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소릿고>#16

-제2장 광대의 길(5)

by 취중진담

발행일:2025. 12. 22. pm8:00


<전편노트>

삶을 마감하려 검당포 바다로 몸을 던진 재효는 미리 몸을 던져 생명이 경각에 달린 채선을 발견하고 또 다른 삶의 행로를 걷는다.

자신을 만난 여인들은 어쩐지 단명했던 것을 죄로 여겼던지라 채선을 살리려 업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는 빈 안방을 차지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금파와 자식인 듯 업고 물려 키운 재효가 살아돌아 온 것만도 감지덕지인 망구할멈이 기다리고 있다.

작둣날에 발바닥이 헤쳐진 채선은 다행히 바닷물의 짠기와 재효가 만든 상처치료제 자운고 덕분에 죽지 않고 살아난다.


제2장 광대의 길(5)


내 이름은 광대

무성했던 여름도 수그러들고 아침저녁으로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채선의 등장으로 소리없는 광풍이 일던 동리정사도 서서히 안정을 되찾아 갔다.

다섯 번째 죽어나갈 여자가 동리정사에 들어왔으니 그날이 언제인진 점을 쳐보자 어쩌자 담장넘어 난리를 치던 소문도 재효의 침묵 앞에서 방향을 잃었다.

채선 역시 집안 일을 찾아 도울 정도로 몸과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생사를 넘나들던 경계를 이기고 생의 자리로 돌아오고서도 몇 번의 고비를 더 넘긴 뒤였다.

채선의 하루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되었다.

멀리서 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리면 금파가 먼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잠귀 밝은 탓에 금파가 일어나며 스치는 이불깃 소리에 채선도 함께 깨어났다.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러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다.

호롱도 밝히지 않은 채 욧자리 위에 앉은 금파의 움직임은 묵직하고도 정확했다. 오래된 소경처럼, 그래서 모든 동선이 머릿속에 배치되어 있고, 동선을 따라 정확히 이동해야 하는 거리와 방향이 세포마다 새겨진 듯 금파는 어둠을 더듬어 손경대를 내렸고 참빛을 꺼내었으며 빼놓은 비녀를 찾아 타래 튼 머리에다 정확하게 꽂았다.

느릿하면서도 안정된 움직임이 멎을 즈음이면 중문 넘어 우물에서는 두레박 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은 금파의 움직임은 언제나 나비 같았다.

잠시 후, 똑똑 물방울이 되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올 쯤이면 금파는 매만지던 머리를 마무리했고 곧 두레박이 끌려올라와 우물 시렁 위에 얹히는 소리가 나면 자리옷을 벗어놓고 하얀 모시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날도 우물에서 물 긷는 소리가 들렸고, 물방울 되떨어지는 소리가 난 끝에 두레박이 시렁 위에 얹히는 소리를 들은 금파가 쪽진머리를 자근자근 만지며 일어나 나가려다 뒤를 돌아보았다.


“오지랖도 넓지.”


군더더기 없는 입엣말은 차고 건조했다. 자신을 대하는 금파의 태도가 눈에 띄게 냉랭해진 것은 노래를 따라부르다 들킨 그날후부터였다.

소리청 수업이 끝나고 처소로 돌아오면 금파는 채선을 물린 방에서 홀로 연습을 이어갔는데 마루 끝에 앉아 그 소리를 듣을라치면 처량한 신세는 온 데 간 데 없고 막 떠오른 해가 잘 쓴 마당을 덮는 듯한 청아한 목소리에 하냥 빨려들곤 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는 조금씩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무당년 주제에 엇다 그 천한 목청을 얹어!”


채선을 쏘아보다 금파는 방을 나갔다.

금파가 비워놓은 휑한 방안에 홀로 남은 채선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난 무당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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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시작되었으므로 동리정사 우캐마당으로 나락가마니들이 실려 들어왔다.

넓은 마당에 덕석이 끝도 없이 깔렸고 나락가마니가 부려졌다. 참새들이 바빴다. 바쁜 참새들만큼이나 동리정사 사람들도 모두 바빴다.

