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소릿고#19

-제3장 서러움의 길(2)

by 취중진담

발행일:2026. 01.12 pm8:00


<전편노트>

다시는 여인을 내면으로 들이지 않겠다 했던 재효는 자신의 두루마기를 지어오는 채선을 마주하여 속절없이 흔들리는 스스로를 인지하고 짜증이 난다.

그러면서도 죽은 마지막 아내의 단 한 점 유품인 옥비녀를 떠올리곤 그 비녀가 제일 어울리는 사람이 채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곤 결국 채선에게 그 비녀를 보여주는데…


제3장 서러움의 길(2)


사라진 옥비녀

엄사안과의 짧은 시간은 먹장구름 속에 드러난 한 가닥 빛이기에 충분했다. 그렇다고 그가 딸 잘라서 무엇인가를 조언한 것은 없었다. 오랜만이니 소리나 한 자락 나누자고 했고, 기꺼이 응했고, 둘이 잔설 위에 앉아 두드리고 토하고 춤추다 목이 타면 곡차 한 잔 나누다가 옛 이야기에 빠져들었을 뿐이다.

그 시간 속에서 재효는 자신에게 흐르는 피를 본 것인데 자신의 피는 천상 광대의 피라는 사실이었다.

광대는 광대와 어우러지다 죽어 쓰러져야 광대다. 광대가 되어 될 성부른 새끼를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은 이 생에 와서 해야 할 몫을 하지 않는 것이나 진배없음도 깨달았다.

도솔산 붉디붉은 동백은 스스로 피는 것이 아니라 바람과 물과 햇빛이 골고루 스치고 빨아들이고 쬐어야 터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재효는 자신의 마음을 채선에게 솔직히 전하리라 결심했다. 내 때가 되면 이 비녀를 너의 머리에 꽂아주고 싶다고.

아내라는 이름이 아니어도 어떠랴. 소리에 대한 열정과 혼을 모두 불어넣으면 될 것을.

그렇지만 죽은 아내를 가슴에 품고서는 그 아이에 대한 우롱이 될 것이다. 그 아이의 모든 것,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이 합일되지 않고서야 아니 될 일이다.

아내의 비녀를 물으리라. 언제가 이 비녀를 너의 머리에 꽂아주려 한다, 어찌 생각하느냐?

장롱문을 열던 재효는 우뚝 멈춰섰다. 비녀를 넣어둔 오동나무함이 보이질 않았다. 지난 날 귀히 보관하라는 아이의 조언을 따라 인근에서 최고로 솜씨 좋은 소목에게 부탁해 만든 보물함이다. 노란 술린 달린 비녀주머니는 그 오동나무함에 넣어 장롱 깊은 쪽에 넣어 두었다.

재효는 장롱 속 다 헤집어 오동나무함을 찾았다.

없었다.


“밖에 누구 있는가?”


온갖 옷가지들을 늘어놓은 채 소리쳤다.


“누가 있느냐 묻질 않는가?”


뒤란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발자국소리가 들렸다.


“예, 예. 호장어르신.”


“가서 할멈을 데리고 오게.”


“예, 그리합지요.”


행랑아범이 달려가고 다시 고요해진 공기 속에 재효는 풀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그 아이였다. 그 아이가 아니고서는 비녀가 든 오동나무함의 소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착각을 한 건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아이뿐이었다. 그러자 몹시 불쾌해졌다.


“서방님은 이 늙은이가 살아 있는 것이 눈꼴시러우? 이 눈길에 어딜 갔다가 이제 온 것….”


언제 왔는지 망구할멈이 지청구를 넣으며 방문을 열다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들을 보더니 입을 딱 벌렸다.


“아이고, 서방님! 걸레조각도 함부로 던져두지 못하게 하는 양반이.”


세상에 없던 일이라는 듯 망구할멈이 달려 들어왔다.


“마른 하늘에도 벼락이 치는구만요.”


망구할멈이 방을 정리하는 동안 사지를 늘어뜨린 채 허공을 바라보는 재효를 향해 망구할멈이 물었다.

“말해 보시우, 나 모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할멈. 나 없을 때 이 방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우?”


“누긴 누랴. 금파쥬.”


