고 있던 장만신이 시선을 그대로 묶은 채 악사와 무당들에게 손짓을 했다. 장만신의 손 지시를 받은 무악법사들이 챙기던 악기를 두고 동굴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 만신 장씨 자신도 무당 둘을 데리고 사라졌다.
남은 사람은 제물상을 차릴 아낙 둘과 모녀뿐이었다.
장어묵을 앞으로 놔야제 뒤로 빼믄 쓰나 원.
조금이라도 신령님들의 눈밖에 나면 될 일도 안된다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월녀의 눈을 채선을 오래 떼어놓지 않았다.
여그 고창으로 뫼셨으믄 고창에서 젤루 귀헌 것을 앞으로 놔 디리야제.
고창에서 젤루 귀한 음식, 두말할 것 없이 풍천장어다. 장어는 영물이라서 알을 낳으러 민물로 올라오는 다른 고기들과 다르다. 인처낭에서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풍천을 지나 곰소만으로 내려간다. 풍천은 인천강과 곰소만이 만나는 가운데 강이다. 민물에 살다가 갑자기 짠물로 가려니 몸이 적응하기 힘들 것은 당연지사. 풍천에서 머물며 적응기간을 버는 것이다. 하니 풍천장어는 이곳의 명물 중 명물일 수밖에 없다. 하여 월녀는 힘센 장어를 한 솥아 고아 묵을 만들어 온 것이다.
복분자 술도 앞으로 당겨놓고.
시간이 갈수록 제물상의 높이도 높아갔다. 온갖 한과가 쌓이고 과일이 층층으로 쌓이고 떡 시루가 솟았다. 술독이 놓이고 통돼지도 놓였다. 한쪽에는 채선이 쥐고 놀 부치며 방울, 칼과 삼지창이 놓였고, 거리마아 입을 옷이며 쓸 고깔도 놓였다.
채선은 희디흰 무명천을 둘둘 만 작두가 제물상 앞에 놓인 것을 바라보다 아버지를 생각했다. 혹내를 드러내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하나뿐인 딸이 무당되는 것을 원치 않았음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림굿이 있는 날, 새벽같이 뻘밭으로 나가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물상 차리기가 끝난 애기무당들이 마당을 빙 돌려가며 초를 꽂았다.
곧 절벽 위로 달이 떠오르면 장만신이 악사들과 무당들을 데리고 나올 것이다. 굿이 시작될 것이고 그러면 꼼짝없이 작두를 탈 수밖에 없다.
채선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머니 월녀는 이제 좀 마음이 놓이는지 제물상 앞에 서서 열심히 이것저것을 고쳐놓고 있었다.
기회였다.
채선은 발 하나를 살그머니 뒤로 물렸다. 곁에서야 들릴 리 없는 소리건만 소복자락 스치는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느껴졌다.
침을 꼴깍 삼키며 또 한 발을 뒤로 물렸다.
어쩐 일인지 모를 일이었다. 어머니 월녀가 자신에게서 시선을 완전히 떼어놓은 것이 믿기지 않았지만 마지막 기회를 준 어머니가 몹시도 고마웠다.
촉 밝은 어머니다. 채선은 어머니의 칼촉에 걸려들지 않으려 귀신처럼 걸음을 물렸다.
이제 뒷걸음의 속도는 조금씩 빨라졌다. 재물단 앞에 선 어머니가 더 오래 몰아의 지경으로 있어주기를. 있어 주기를.
채선은 보폭을 빠르게 늘렸다. 그때였다.
헛짓거리하고 자빠졌네.
들러친 초 울타리를 막 넘었을 때였다. 월녀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낮은 음성을 뱉어냈다. 채선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헛짓 말고 일루 오니라.
거역할 수 없는 음성이었다. 채선은 꼼짝하지 않았다.
이 에미가 그러키나 일렀는데도 말귀를 못알아처먹냐?
채선은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다시 한 번 뒷걸음으로 물러났다.
떠바든 거이 아무렇게나 헌다고 떠받들어주냐? 장보살님 좀 봐라. 이고을 저고을 보살님 덕 안 본 사람 있더냐? 굿만 하면 돈벼락이 치지. 그러면 경사굿 들어오지. 소상은은 씻김굿 하지. 이승 떠난 시신들 길 닦아주지. 처녀귀신 몽달귀신 저승혼사 시켜주는 것도 장만신이여. 그 뿐이냐? 약방보다 났고 의원보다 나은 사람 아니냐? 너도 그렇게 되라는디 뭐가 불만이라서 내빼려고 지랄이야 지랄이.
한 발을 뒤로 뺀 채 멈추어 있는 채선을 향해 월녀가 다가왔다. 채선은 어머니 월녀의 얼굴에서 귀기를 보았다. 어머니는 정말로 만신으로 살고 싶었구나. 그렇다면 오늘 몸주신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고 어머니이지 않은가. 뭔가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아, 뭐혀? 어여 가!
거친 손아귀가 채선의 앞섶을 휘어잡았다.
월녀의 기운에 끌려 제단 앞을 향해 가면서도 채선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쩔 수 없이 내림굿을 받는다 해도 무당되는 길을 막는 방법은 있다. 무악이 아닌 아닌 소리꾼들이 부르는 진짜노래가 자신에게 있는 것을 채선은 알았다. 심청이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바꾸고 아버지 눈뜨이기를 기도하며 울고가던 길 위에서 부르던 노래. 춘향이 오지 않는 이도령을 기다리며 족을 조인 칼에다 심장을 쏟아내던 노래들이 있다. 저들이 아무리 내 혼을 파내어 신대에 걸어올려도 그 노래를 부르고 있는 한 신은 내 몸에 강림하지 못할 것이다.
타고난 팔자는 못속이는 법이여. 소경 눈을 뜨게 하는 약이 있다해도 팔자에 없으믄 팔아 먹을 수 없단 말이여, 이것아!
월녀의 손이 팥그릇으로 갔나 했는데 붉은 팥알이 채선의 하얀 갑사치마저고리에 후드득 떨어져내렸다.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