채선도 바지런히 몸을 놀렸다. 자신이 누군지, 어디서 살았는지 기억은 못해도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하는 지는 알았다. 기억이 되살아나 집으로 갈 때까지는 이 집에 의탁해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밥값은 해야 한다는 것.

우캐를 젓는 일은 안성마춤이었다. 아침에 노복들이 덕석을 펼쳐 나락을 널어놓으면 가을걷이 하느라 뒤집어 말리는 일까지 할 겨를이 없었다. 널어놓은 나락을 고무래고 젓거나 발로 젖는 것을 우캐젓는다고 하는데 채선은 그 일을 자신이 맡아하겠다고 나섰다.


“그렇게 하거라. 그렇게 마음을 먹어주니 다행이다.”


때때로 채선을 찾았다가 망연히 앉은 모습을 발견하곤 짠해하던 재효가 먼저 반겼다.

망구할멈도 흔쾌히 허락했다.

우캐마당은 집안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있었다. 북중문 지나고 또 지나 구석진 곳에 있는 그곳은 두충나무가 빽빽한 담장을 끼고 조금 들어가면 숨어 있었던 듯 나타나는 곳이다.

두충은 재효의 아버지 광흡이 관약방을 시작하면서부터 심어놓은 것인데 지금은 인근 의원에서 모두 공급받을 만큼 질이 좋은 약재로 소문이 나 있다. 재효가 만든 상처치료제 자운고의 원료이기도 하다.

가지런히 펼쳐진 덕석 위로 가을볕이 뾰족뾰족 쏟아지고 있다.

채선은 손차양을 하고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너무나 투명해서 푸른 물이 떨어질 것 같은 하늘이었다.

‘나는 정말 누굴까?’

날개가 있다면 저 하늘로 올라가 내려다보고 싶었다. 그러면 자신이 살던 고향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후여! 후여!”


서글퍼지려는 마음을 떨쳐내려 두 팔을 휘휘 참새를 쫓는 채선이다. 바지런히 낟알을 쪼던 참새들이 호르르 담장을 넘어갔다.

이번에는 신발과 버선을 벗어 두충나무 가지에다 걸어놓고 치맛자락을 둘둘 말아 올렸다. 발바닥이 나락을 밟고 서자 낟알 껍질이 깍깍 찔렀으나 싫진 않았다. 이런 따가움이 기억을 끄집어내줄 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희망을 가졌다.

따끔따끔한 발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벼의 낟알들을 가르고 걸어나갔다. 한 발 한 발 밀고 나가는 발바닥을 따라 파인 골이 뒤따라왔다.


“이것도 흔적이 남는데….”


어찌하여 내 기억은 하늘 높이 솟은 신대랑 작두 말고는 보여주는 것이 없는 걸까? 금파의 말대로 나는 정녕 무당이었단 말일까?

또 서글퍼지려는 것이 싫어 빠른 걸음으로 나락을 밀고 나아갔다. 덕석의 가장자리부터 생겨난 골은 그 안에서 또 골을 만들고 만들어 맴을 돌다가 한 가운에서 고인 듯 멈추었다.

사라진 기억속 어딘가엔 이렇게 우캐를 젓고 있는 있을까.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는 이런 일이 이렇게 재미있을 수는 없다고 채선은 생각했다. 기억이 사라져도 몸에 익은 일은 편하고 잘 할 수 있는 법이다.

맞아, 난 무당 따위는 아닐 거야. 그럼 누굴까? 부잣집 아기씨를 돌보는 하녀였을까? 도지농사 짓는 농부의 딸이었을까? 아니, 아니었을 거야. 나는 부잣집 고명딸이었을거야. 품성 높은 아버님은 책을 읽고 온화한 어머니는 수를 놓으라 이르지만 고생하는 비보들을 돕느라 부모님 몰래 우캐를 젓는 말광량이 눈물많은 고명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캐젓는 이 일이 이토록 즐거울 수는 없는 일이다.


“어머니….”


생각도 나지 않는 어머니를 불러보니 눈 속이 뜨끈해지다가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왔다. 싫다. 슬퍼지는 건 참말 싫다. 이럴 때는 신나는 노래 한 소절이 제격이다. 눈을 껌뻑하고는 금파는 부르던 노래 한 소절을 웅얼거렸다.


