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서러움의 길(5)
발행일:2026. 02. 02 pm8:00
<전편노트>
죽은 재효의 아내가 남긴 유일한 유품인 옥비녀가 자신의 방에서 발견되자 채선은 직감하게 된다. 어떤 무서운 음모가 시작되었고 그 한가운데로 자신이 끌려들어가 있음을.
빼도 박도 못하는 비녀의 도둑이 되어버린 채선은 결국 동리정사에서 쫓겨나게 된다.
제3장 서러움의 길(5)
후회
밤바람이 저고리 섶으로 쳐들어왔으나 추운 줄 몰랐다. 다만 두렵고 무서웠다. 보따리를 껴안은 채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별이 총총했다.
동리정사 담벼락을 따라 꾸불꾸불 걷다가 돌아와 동문을 밀어보았다. 안에서 빗장을 단단히 걸어둔 모양이었다. 꼼짝하지 않았다.
서러웠다. 이 추위에 갈 곳이 없다는 사실과 소리를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생각하니 더 서러웠다.
받아들여야 할 일이다. 의도했뜬 하지 않았든 이제는 동리정사와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동리정사 생활은 기억 속에서 지워버려야 할 시간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꼭 해야 할 한 가지 일이 남아 있다. 기억에 대한 확신이었다. 내가 절대 옥비녈ㄹ 가져오지 않았다는 스스로의 확신을 증명해 보이고서야 떠나도 떠날 일이었다.
채선은 입술을 앙다문 채 동리정사 뒤 쪽에 있는 모양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높다란 그곳에서 동리정사를 한 번만 더 내려다 볼 요량이었다. 그러면 그날 자신이 움직인 행보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왜 이리 늦는 게야. 교대 시간이 다가오는데.”
모양성의 관문인 공북루가 가까워오자 관솔불빝이 비치며 기듯 감아도는 성벽이 보였다. 화기를 보았을까. 갑자기 한기가 살을 파고들었다. 미처 찾아 입지 못한 누비저고리가 아쉬웠다.
채선은 성벽을 따라 걷다가 옹기의 배처럼 불룩하게 돌다가 푹 꺼진 곳의 어둠에 몸을 담갔다.
“모르지. 미친 년 하나 만나 재미보고 있는지.”
소리의 향방을 가늠하려 했지만 굴곡진 성벽 때문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순라를 도는 순라꾼일 터였다. 채선은 몸을 오그렸다.
“어느 미친년?”
“낮밤도 모르고 동리저사 동문 두드리는 미친년들이지 누군 누구겠수?”
“글쎄. 얼마나 소리가 하고 싶으믄 그 먼 길을 달려올까 싶기도 하던데 나는.”
“헛다! 보살났네요. 보살났어.”
동리정사 동문 이야기가 나오니 벌컥 서러움이 복받쳤다. 동문은 소리에 목마른 자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곳이다. 동문으로 오는 자들은 돌리가 만나준다는 소문 때문이다.
소리가 멀어지자 저들이 말하는 미친년 속에 자신도 섞여 있는 것 같아 불편해진 마음으로 다시 걸음을 떼었다.
서쪽을 향하고 걷자 모양산을 따라 구불구불 성벽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산의 높낮이에 따라 성벽 높이도 오르내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아직 녹지 않은 잔설이 신발 밑에서 사그락거려며 부서져내렸다.
어디선가 잠자리를 찾는 산짐승 소리가 들려왔다. 무섬증이 일었으나 세상에 무서운 것이 사람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싶었다. 그 생각의 뿌리에는 금파가 있었다.
성벽의 높다란 지점에 이르러 마을을 내려다보니 동리정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코끝이찌르르 하고 눈이 뜨듯해졌다.
채선은 동리정사가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성벽을 더 타고 올랐다.
한참을 돌아 동리정사 남쪽에 앉은 소리청 가까운 곳으로 가자 담벼락을 넘어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춘향가 한 대목이었다.
“보고 지고 보고 지고 보고 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귀 기울여 듣지 않아도 금파 못소리임이 분명했다.
