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소릿고#21

제 3장 서러움의 길(4)

by 취중진담

발행일:2026. 01.26 pm8:00


<전편노트>

채선을 한 여인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아내의 비녀가 사라진 일은 재효를 혼란으로 빠뜨렸다. 모든 정황을 살펴도 옥비녀의 존재와 상황을 아는 사람은 채선 뿐이기 때문이다.

한 여자에게 품은 연정이 실망과 배신으로 버무려지는 지점에서 재효는 방황한다.


제3장 서러움의 길(4)


오해

동리당으로 들어선 채선은 온몸이 짓눌리는 듯 하였다. 훈훈한 기운이 감돌던 방 안은 화롯불이 꺼져 싸늘했고 마시다 만 술잔이 개다리소반 위에서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 양반이라 알고 있었다. 아침부터 이리 어지럽게 마셨다는 것은 지난 밤 자신에게 물었던 그 일에 대해 아직도 의심을 풀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짐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 속에서도 채선은 고개 숙이지 않았다.


“어르신 저는.”


“가만!”


재효가 손을 들어 저지하곤 허리를 돌려 등 뒤에 있던 뭔가를 끌어왔다.

보자기였다.


“풀어보게나.”


“무엇인지요?”


“글쎄 풀어보란 밖에. 그것이라면 날 구해준 값으로 충분하리라 생각하네.”


말 속에 심한 피로감이 묻어났다.

채선은 보자기를 당겨 풀었다. 한 벌의 옷과 한 꿰미의 엽전과 한 장의 어음이었다.


“이걸 왜.”


“안타깝지만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구만.”


“어르신!”


재효가 손을 들어 채선을 저지했다. 채선은 물러서지 않았다.


“말씀해 주셔요. 제게 왜 이러시는지.”


“몰라서 묻나?”


전에 없던 냉기에 움찔해졌지만 채선 역시 물러나지 않았다

.

“예. 말씀해주셔요. 제가 뭘 잘못하여 이러시는지.”


“자네는 예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야.”


“예인의 자격이요?”


“피곤하구만. 더 이상 묻지 말고 가지고 가게.”


이해하 수 없었다. 무릇 어떠한 것에도 처음부터 자격을 가지고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간절히 원하여 간절히 배우고 열성을 다해 닦아서 갖추어 나가는 것이 자격이다. 그래서 지금 밑바닥부터 열심히 닦아 나가고 있다. 처음부터 자격을 갖춘 이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더 수긍할 수 없었다.

채선을 입술에 힘을 주어 물었다.


“어떤 자격을 말씀하시는지요? 말씀해 주십시오. 말씀을 해 주시기 전에는 물러날 수 없습니다.”


역시 잘 못 본 게 맞았다. 당돌한 것도 모자라 가증스러운 구석까지 가진 아이다. 아무래도 쉬이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다. 재효는 윗목에 밀쳐두었던 개다리소반을 끌어당겨 술잔을 채워 들이켰다. 그리고 조금은 경멸기를 담아 말했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경멸하는 사람이 셋 있다네. 첫째, 겉과 속이 다른 자. 둘째, 남의 것을 탐내는 자. 셋째, 거짓말하는 자이지. 자네는 그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추었어. 자네의 목청이 아무리 보석이라도 나는 자네를 수습창자로 지명할 수가 없단 말일세. 내 자네에게 빚이 있다면 목숨이겠지. 어찌되었든 나를 죽음의 문턱에서 끌어낸 사람이니까. 하니, 이것으로 계산을 끝내주었으면 하네.”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섣부른 짐작을 토해내는 재효의 말에 채선은 실망스러웠다. 기억을 찾아 부모님께로 돌아갈 그날까진 아무런 걱정말고 글공부에 노래공부를 하면 된다던 말은 무엇이었나. 기억이 돌아와도 내 집에 살면서 노래 공부를 해도 된다고 한 뜻은 대체 무엇이었나 말이다.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세요.”


“선생님? 누구, 세종”


“예. 선생님께서는 저를 믿어주실 겁니다.”


재효가 빙긋 웃었다.


“허허, 집안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으이. 그러니 오늘밤 조용히 나가주었으면 하네.”


채선을 고개를 똑바로 쳐들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보았군요.”


“내가 자네를 잘 못 본 게 아니고 자네가 나를 잘 못 보았다?”


“예. 저는 어르신이 이토록 경망스러운 분인 줄 몰랐습니다. 확실한 물증도 없이 사람을 이리 매도하다니요. 가지요. 나가라면 나가야지요. 하지만 도둑이라는 누명을 쓴 채 나갈 수는 없습니다.”


“그런가? 정녕 그렇단 말인가? 그렇다면 자네가 명백히 아내의 비녀를 가져갔음을 확인시켜 주랴?”


놀라는 채선을 본 체 만 체 재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채선은 자신의 처소쪽으로 빠르게 걸어가는 재효의 뒤를 따라가며 검은 구름이 덮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내가 먼저 들어가도 되려나?”


채선의 처소 앞에서 걸음을 멈춘 재효가 뒤에 선 채선을 돌아보지도 않고 물었다.


“예, 어른신.”


대답을 했을 때 재효는 이미 채선의 방 안에 들어가 있었다.


“보아라.”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불시렁 아래 놓인 경상 서랍을 연 재효의 손에 들려나온 것을 보고 채선은 기함을 했다. 활짝 핀 연꽃 두 송이가 수놓아지고 노란 비단술이 달린 옥비녀 주머니였다.


“그게 왜….”


“이래도 발뺌을 할텐가?”


눈 앞에 놓인 주머니와 재효를 번갈아 바라보다 채선은 아득해졌다.


“목함은 어떻게 했나? 이것은 분명 자네가 만들어 보관하라던 목함 안에 넣어 두었는데?”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물었다.


“마님 비녀가 왜 거기 들어있는 거지요?”


“허허 참 나. 그걸 나한테 물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는가?”


“어르신 저는 아닙니다. 제가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아니지? 기억이 안난다고 말해야지. 그것이 자네다운 변명일 텐데?”


채선은 자신도 모르게 어떤 무서운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고 자신은 그 음모의 한가운데로 이미 끌려들어왔음을 직감했다.


“어찌 그런 무서운 말씀을.”


“무서워? 무서운 건 나라네. 자네가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게 거짓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 자넨 다 기억하고 있어. 모르는 척할 뿐인 거지.”


“어르신, 저는 정말….”


“목함에는 발이 달리지 않았어 제 발로 어딘가를 가서 뚜껑을 열고 비녀주머니를 꺼내 자네 서랍에 넣어둘 리가 없단 말일세. 내 말 알겠나?”


채선은 무너지고 싶었다. 금파의 부탁으로 동리당에서 소제를 한 기억이 퍼뜩 되살아난 것이다. 그때 생각했었다. 어르신은 출타할 때도 마님의 비녀를 가지고 가실까, 두고 가실까? 문득 궁금했고 가져갔을 거라는 예단 끝에 죽은 마님이 차라리 부럽다는 생각을 잠시 했더랬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아무리 궁금해도 주인없는 방에서 남의 물건을 찾아보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기에 마음을 털고 소제를 시작했다.

그런데 혹, 나도 모르게 그것을 찾았고, 발견한 순간 순간적인 탐심으로 가져와버린 건 아닐까? 의식을 집중하고 그날의 일을 그려보았지만 아무리 기억을 짜내도 그랬던 것 같진 않았다. 비녀가 자신의 처소에 와 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쩌면 나는 불리한 기억만 잘라버리는 능력이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정말로 내가 마님의 옥비녀를?

채선은 주저앉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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