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소릿고>#17

-제2장 광대의 길(6)

by 취중진담

발행일:2025. 12.29 pm8:00


<전편노트>

기억을 잃어버린 채 동리정사에 눌러앉은 채선은 소리에 대한 본능으로 갑갑증을 느낀다. 가을이 오고 추수철이 되자 바빠진 동리정사 사람들은 추수한 나락을 널어놓고 각자의 일을 하는 동안 채선은 끌리듯 널어놓은 나락의 우캐를 젓는다.

너른 집안의 가장 후미진 곳. 특히 금파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인 우캐마당에서 채선의 본능은 터져나오고 만다.

그러다 소리청 선생 김세종의 눈에 뜨이고 마는데….


제2장 광대의 길(6)


내 이름은 광대(2)

“자네가 이 시간에 어쩐 일인가? 저녁 연습시간이 아닌가?”

텅 빈 아내의 방을 다녀오던 재효가 자신의 처소를 돌아나오는 김세종을 발견하고 물었다.

“아니, 영감!”


재효의 손에 들린 옥비녀를 본 김세종이 납작한 눈을 홉떴다. 비녀주머니에서 방금 꺼냈던 듯 노란 술이 달린 끈이, 열린 주둥이 밖으로 흘러내려 있었다. 한 눈에도 죽은 안방의 비녀였다. 봉분 속에 껴묻거리로 들어가 있어야 할 저것이 왜 영감 손에 들렸을까? 세종은 아찔함을 넘어 숨이 막히는 듯 했다. 혹여 또 지난번처럼 위험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였다.


“아아, 이거….”


재효는 멋쩍게 웃고서 안으로 들자는 시늉을 했다. 돌아서는 재효의 등 뒤에서 김세종이 다그치듯 말했다.

“이제는 잊으셔야죠. 마님 물건을 자꾸 찾으면 또 병나신다니까요.”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하게.”


“제가 드릴 말씀인진 모르지만 마님 역시 여인이 아닙니까? 여인이야 품에 들면 맛이지마는 떠나면 또 그뿐인 것이지요. 영감께서 무엇이 무자라 떠난 마님을 그리 연연해하시는지 저로서는 정녕 모르겠습니다.”


조금 전 재효는 짧은 오수를 즐겼다. 꿈속에 죽은 아내가 왔다. 꽃이 만발한 구릉을 걷고 있었는데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릿타래를 치렁치렁 늘인 채였다.


-여보, 이렇게 맑은 날 눈이 오시네요. 좋은 일이 있으려나 봐요.


아내의 휘날리는 머리위로 송이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허허, 정말이군 그래.


허공에서는 하얗게 부풀었던 눈송이가 땅에 닿자마자 발간 꽃으로 변했다.


-어머나 여보. 동백이 피었어요. 눈 속에서 동백이 피어났다니까요.


맞았다. 하얗게 덮인 땅 위에 동백꽃이 송이송이 피어나고 있었다. 천지가 동백이었다. 그런데도 재효의 눈은 동백에 가 있지 않았다. 어린 아이처럼 두 팔을 벌려 송이눈을 받는 아내의 흘러내린 머리채에 가 있었다.


-저 사람에게 비녀를 꽂아주지 못했구나.


그러다 잠에서 깨어났고 아내의 방을 찾았던 것이다. 상을 치를 때 껴묻거리로 넣지 않고 숨겨두었던 아내의 비녀. 아내가 쓰던 경대 서랍속에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앵매의 자살사건 이후, 자신의 팔자를 저주하다 차라리 죽자하고 나섰을 때 그것을 왜 가져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다 가지고 온 것이었다. 이제는 자신의 방에 둘 생각이었다.


“보게나. 그 사람 손 때가 반질반질 묻어 있질 않나?”


“그야 뭐….”


보물을 다루듯 비녀를 주머니에 넣는 재효를 보며 세종은 어정쩡한 미소를 지었다. 백이나 되는 창자들의 입을 것, 먹을 것, 잘 것 등을 조건 없이 지원하는 통 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여자 문제에서만은 저렇듯 순정할까. 아내들을 보내고 홀로 지내는 동안에도 단 한 번 흐트러진 적이 없었다. 그랬는데 앵매사건 이후, 쏟아지는 팔자소관 이야기에 처음으로 흔들린 사람이었다.