그랬다. 망구할멈이 해 오던 방청소를 언제부턴가 금파가 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있으나 없으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역시 오해였단 말인가.


“왜 그라요. 방에 뭐가 없어졌수?”


역시 노회한 망구할멈이었다.

재효는 대답않고 다시 물었다.


“또 누가 들어왔수.”


“글쎄올시다. 서방님 없을 때야 들어올 사람이 금파밖에 더 있겠수?”


꾹 다문 입술 속에 자신에 대한 연심을 강단있게 머금고 있던 금파도 비녀의 소재를 알았다면 탐을 낼 만했다. 단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금파가 자신을 주인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쯤이야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없을 때 방에 들어온 사람이 정녕 금파뿐이란 말이우?”


“뭐, 그렇지요 뭘.”


그러다 망구할멈이 이마주름을 짙게 접었다.


“아 참! 딱 한 번 그 아이가 방소재를 하긴 했수.”


“그 아이?”


“그 아이 말이우.”


망구할멈은 금파가 심한 고뿔에 들었기에 청소 그거야 하루 안 하면 어떠냐고 했는데도 기어이 그 아이를 시켜 하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재효는 사지로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했다. 어찌 그 아이에게 그런 나쁜 손버릇이 있었단 말인가.

재효는 가까스로 기운을 수습하고 다시 밖을 향해 소리쳤다.


“아범은 어서 가서 그 아이를 데려오게.”


언성을 높여 이른 재효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망구할멈이 퉁명스레 내뱉었다.


“이 늙은 것이 고만 죽을 때가 되었나 보우. 어째 서방님의 속을 하나도 더듬을 수가 없는지 원.”


평생의 정인으로 여겼으나 취첩하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의지를 읽어낸 후 그림자처럼 지내온 어머니 같은 여인이다. 자신을 자식처럼 돌보았고 자신 역시 어머니라 여기고 의지하였던 노인이다.

재효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간 일어났던 일들을 죄다 털어놓았다.


“서방님이 아무리 나이 먹어도 사내는 사내니 이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겠수? 헌데 말이우. 내 보기에 비녀함 일은 아닌 것 같수. 그 아이가 그럴 아이는 아닌 듯 하거든.”


할멈의 밝은 촉을 모르지야 않지만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수 있는 법.

그러나 재효는 속에서 일어나는 짜증을 숨기고 싶지도, 숨기지도 않았다.


“그럼 금파라 생각하우 할멈은?”


“꼭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서두.”


망구할멈이 골똘히 생각하다 고개를 갸웃했다.


“설사 그 아이가 그랬다 칩시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그것을 가져가서 무얼 한단 말이우? 갖다줄 어미아비가 있수. 그렇다고 자식이 있수. 여기서 제가 그걸 꽂고 다닐 수도 없는 걸.”


탐욕은 모든 죄의 근원이다. 거짓말을 부르고 시기를 부르고 모함을 부르고 죽음까지 부를 수 있다. 그러므로 탐욕을 버리고 정직하게 살아야 악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

아무리 욕심이 나도 주인 있는 물건을 탐내지 마라. 설사 그것이 도둑질한 물건이라는 걸 알아도 탐내지 마라. 도둑의 물건을 가지면 그 도둑을 더욱 도둑답게 할 것이요, 나 또한 도둑이 될 것이다.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은 재효의 성장과정에서 삶의 철칙이 되었다.

그러므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아내의 비녀를 정말로 그 아이가 가져갔다면 집안에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 나라 최고의 창자로 키워내겠다는, 그리하여 고통받는 이웃들의 웃음이 되고 위로가 되고 나아가서 희망이 되게 하겠다는 바람은 다 부질없음이 되어 버렸다.

어느 결에 슬그머니 마음 한 편을 차지해버린 아이, 지워내느라 뼈가 부서지고 살이 흘러내려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섣불리 판단해서 안 그래도 불상한 거 더 불쌍하게 만들지는 마시우.”


눈빛만 봐도 속을 읽어내는 노인이다. 자신의 마음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이 생각들이 어디까지 진행되는지 환하게 꿰뚫고 있는 듯한 망구할멈의 말에도 재효의 마음은 이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채선이 온 건 한 식경이나 지난 후였다. 빨래를 했는지 둥둥 걷어올린 소맷자락 끝에 물기가 축축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나리?”


