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소릿고#23

-제 3장 서러움의 길(6)

by 취중진담

발행일:2026. 02.09 pm8:00


<전편노트>

옥비녀를 훔친 도둑의 누명을 쓰고 동리정사에서 나온 채선은 막상 갈 곳이 없었다. 억울함에 마구 쏟아낸 원망어린 말들을 후회하며 동리정사가 내려다보는 모양산성으로 올라갔다. 그러던 중 경비를 돌던 나졸들에게 들키고 어려운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고심하던 끝에 자기는 해남에서 온 소리꾼 지망생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결국 나졸들에게 의해 소리를 하게 되고 그 일로 다시 동리정사로 갈 기회를 잡는다.


제 3장 서러움의 길(6)


후회2

채선을 내쫓고 잠자리에 든 재효 역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아이가 비녀함을 가져갔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고, 너무나 천연스레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믿을 수 없고, 얇은 살피와 미혹하는 이목구비 속에 또 다른 인격을 숨겨놓았다는 것이 믿을 수 없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쌓인 이 밤에 어리디 어린 처녀를 밖으로 내쳤다는 게 편치만은 않았다. 어쨌거나 저승의 문을 열려던 나를 잡아 이승으로 데려다 준 은인이 아니냐. 밤거리를 헤매다 어느 불한당에게 잡혀 몸을 더럽히지는 않는지, 기억에도 없는 부모를 찾느라 얼어터진 입으로 어머니 아버지를 부르고 있지는 않은지. 필경은 야차같은 놈들에게 붙잡혀 주색가로 팔려가고 말리라.


“그 목청! 그 좋은 목청은 어쩌라고!”


구름을 휘몰고 가는 매처럼 힘차고 기상서린 목청이 개처럼 취한 자들의 귓구멍이나 즐겁게 해 줄 것을 상상하니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낭패로다. 낭패로다. 한 번 내쳤으면 잊어버려야지. 모질지 못한 이 심사가 낭패로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자꾸만 떠오르는 채선에 대한 잔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내 저의 목청을 원껏 트이게 해주고 쫓아내도 냈으면 좋았으련만. 내 집을 스쳐간 소리꾼이 몇인가. 그 많은 소리꾼 중에서 그 같은 목청을 가진 이 있었던가.

한 때는 날치의 목청에 귀멀고, 창록의 목청에 눈 멀고, 만순의 목청에 흐르는 피가 멈추었으나 그 아이의 목청에 비할 바 아니었다. 가느다란 목덜미 어디에 그토록 울울한 서애를 달고 있는지, 한 움큼도 안 되는 배꼴 어디에 그런 웅장한 소리통이 둥둥 떠도는지 잊으려 해도 자꾸만 귓속을 맴도는 소리에 등짝이 들썩거렸다. 제가 구름이라면 나는 바람이 되어줄 것이고, 제가 피지 못한 꽃몽오리라면 나는 햇볕과 물이 되어줄 것이어늘, 어찌 그런 몹쓸 손버릇을 가지고 있단 말이냐. 금파라면 그럴 수 있다. 금파라면 그것을 내 방에서 치워비리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모른 척 하고는 있었지만 아내 살아생전부터 나를 사내로 품었으니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그것이 여인네의 소견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재효는 벌떡 일어나 앉았다.


“혹여 그 아이도 나를?”


잔설이 발하는 빛이 밀려들어왔다. 재효는 저만치 엎드려 있는 모양산 등성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평시에는 뒷마당 가득 꾸며놓은 정원이거니 싶었던 모양산이 아득히 멀기만 했다. 모양산 허리를 기어가듯 이어진 성벽 또한 힘겨워 보였다. 품은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사내를 기다리다 죽은 여인의 혼령이 구곡의 산길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내가 무슨 망령된 생각을…”


자조하며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집안은 모두 불이 꺼진 채 깊은 침묵 속에 잠겨 들어 있었다. 걸음이 절로 우물쪽을 향했다. 우물물 한 바가지 길어올려 타는 목을 적시다가 하얀 눈 속에 드러난 동백꽃 몽오리를 바라보았다. 얼마나 견뎌야 꽃이 될 너이냐. 떨치자 싶은 그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재효는 우물을 뒤로 하고 휘적휘적 걸었다.

석가산을 끼고 도는 물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가 연지정으로 올랐을 때였다.


“고집도 참말로 고래심줄이여. 멀쩡한 처자가 거기서 그렇게 얼어죽겠다는 거여, 뭐여?”


동문쪽에서 사내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 귀에도 배나졸임을 알 수 있었다. 또 누군가 소리를 배우겠다며 내 집 앞을 서성이다 순라 돌던 배나졸의 눈에 띈 모양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직접 가서 만나보았을 일이나 오늘은 그러고 싶질 않았다.

연지정을 내려와 연못을 들여다보니 구름이 반나마 걸린 달이 얼음으로 덮힌 연못 속에 갇힌 듯 떠 있었다.

“저 얼음연못은 내 심사요, 빠진 달은 그 아이의 심사라.”


이 추운 밤에 어딘가에서 떨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면 누군가를 받아들여 뜨신 방을 내어줄 수가 없었다.

“그라마, 우리 집에라도 가자. 너도 보다시피 모두 잠이 들었지 않느냐? 아침까지 이러고 있다가는 얼어죽고 만단 말이다.”