재효는 그런 재효가 안타까웠다.


“뭐라? 그 아이가 광대였다고?”


재효가 세종을 뚫어지게 보았다.


“확실한 것 같습니다.”


“뭘 보고?”


세종은 방금 전 우캐마당에서 본 장면을 최대한 사실대로 전했다. 비복들이 타작해 온 나락을 잘 말리고 있나 싶어 우캐마당으로 가다가 뜬금없는 배비장타령을 듣고 누군가 하고 들어갔는데 그 아이더라는 이야기. 그런데 그 목청이, 몸놀림이 예사가 아니더라는 이야기. 그래 물었더니 역시 이름도 성도 모르는 것이 맞았고, 대신 광대짓을 했다는 사실을 털어놓더라는 이야기를 낱낱이 이야기했다.

“제 눈으로 봤지만 저도 믿지 못하겠습니다, 영감.”


“그냥 흥얼거린 게 아니고 분명 제대로 소리를 하였다는 말이지? 그것도 금파를 넘어설만큼?”


“제가 어디 빈말하는 사람입니까? 조선 천지 그런 목청은 없을 겁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조선 천지 자기가 모르는 처녀소리꾼이 있었더란 말인가? 그것도 금파를 능가하는 목청이라니.

재효는 뒷덜미가 뜨듯해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을 다답았다. 세종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 이러는진 모르지만 직접 듣고 보지 않고서야 그 무엇도 판단해서는 안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일단 의향은 묻기로 했다.


“그래. 자넨 어찌하면 좋겠는가?”


세종은 그런 재효를 보고 평소 자장의 모습이 아니라 여겨졌다. 소리에 재주있어 보이기는 자가 있다면 천 리를 마다않고 찾아가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천하의 소리를 발견했다는데도 이리 느긋해하다니. 어떻게 하고 말고가 어디 있는가. 당장 소리청으로 불러내려 씁창자가 되게 해야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다.

“영감답지 않습니다.”


“나? 나다운 게 뭔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그 아이를 소리청 수습청자로 받는 일을 섣불리 결정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지.

기억이 되살아나고 만에 하나 반가의 여식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 따를 후한 때문인가.

재효는 고개를 저었다. 여태 단 한 번도 그 아이를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목숨을 건져주었으니 기억을 되살릴 때까지 내 집에 기거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 뿐, 그 외 어떤 판단도 결정도 해 본 적이 없다.

한 가지 생각은 있었다. 천우신조로 기억을 찾았을 때 부잣집 고명딸이면 그것으로 충분하겠지만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천덕꾸러기라면 돌려보낼 때 두어 수레 재물을 딸려보낼 거란 것이었다.


“지금 당장 불러서 목청이라도 들어보십시오. 그러면 마음이 달라지실 겁니다.”


모처럼 물건 하나 건졌다 싶었는데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이니 세종이 더 애가 탔다.

재효는 눈을 감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쇠뿔은 단김에 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는 원석입니다. 원석을 집안에 묻어두고 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갈고 닦겠습니다 영감.”


“글쎄….”


“혹시 모를 후한이 두려우십니까?”


“그도 그렇지 않다곤 말 못하지.”


여자가 소리를 한다는 것은 여자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일이다. 모든 예인들이 그러하듯 소리쟁이는 오로지 소리를 위해 먹고, 자고, 입어야 한다. 만약 반가의 여식이라면 어떠한 후한이 따를지 모르는 일이다.

세종은 마음이 조급해져 밖에다 대고 소리쳤다.


“밖에 누구 있는가?”


저만치서 신발끄는 소리가 달려왔다.


“가서 금파에게 일러아. 같이 기거하는 그 아일 데리고 이리로 좀 오라고.”


신발 끄는 소리가 마당을 건너가는 것을 들으며 재효는 몸이 뜨거워 왔다. 만약, 그 아이가 정말 원석이라면 어떻게 해야하나. 싹수가 보이면 욕심이 날 것은 자명한 이치.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귀명창이 아닌가. 재효는 그 아이를 소리청으로 들였다는 소문이 퍼진 후를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앞에 세종이 앉은 것도 잊고서 재효는 지난 일을 돌이켜 보았다.

