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서러움의 길(3)
발행일:2026. 01.19 pm8:00
<전편노트>
채선에게로 향하는 감정을 지워내기 위해 집을 나가 벗이자 스승으로 여기는 엄사안을 만나고 돌아온 집.
재효는 죽은 아내의 옥비녀가 없어진 것을 발견한다.
여러명의 아내였던 여인들 중 유독 애정이 깊었던 마지막 아내가 유일하게 남긴 유품이다.
옥비녀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이는 딱 한 사람 채선.
재효는 채선을 용이상에 두고 비녀의 행방을 찾아가는데….
제3장 서러움의 길(3)
옥비녀의 행방
다음날 재효는 눈을 뜨자마자 우물가로 나갔다.
지난밤 뜬 눈으로 보낸 탓으로 눈이 시렸다. 멀쩡한 아이를 잡은 게 아닌지도 모른다는 자책감과 동시에 극심한 배신감이 밤새 선꿈속을 지배한 때문이었다.
-그 아이 역시 뜬 눈으로 보냈으리라. 나처럼 잠 못 이루고 뒤척였을 거라. 그 속도 서리앉은 이 두레박과 다를 것 없으리.
두레박을 내릴 땐, 원망 섞인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채선의 얼굴이 떠올랐다가도 두레박을 올리면서는 그 얼굴이 가증스레 여겨졌다.
“그렇지. 절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는 법은 없지.”
믿고 싶은 마음과 믿을 수 없는 상황을 정리하지 못한 채 차가운 물을 한 입 가득 머금고선 서리내린 집안을 둘러보았다.
“제 불찰입니다.”
어느 결에 왔을까. 등 뒤에서 금파의 음성이 들려왔다. 마치 혼령같은 음성이라고 재효는 생각했다.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무엇을 말이냐?”
“마님 비녀를 잘 간수하지 못한 것이요.”
“무슨 소리냐?”
“그것이 마님 비녀를 훔쳐갔다고….”
겨우 지난 밤의 일을 알고 있다니. 망구할멈이 쓸데없이 소릴 한 모양이겠지만 기분이 언짢은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재효는 말을 비켰다.
“그렇게 옷이 얇으니 고뿔들기에 안성마춤이구나. 어서 가서 배자라도 걸쳐라.”
“주인님!”
금파가 등뒤로 바짝 다가서는 것이 느껴졌다.
“하고! 내 너에게 책을 읽으라 하였는데 어찌 새벽독서를 게을리하고 나왔느냐. 예인이 예인으로 대접받으려면 기능에 앞서 익혀야 할 것이 있다고 하질 않았느냐? 그것을 서책이 알게 해 줄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
재효는 음성에 결기를 넣어 금파가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두려운 것이 소문이다. 평생을 소문에 짓이기며 살아온 인생이다. 이제 어떠한 일도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일은 입설에 오르내리기 싫었다.
“왜 그러고 섰느냔밖에! 나는 너에게 할 말이 없다.”
“받들어 뫼시겠습니다. 그런데 주인님.”
이야기의 맥을 끊으려는 재효와 달리 금파는 끈질겼다.
“그 아이 방에….”
기분 나쁜 직감이 머리를 때렸다.
“무슨 소리냐”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아, 아닙니다 주인님.”
상투가 쭈볏 서는 것 같았다. 금파의 입에서 금방이라도 무서운 이야기가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저 입을 막아야 하나, 들어야 하나.
잠시 갈등하였으나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금파를 향해 돌아섰다.
“설마 그 아이의 방에서 비녀함을 보았다고 하려는 건 아니겠지?”
“송구합니다 주인님. 하지만….”
금파가 고개를 푹 꺾었다.
“뭐냐? 보았단 말이냐?”
“실은 주인님께서 주신 소학을 읽다가 모르는 내용이 있어서 물어보러 갔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아이가 글을 읽질 않습니까?”
“뭐냐? 니 모르는 것을 그아이에게 물었단 말이냐?”
“예. 삼척동자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 하였습니다. 저는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저보다 나은 것은 배우려하는 사람입니다. 한데….”
“헌데?”
“그 아이의 방에서 이걸…주웠습니다.”
금파가 손바닥을 펼쳤다. 노란 비단술 한 가닥이 늘어져 있었다.
“이, 이게 무엇이냐?”
“저도 처음엔 몰랐습니다. 자세히 보니 비단실로 꼰 술이었습니다.”
“비단술?”
“예. 그 아이에게 비단술이 있을 턱이 없기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살펴보니 글쎄….”
“멈추지 말거라. 어서 말을 해라.”
급해지는 마음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글쎄 말씀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이랑 비슷한 것이 서랍밖으로 삐져나와 있질 않겠습니까? 그래 저것이 무엇이냐 물었떠니 하도 당황을 하기에.”
“당황하더란 말이지?”
“예. 좀 이상하다 싶어 보여달라 하였지요. 볼 이유 없다며 막더군요. 분명 무슨 비밀이 있다 싶어 제가 억지로 서랍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서랍안에….”
눈을 감았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내 그토록 믿고 싶었던 것이 허사로 드러나고 마는구나. 그래도 침을 꿀꺽 삼키고 자중하여 물었다.
“서랍 안에 비녀가 있더란 말이냐?”
“예. 그랬는데 다욱 가증스런 건 그 아이의 태도였어요. 주머니를 꺼내 비녀를 보여줬더니, 왜 그게 여기 있지? 이러는 겁니다.”
등줄기를 타고 서릿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사지가 허물어져 내리는 것도 같았다.
“참으로 깜찍한 년이예요. 재물에 잠시 눈이 어두워 손을 댔으니 모른 체 해 달라고 빌고 부탁했으면 새벽부터 주인님께 이런 말씀을 드리진 않았을 겁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지가 그런 말만 안 했어도 눈감아 주었을 거란 얘기지요. 앞으론 이런 짓 하지 말라 따끔하게 이르곤 비녀를 주인님 처소에 갖다놓았겠지요. 손버릇도 손버릇이지만 천연덕스레 거짓말을 하는 것이 너무 놀라 이렇게….”
설마 설마 했던 일이 빼도 박도 못할 사실이라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정녕 비녀함에 발이 달려 그 아이의 방으로 걸어갔을 리 없을 터, 그것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인지. 재효는 역류하는 듯한 감정을 누르고 조용히 일렀다.
“일러주어 고맙구나. 하지만 이 일은 아무한테도 발설치 마라. 물론 그 아이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금파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래야지요. 실은 그 아이도 사정사정했답니다. 이 이야기를 주인님께 비밀로 해 주면 앞으로 제 수족처럼 지내겠다 싹싹 빌기까지 했지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력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그런 몹쓸짓이 몸에 밴 아이인 줄도 모르고 저를 내 몸인 듯 품으려 했다. 지천명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사람 보는 눈이 이리 어두웠다니.
등 뒤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재효는 텅 빈 듯 그 자리에서 꼼짝 할 수 없었다.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