벌겋게 언 손을 보자 잡아끌어 앉히고 싶었다. 차갑게 언 손을 아랫목에 놓게 하고 자신의 부드러운 손으로 얼어터진 손등을 덮어주고 싶었다. 집 비운지 겨우 보름이다. 그간 얼굴이 더욱피어나 있었다.


-이런 아이가 어찌….


그러면서도 이 아이 아니고는 그럴만한 사람이 없다는 쪽으로 마음의 가닥이 잡혔다.


“그래, 어찌하여 너는….”


“예?”


“아, 아니다.”


반가운 마음과 괘씸한 마음이 뒤엉기는 스스로가 미웠다. 재효는 도시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가 없었다.


“원, 무슨 사설이 저리 긴지.”


눈을 끔뻑거리며 멀거니 서 있는 채선과 초조한 빛을 역력히 드러내는 재효를 번갈아 쳐다보던 망구할멈이 끌, 혀를 차고는 나가버렸다.


“가신 일은 잘 되었는지?”


채선이 어색함을 떨치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재효는 엉엉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도 사심을 내는 것은 위험하고 또 위험한 일이었다.


“내 한 가지 물으마.”


“예, 나리.”


“내 출타 중에 니가 이 방에 늘어온 적이 있느냐?”


“예. 딱 한 번 들어온 적이 있어요.”


“무엇을 하러?”


채선은 뜬금없는 물음에 얼른 답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어서 말을 하여라. 이 방에 무엇을 하러 들어왔느냐?”


“금파…언니가요.”


“고뿔에 걸렸으니 너더러 내 방을 소제하라 하였느냐?”


“예.”

“정녕! 정녕 소제만 하고 돌아갔다는 말이냐?”


재효는 조급해졌다. 소제만 하고 돌아갔다는 말을 어서 듣고 싶었다. 자신 안에서 회오리치는 미친 듯한 감정을 서둘러 잠재우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아니라 믿고 싶은 쪽으로 고삐를 잡아당겼으나 말은 엉뚱하게 나와 버렸다.


“재물이 필요했느냐?”


“예?”


채선의 눈꺼풀이 몇 번 꿈뻑거리다 위로 밀려올라가 멈추었다. 시선을 외면하며 다시 물었다.


“재물이 필요했느냐 물었다.”


“나리!”


“필요할 수도 있었겟지. 아무리 혼자 몸이라도 재물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호장 어르신! 저는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소리를 낮춰 말했다.


“더 들어라. 너는 나를 살려준 은인이다. 필요한 재물이 있다면 내 얼마든지 줄 것이라 생각했다. 기억을 되찾아 집으로 갈 때면 다섯 수레를 못 주겠느냐, 열 수레를 못 주겠느냐? 그런 너인데 어찌하여 그것에 손을 댄단 말이냐?”


이러려던 건 아니었다. 자신의 입에서 왜 이런 말들이 쏟아져나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멈추어지질 않았다.


“비녀 말이다. 네가 함을 만들어 보관하라던 그 비녀!”


채선의 얇은 눈두덩이가 파르르 떨었다. 그러니 마구 밭아낸 자신의 말들이 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빨리 대답을 하여라.”


“니녀가 어찌 되었기에요.”


“뭘 묻느냐? 너의 수중에 이미 들어가 있을 것을.”


채선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고선 말했다.


“그것을 제가 훔쳤다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냐?”


재효의 목소리에 일순 냉랭이 묻어났으나 채선은 개의치 않았다.


“다시 찾아보십시오. 나리도 아시다시피 그 비녀를 나리께서 얼마나 중히 여기시는지 제가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 비녀를 어찌….”


꼬리를 감추는 말 끝에 울음기가 묻어났다.


-너무 과민했던 걸까? 아니다. 열길 물속보다 깊은 것이 한 길 사람속이라 했다. 이 아이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인가. 핏 속 깊이 도둑의 종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 나는 그간 이 아이의 눈물에서 내가 믿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찾아내려 했었는지 모른다.


복잡한 심경을 가늠하는 사이 멀리 있던 순라꾼의 딱따기 소리가 한결 가까워지고 있었다.


nx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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