“배비장이 목사를 따라 봄놀이를 가는디!”


역시 노래다. 노래를 하면 우울했던 마음이 사라진다.

이번에는 흠흠, 목청을 가다듬고 소리를 조금 높였다.

“배비장이 목사를 따라 봄놀이를 가는디!”


하고보니 다음 구절이 떠오르질 않았다. 골똘히 생각해봐도 도시 이어지질 않는다.

다시 해보자.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말고 금파처럼 목청껏 내어보자.

목청을 다시 가다듬고 금파가 하던 것처럼 냅다 소리를 내질렀다.

“배비장이 목사를 따라 봄놀이를 가는디! 아이쿠, 저 꽃이 웬꽃이냐아!”

목청 깊숙한 곳에 숨어 있었던 듯 우렁한 소리가 터져나왔다.


“허이구머니!”

채선은 제풀에 놀라 입을 꾹 눌렀다. 혹시 누가 듣기라도 하면 큰일 날 일이다. 분명히 금파 귀에 들어갈 것이고 그러면 한방살이가 여간 고단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진 어떻게든 이 집에 의탁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조용히 지내야 하는 게 좋았다.

아쉬운 마음을 접고 다시 치마를 걷어올렸으나 자꾸만 입에서 노래가 나오려 했다. 웅얼웅얼 달래보았지만 속만 터질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될대라 되라 싶었다.


“하이쿠, 저 꽃이 웬 꽃이냐아!”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시원해졌다.

다시 한 번 길게 뽑아내고선 흡, 입을 다물고는 주위를 살폈다. 황토담 시렁 위에 올라 앉은 고양이가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바라보고 있었다.


“어땠니? 괜찮았어? 들을 만 했던 거야?”


고양이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괜찮았다고? 그럼 한 번 더 해 보께.”


이번에는 배비장이 되었다 생각하기로 했다. 채선은 눈을 게슴츠레 감았다.

아! 눈앞에 봄꽃 흐드러진 샛길이 보였다. 그 길을 어여쁜 처자하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배비장이라면 당연히 뒤를 따라야지. 채선은 농지거리를 하듯 소리하기 시작했다.

“아짱 아짱, 아쓸 아쓸, 하따 저 교태걸음 좀 보소.”


‘아장아장’ ‘아슬아슬’ 할 때 혀의 양 가장자리가 입천장에 딱딱 달라붙으며 나는 짧은 발음이 기막히게 좋아서 또 한 번 그 대목을 읊었다. 그러자 진짜 배비장이 된 듯 건들건들해지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내친김이었다. 이번에는 세워둔 당그레를 집어들어 입에 무는 시늉을 했다. 길다란 당그레는 돌연 장죽 중에 대장죽이 되었다.


“앞에 가는 그 처자 아짱 아짱 아쓸 아쓸 날 좀 돌아보시오.”


소리는 자꾸 올라가는데 뭔가 성에 차질 않았다. 당그레를 휘익 집어 던졌다. 그리곤 치마폭을 채어잡고선 아랑이나 된 듯 진짜로 아장아장 걷기 시작했다. 엉덩이가 삐뚤빼똘, 덕석을 밀고 가는 두 발은 헤딱빼딱, 팔짝팔짝 뛸 때마다 낟알들이 튕겨나갔다.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채선은 그제야 자기가 우캐 젓는 일을 자처한 연유를 알았다. 우캐를 젓는 일이 결코 좋아서가 아니었다. 아무도 보는 곳 없는 이런 곳에서 이러고 놀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는 넓디넓은 집안의 제일 후미진 곳이다. 출입문도 집안이 아닌 외부에서 들어오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금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래, 앞으로도 여기서 소리 연습을 할 거야.”


동리정사의 하루는 수습창자들의 노래로 시작해서 노래로 끝이난다. 금파가 아니더라도 창자들의 노래하는 소리는 아무리 안 들으려해도 안 들을 수가 없다. 들으면 당연히 따라부르고 싶다.


“그으럼. 하고 싶으믄 해야지 뭐. 지가 뭔데 눈치를 봐?”