심지가 한결 같아서 한 번 마음을 쏟은 사람에겐 웬만해서 등을 돌리는 법이 없는 배나졸을 애태우게 하는 저 자는 참으로 운 좋은 사람이로다. 사람이 한도 없이 좋아서 밤길 잃은 사람들을 많이도 데려다 재우면서도 생식 한 번 내는 법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눈에 뜨였으니 이 밤, 얼어서 떨지는 않을 터이다. 재효는 배나졸도 배나졸이려니와 넉넉한 품성을 가진 그의 안사람을 떠올리며 등을 돌렸다.


“이 늙은 것이 딸 같은 널 잡아먹을까 봐 그려냐? 그런 걱정 말고 어서 일어나거라. 계속 그러고 있으믄 얼어죽는다잖냐?”


딸이라?

재효는 동문을 향해 휙 돌아섰다. 더벅머리 총각이나 사내가 아니고 처녀란 말인가? 성큼성큼 동문을 향해 걸어가며서도 밖에 있는 처녀가 그 아이였으면, 하는 스스로가 애처러웠다.

대문의 빗장을 열자, 배나졸이 놀라 달려왔다.


“호장어르신, 이 야심한 시각에 어찌.”


“누군가?”


“예. 새파랗게 젊은 처자가 성벽에 기대 떨고 있길래 데리고 왔습니다.”


배나졸이 뒤를 돌아보며 손가락을 가리켰다.


“어? 어?”


“왜 그러는가?”


“저기 분명 있었는데?”


재효는 빠르게 대문 밖으로 달려나왔다. 순간, 담모퉁이 뒤에서 자박거리며 멀어져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그 아이의 걸음임을 알 수 있었다. 달려갔다. 보자기를 안고 모롱이를 돌아가는 뒷모습은 분명 채선이었다.


“자네는 그만 가 보게.”

“예?”


몰랐으면 몰라도 도망가는 아이를 보고서도 그냥 가보라는 말이 영 의외라는 듯 배나졸이 물었다.

“사정은 나중에 말할 것이야. 그러니 자네는 그냥 돌아가게. 내 차후에 자네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으니 그때는 거절치 말고.”


고개를 갸웃하며 배나졸이 사라지자 재효는 채선을 뒤쫓았다.

빨랐다. 구름 속으로 숨어버린 달처럼 소리없이 빨랐다. 서문을 지나 북문 쪽으로 내달리는 아이를 쫓으며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이대로 놓치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조바심이 복받쳤다. 큰 소리로 부르고 싶었다. 이름도 모르는 아이를, 제 이름은 오직 광대라던 아이를 목놓아 부르고 싶었다. 후회스러웠다. 그동안 부를 이름 하나 지어주지 않은 것이 참으로 후회스러웠다. 진작 이름하나 지어주어 이 야밤에 고창고을이 떠들썩하니 부르다 손가락질을 받아도 좋으련만.

“제발 좀 보여다오, 제발.”


거의 울먹거리다시피 담장을 따라 걸어 북문 가까이 왔을 때였다. 빨래터 쪽으로 희고 작은 그림자 하나가 터벅터벅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너냐?”


검불을 헤치고 뛰어내려가 실버들을 걷었다. 언 실버들 줄기가 손바닥을 차게 때렸으나 아픈 줄도 몰랐다.

“너라면 거기서 멈추어라.”


그림자는 멈추지 않고 얼음이 낀 물길 쪽으로 달려갔다.

저 징검돌을 건너가겠다는 뜻인가?

아이가 천을 건너가버리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안함에 더욱 크게 소리쳤다.


“멈추어라, 미끄럽다.”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그림자도 놀랐는지 일순 멈추는가 했는데 또 팔짝 건너가기 시작했다.

재효는 소리쳤다.


“정녕 갈 터이냐? 가려면 내 한 마디만 듣고 가거라. 니가 오늘밤 그 냇물을 건너간다면 나는 세상에 없는 사람일테니 너 다시는 나를 볼 수 없을 것이다.”

빨래터 한가운데쯤까지 간 그림자가 징검돌 위에 우뚝 섰다. 그때였다. 멈춰선 그림자가 불안해 보이는가 했는데 중심을 잃었는지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안된다. 중심을 잡아라!”


재효는 필사적으로 달려 징검다리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징검돌을 겅중겅중 뛰어 가까스로 당도했을 때는 재효 자신도 중심을 잃고 말았다.

“잡아라! 나를 꼭 잡아!”


그러나 둘은 중심을 잃은 채 한 몸이 되어 허공으로 날았다.

그 짧은 시간동안 재효는 보았다. 자신의 품 속에 안긴 채 차디찬 물 속으로 곤두박질 치는 아이의 눈속에 출렁이는 깊고도 둔중한 슬픔을!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몸짓으로 속을 숨겨도 눈빛만은 숨길 수가 없는 법이다. 아이의 눈 속에는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출렁거리고 있었다.

풍덩!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속으로 내던져진 순간, 재효는 모든 기억을 씻어내버렸다. 오십을 넘게 살아오며 덕지덕지 엉겨붙었던 몹쓸 기억들을 뼛속까지 씻어내었다. 네 명의 아내를 잡아먹은 저주받은 팔자라는 기억도, 죽은 아내의 옥비녀를 가져간 사람이 바로 품 안에 든 이 아이라는 기억도 모두 씻어버렸다. 아리도록 차가운 얼음물 속에서 그간 얼룩지고 한스러웠던 모든 기억을 씻어내어, 할퀴고 상처 난 이 나라 조선에 새 살을 채우는 작업만이 자신에게 남았음을 아프게 자각했다.

next….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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