억지 사주단자가 왔고, 받지 않았고, 앵매는 억지로 떠밀려 친정을 나왔고, 오는 중에 느티나무 가지에 목을 맸고, 온 동네 소문이 퍼졌고, 들리느나 자신의 팔자소관이라는 소리였고, 그 팔자가 여자 잡아먹는 남귀팔자는 것이었고, 서러웠고, 무서웠고, 그래서 차라리 죽으려 했고, 죽기 전에 사랑했던 아내의 영정을 찾았고, 재를 넘어 검당포로 갔고, 갓과 신발을 멋어놓고 밀려드는 해수에 몸을 맡겼고, 충렁거리며 죽어가던 그때 무언가에 걸렸고, 휘감겼고, 사람이었고, 여자였고, 죽어가고 있었고, 살려야겠다 생각했고, 살렸고, 살리고보니 발바닥이 갈갈이 갈라져 퉁퉁 불었고, 어린여자였더라.


“주인님.”


발자국 소리가 자박거리며 다가오더니 금파의 묵직한 음성이 문턱을 넘어왔다.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고 금파가 들어왔다.

재효는 뒤에 선 채선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고운 얼굴이었으나 표정이 실리지 않는 백지같은 얼굴에 불안감이 드리워져 있었다. 가늘고 고운 얼굴선 때문인가. 얇디얇은 살피 때문인가. 좀 가벼워 보이는 구석이 있구나. 동리정사에서 머문 지가 벌써 몇 달째인데 처음으로 든 생각이 있다.


“어쩐 일로 저희 둘을 같이 부르셨는지요?”


금파가 먼저 물어왔다.


“일단 앉거라.”


오래 열리지 않는 재효의 입을 뚫어지도록 바라보고 있던 세종이 대신 물었다.

“혹시 이 아이에게 소리를 배워준 적 있느냐?”


“소리…요?”


금파의 얼굴에 언뜻 언짢은 기미가 비쳤다 사라졌다.

“답을 해라.”


금파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생각을 입 속에서 굴리듯 두툼한 입술이 조금 움직였는데 그 침묵이 이상하게 설득력있게 느껴진다고 재효는 생각했다.

“듣기로 이 아이가 노래를 한다고 하기에.”

참지 못한 세종이 물었다.

금파의 놀란 눈이 채선을 쏘듯 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순간 채선이 치고 들어왔다.


“예. 제가 그냥 했습니다. 언니가 배워준 적은 없습니다.”

놀란 금파가 저지하려하자 채선은 더 야무지게 대답을 이어갔다.


“배워준 적은 없지만 제가 듣고 스스로 배우긴 했습니다. 어르신! 제가 죽을 짓을 한 건진 모르지만 저를 소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재효는 전율이 일었다. 노래하고 싶은 절절함이 차고 넘치는 눈이었다.

집으로 참으로 많은 창자를 들였고 내보냈다. 지독한 가르침을 이긴 이들은 소리꾼이 되어 세상으로 나갔고, 견디지 못한 자들을 스스로 포기한 채 걸어나갔다. 그 세월 동안 재효는 알게 되었다. 꿈을 이룬 이와 포기한 이의 차이는 바로 눈빛이라는 것을. 눈빛이 곧 마음이라는 것을.

노래하고 싶은 열망이 출렁이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는 채선의 눈빛을 보고 재효는 모든 것을 떨치기로 했다. 반가여식일 경우 돌아올 후환 같은 것은 잊기로 했다. 그 넓은 바다 한 가운데서 죽어가는 상태로 자신과 부딪쳤고, 살려야겠다 생각이 들었고, 그 먼 길을 업고 와서 온갖 구설에 시달리면서도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다는 확신이 들었다.


“묻겠네. 내 집에 계속 머물면서 소리공부 할 의사가 있나?”