가슴 저만치 밀어넣었던 금파에 대한 원망이 솟구쳐 올랐다. 그날 고뿔이 들었다면 나더러 동리당 방소제를 시킨 이유가 뭐냐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게 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세상어떤 경우에도 자신이 서 있는 자리가 진실인 법이다. 나는 지금 동리정사에서 쫓겨났고, 섣달 찬바람 속에 서 있다. 가을볕 내리는 우캐마당에서 배비장이 되었다가 아랑이 되었다가 신이 났다가 세종선생에게 들켜서 동리당에 불려갔던 그 아이가 아니다. 세상에 너같은 음량이나 음색을 가진 아이는 처음이니 너는 이제 내 수중에서 조선 최고명창이 되도록 갈고 닦으라는 세종의 환희에 찬 웃음소리를 듣던 그 아이도 아니다.
한참을 앉아 금파의 소리를 듣다보니 목구멍이 캐캐해져 왔다. 채선은 점점 차가워오는 공기를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밤은 더욱 깊어져 별빛에 의지해 걷는 길이 위태로웠다.
“손라각에 피를 내어 사정으로 편지허고 간장의 썩은 눈물로 남의 화상 그려볼까.”
금파의 애간장 녹이는 소리가 멀어지니 아쉽고 또 아쉬웠다. 채선은 성벽을 따라 조심조심 걷다가 동리정사가 한눈에 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마침 발 아래 누군가 앉았던 듯 검불이 깔려 있었다.
엉덩이를 내리고 앉았다.
“어머니….”
울컥 서러움이 복받쳤다.
“어머니 어디 계셔요? 저는 누구인가요?”
아무리 그려보아도 어머니 모습을 그릴 수가 없었다. 어머니란 존재는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먼 세상의 이름 같았다. 자신에게는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던 것처럼 어머니라는 세 글자는 낯설고 어색했다.
무릎 사이에 묻었던 얼굴을 드니 소리청엔 어느새 불이 꺼졌다. 금파도 제 처소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고개를 빼서 집주인이 머무는 동리당을 더듬었다.
동리당에도 불어 꺼져 있었다.
“호장어른….”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매달릴 걸 그랬다는 후회가 밀려왔다. 억만금도 소용없고 나는 이 집에서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 소리하며 나리 은혜 갚으며 살고 싶다고 떼를 쓸 걸 그랬다. 사람 하나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양반이 조선 최고 명창을 배출할 엄두를 내다니요. 제가 나가서 어찌해서라도 이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돌아올 거라 대책없이 큰소릴 칠 일이 아니었다. 다시 돌아가서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기억엔 추호도 없지만 설사 내가 그런 짓을 했을지언정 제 정신이 아니었을 거라고, 한 번만 용서해 주신다면 집안 허드렛일을 전부 도맡아 할 수도 있으니 다시 수습창자로 살게 해달라고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질 걸 그랬다.
뒤늦은 후회에 채선은 가슴이 미어졌다.
모질디 모질게 내친 양반이다. 다시 받아줄 리 만무다. 그러면서도 언 입술 사이로 자꾸만 울먹임이 터져나왔다.
어르신! 아무래도 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 심장이 말을 해요. 니가 가져간 게 아니라고 말을 해요. 제 심장을 꺼내 보여달라면 보여드릴게요 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두 팔에 묻었던 얼굴을 들어올렸을 때였다. 꺼졌던 동리당에 빤히 불이 들어와 있었다.
채선은 벌떡 일어났다. 뭔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내려가야겠어. 가서 동문을 잡고 흔들어야겠어. 그래, 어쩌면 후회하고 계실 수도 있어.
그러자 그립고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채선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무릎 사이에 다시 묻었다.
그때였다.
“아따, 징그럽게도 춥구마이.”
발자국 소리와 함께 사내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채선은 화들짝 일어나 성벽에다 몸을 찰싹 붙였다. 성벽의 찬 기운이 등골을 타고 내렸다. 몸이 더 얼어붙는 것 같았다.
“참말로 모를 양반이오.”
“또 누구?”
“호장 어르신 말이지 누군 누구겠수. 저 많은 재산을 우리같은 사람한테 백냥씩만 나눠주면 고맙단 소리나 듣제. 근본도 모르는 것들을 있는 지전으로 이 성벽을 싸그리 도배하고 남을 거라대요, 뭘.”