금파의 싸늘의 시선을 떼쳐내기라도 하듯 채선은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어느날 상사병이 난 배비장이 방자를 불렀겄다. 이봐라 방자야아! 너도 지난 봄놀이 때 본 아장이를 기억하고 있겄다?”


“아무렴입쇼. 이 눔 눈에도 아짱아짱 아쓸아쓸 아지랑이마냥 걸어가는 고것이 아물아물거립니다요.”

“그런디 고것 이름이 뭔지 아느냐?”


“글쎄옵니다요. 걸음이 아짱아짱 아쓸아쓸허니 아장이 아니면 아슬이가 아니겠습니까요?”


“예끼 이눔아! 하하하.”


“헛다 서방님도. 좋음시롱 괜리 저러시지. 그라지 말고 아눔마냥 해 보시오. 아짱 아짱 아쓸 아쓸 아 짱 아 짱 아 쓸 아 쓸.”


어느새 가락에 얹힌 몸뚱어리가 덩실덩실 춤덩이로 변해갔다. 저 혼자 신이 난 판이었으나 채선의 의식 속에는 사방으로 몰려든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는 것이 보였다. 저만치 길을 가던 사람들도 박수 소리에 물밀 듯 모여들고 있었다.

헛다, 한 판 신나구마는. 장죽을 물고 가던 늙은이도 모여들고 히야 야 처녀가 노래를 다 부른다. 코찔찔이도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끌어올리며 모여든다. 거참! 사인교를 타고 가던 양반님네의 눈도 가오리가 되었다.

채선은 구름처럼 모여드는 구경꾼들을 향해 더욱 소리를 높였다.


“허따, 이눔아. 아무리 좋ㄱ로서니 양반 체면에 어째 아장걸을 걸으라는 것이냐?”


하고서는 궁둥이를 쭉 빼서는 아장걸을 걷자 왁자, 폭소와 함께 박수가 터져나왔다. 구경꾼들의 박수소리에 취한 채선은 낟알이 휙휙 날아가는 것도 모르고 그저 훠뤌 구름이 되어 춤을 추고 바람이 되어 노래를 불렀다.

노래는 흥부가로 이어졌다. 가난한 신세를 한탄하는 흥부의 노래가 이어지더니 먹을 걸 얻으러 온 시동생의 뺨을 주걱으로 쳐올리는 놀부 마누라가 등장했다. 밥을 기다리는 처자를 바라보는 흥부의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가 다리 다친 제비가 마치도 제 신세인양 안타까운 마음이 되었다가 웃었다 울었다 하며 얼마나 시간을 보냈는지 모른다.

드디어 박타는 장면이 시작되었다.


“시르렁 실근 톱질이야 에이여루 톱질이로고나 몹쓸 놈의 팔자로다 원수놈의 간난이로다아!”


나락알이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것도 모르고 손에 톱을 든 양 상체를 숙였다 일으켰다 할 때였다.


“얼쑤우!”


뒤에도 구경꾼들이 진을 친 모양이었다. 채선은 더욱 신명을 넣어 소리를 했다.


“어떤 사람은 팔자좋아 일대 영화부귀헌데 이누무 팔자야 어이하여 박을 타서 먹고 사느냐. 에이여루 당겨주소. 에이여루 밀어주소.”


완전히 무아지경에 빠져들었을 때였다.


“처자 이름이 뭔가?”


“나? 허따 그거 알믄 뭐할려나. 내사 성도 이름도 아무것도 모른다네.”


“그럼 너는 뭐하는 사람인가?”

“나? 허허 나야 광대지 광대!”

그래놓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채선은 뒤를 휙 돌아보았다. 기겁할 뻔 했다. 등 뒤에는 소리청 선생 김세종이 떡 하니 서 있었다.

“에이구머니! 이를 어째.”


미투리를 끼어 신으려다 발가락이 걸려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언감생심. 있는 듯 없는 듯 살아도 미운 털이 박힐 판에 이런 몸쓸 짓을 저질렀으니 당장이라도 쫓겨날 것만 같았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채선은 천둥지둥 흩어진 나락을 쓸어모으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런 채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김세종의 등 뒤로 어느새 해가 훌쩍 기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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