채선은 귀를 의심했다. 어디 근본도 모르는 것이 배워주지도 않는 짓을 했냐 호통을 내릴 줄 알았는데 엉뚱하게 소리공부를 정식으로 하겠느냐 묻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하겠다는 뜻인가?”


“예, 하지요. 하고 말고요. 저를 수습창자로 받아만 주신다면 이 은혜 뼈를 갈아서라도 갚겠습니다.”

옆에 선 금파의 낯색이 파리하게 변하는 것을 보았지만 재효는 모른 척 했다.


“그럼 내 묻는 말에 대답을 해 주겠나?”


“예, 어르신!”


“아까 우캐마당에서 불렀던 배비장도 금파가 하는 것을 보고 듣고 배운 것인가?”


“예.”


“춤은?”


금파의 두툼한 눈밑살이 참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그게…저…사실은.”


“나무라는 게 아닐세. 그러니까 지금 내 앞에서 아까 불렀던 그 대목을 그대로 해 보이라는 거네.”

채선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아, 아까 그래로 하란 말씀인지요?”

“그래, 그대로만 하면 되네.”

채선은 알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아까는 아까 기분대로 불렀지만 지금은 그때의 기분이 아닌데 어떻게 그대로 부르라고 하는지 난감했다.


“그냥…나오는대로 불러볼까요?”


“그래. 나오는대로, 자네 멋대로!”


채선은 그제야 목이 죄는 듯한 압박감에서 벗어났다. 지금은 지금 나오는대로 불러야지 아까랑 똑같이 부를 수는 도저히 없었기 때문이다. 채선은 입술을 다져물었다가 소리를 시작했다.

“배비장이 목사를 따라 봄놀이를 갔는디!”

채선의 입이 열리자 재효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금파도 놀라 두어 걸음 물러났고 세종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세 사람이야 나 몰라라 채선은 마냥 나오는대로 가락을 뿜어냈다.


“아 짱 아 짱 아 쓸 아 쓸 저 교태걸음 좀 보소오.”


재효는 눈을 감은 채 폭포수를 힘차게 거슬러오르는 지느러미를 보았다. 금빛 지느러미는 물살을 거슬러올랐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저 작고 여린 몸 어딘가에 저토록 거대한 소리통이 숨어 있으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거짓말 같았다.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효는 자신의 귀를 쩡쩡 울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그 소리를 내는 이가 자신이 살려준 조그만 어린 여자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저 아이를 뭐라고 불러야 하나.

불현 듯 여태까지 자신의 생명을 건져준 은인의 이름도 모르고 지냈다는 생각에 이르러 눈을 떴다.

“이름이 뭔가?”


벽력같은 소리에 채선이 뚝 소리를 그쳤다.


“이름을 물었네.”


적막감이 감도는 사이로 재효의 지친 듯한 음성이 깔렸다.


“모릅…니다.”


차오른 숨을 삭인 채선이 조그맣게 대답했다.


“모른다…. 모르고 싶은 건가? 정말 모르는 건가?”


“정말로 모릅니다.”


재효는 쓰러질 듯 피로했으나 눈꺼풀을 밀어올려 채선을 보았다. 내려감은 눈썹 사이로 눈물이 비어져 나와 있었다.

재효는 자신의 물음이 잔인하였음을 알아차렸다.

“내가… 자네 이름을 하나 지어주고 싶은데 어떤가?”

부드러운 음성을 듣고서야 채선은 두려운 표정을 풀었다.


“이름…이라 하셨는지요?”


뻣뻣한 금파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이것 보시게 세종!”

“예, 영감.”


“내일 이 아이의 이름을….”

“저기 어르신!”


채선이 재효의 말을 잘랐다.

“그래, 말을 하게.”


“이름… 필요없습니다.”

채선의 입술 위에 세 사람이 시선이 엉겼다. 기대에 찬 재효의 시선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는 세종의 시선 위로 불안함과 질투심이 묘하게 얹혔다가 엉기는 채선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

“제 이름은.”


“뭔가? 자네 이름이 생각난 건가?”


“이름은.”


“뭐냐니까! 자네 이름이 뭔지 말을 하게!”


채선의 목젖이 파르르 떨다가 멈추었다.

“제 이름은… 광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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