군졸차림의 두 사내였다. 사내들이 저 앞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채선은 어찌해야 좋을지 발만 동동거렸다.
“자네도 참으로 딱하네. 그 지전을 뭐하러 이 돌덩이에다 도배를 하나?”
“아유, 참. 그냥 한 소릴 갖고선.”
둘 중 나이가 젊어보이는 사내가 허리를 돌리더니 가래침을 탁, 밭다가 채선을 발견하곤 후다닥 뒷걸음을 쳤다.
“누, 누구요!”
채선은 몸을 움츠렸다.
“오호라. 또 미친년 하나 당도하셨구만.”
짧은 순간, 채선은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 후다닥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발자국 뛰지도 못하고 뒷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뭐야? 새파란 아그 아닌가? 허허, 근디 이 시간에 예서 뭘 하는 건가?”
채선은 벌벌 떨면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요새는 세상이 하도 어지러워서 주인집 양반문서 훔쳐 달아나는 노비들이 많다고 하던데 이 년도 그런 거아녀?”
실실거리며 다가오는 젊은 사내 뒤에서 나이 든 사내가 말했다.
“그렇다면 추포감이지.”
“아, 아니어요. 저는 노비가 아니어요. 저는 저기 해남현에서….”
“해남? 해남에서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뭐하러?”
채선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해남이란 말에 화들짝 놀랐다. 해남? 그렇다면 내 고향이 해남이란 곳인가? 그렇다고 그 생각에 빠져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뭐하러 해남서 여그까지 왔냐고 묻지 않아, 처자?”
나이 든 사내가 물었다.
“소, 소리 배우려구요.”
“소리?”
“예. 고창에 오면 어떤 분이 광대들을 불러모아 소리를 가르쳐준다기에.”
하나의 거짓말이 만 개 거짓말을 만든다더니 툭 튀어나온 말을 이으려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그 말이 정말이냐? 그래서 온 거 맞아?”
채선의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던 늙수그레한 사내가 다시 물었다.
“예에. 정말이어요.”
“그래? 그럼 좋다. 니가 개도 아니고 소도 아니라면 소리 한 대목쯤은 할 줄 알겠구나. 소리를 배우러 오면서 한 대목도 모르고 오진 않았을 터. 해 보거라. 할 줄 알면 내 니 말을 믿어주마.”
채선은 떨리는 마음을 억지로 부여잡고 전에 불렀던 배비장전 한 대목을 불러주기로 했다.
“배비장이 목사를 따라 봄놀이를 갔는디, 허이쿠! 저 꽃이 웬 꽃이냐아.”
채선의 소리가 터지자 두 사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너, 너 그 노래를 어디서 배웠느냐?”
채선이 노래를 그치자 늙은 사내가 물었다.
“안 배웠어요.”
“안 배웠다고? 그럼 어찌 아느냐?”
“그냥 알아요.”
늙은 사내의 목젖이 꿈틀거리더니 다시 말했다.
“그럼 그거 말고 흥부가 한 대목을 더 불러보거라.”
채선은 이제 살았구나 싶었다. 어디로 갈지 막막한 이 마당에서 이렇게라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 신나기도 했지만 잘만 하면 다시 동리정사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느껴졌다.
“몹쓸 아전 뒤로 대어 영문, 염문 적어주고, 출패를 돈 백 멕여 항중에 발통하고….”
오장이 끊어진들 아까울쏘냐. 채선은 속에 찬 울분을 모두 끌어올려 가락을 토해냈다.
“그만하거라. 니 소리 더 듣다가는 내 애간장이 다 녹아내리겄다.”
소매로 코를 닦은 늙은 사내가 한 번 더 훌쩍거리고서는 동리정사를 가리켰다.
“등잔밑이 어둡다기로서니 이런 경우를 봤나. 그래 얘야! 바로 저기가 그 집이란다. 나를 따라오너라. 비록 문이 닫혔다 하나 두드리면 열어줄 것이다.”
거짓말 같았다. 그러나, 그러나 어찌 뵙는단 말인가? 쫓겨나며 했던 독설을 어찌 주워담는단 말인가? 앞서는 사내를 따라 걷는 채선의 마음엔 안도감과 회한이 뒤섞여 마구 휘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