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장 시련의 길(1)-
발행일:2026. 02.16 pm8:00
<전편노트>
옥비녀를 훔친 누명을 쓰고 쫓겨났던 채선은 우여곡절 끝에 재효를 다시 만나지만 차마 자신을 드러낼 수 없어 도망을 간다.
도망가는 채선을 쫓아가다가 고창천을 건너는 징검다리 위에서 채선을 만난 재효는 미끄러운 디딤돌 위에서 중심을 잃고 채선과 함께 차가운 물 속으로 빠지고 만다.
그 순간, 그간의 모든 기억을 버리고 채선과 함께 예술과 사랑의 길을 가리라 다짐한다.
제 4장 시련의 길(1)
석파란
오백년 역사의 조선은 나아갈 방향을 잃고 흔들렸다. 러시아와 일본으로 편이 갈리고, 개화와 쇄국으로 편이 갈리고, 새 것과 헌 것으로 판이 갈렸다. 종친은 종친대로, 양반은 양반대로, 노비는 노비대로 나랏님이 자신들을 보호해주리라는 기대를 저버린 채 제 살길을 찾아나섰다. 나랏님은 결코 백성을 책임지지 못한다며 저마다 각자도생을 위해 눈알이 벌갰다.
그런 수많은 악재 속에서도 희망의 빛은 있었다. 양반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실시한 호포제가 성공조짐을 보인 것이다. 빈사상태에 빠졌던 나라 재정이 조금씩 호전되어 갔고 호포제 성공에 힘입은 흥선은 내친 김에 비변사 기능을 축소하여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가의 목을 죄는데도 성공하였다. 그간 골육을 빨렸던 농민을 위해 사창제를 실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꿈은 점점 커져갔다.
커진 꿈은 경복궁 중건으로 이어졌다. 경복궁 중건이야말로 나라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일이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흐트러진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왕실 뿌리를 튼튼히 하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려 하니 백성들은 직분에 맞게 동참하기 바란다는 방을 바람벽마다 나붙었다.
백성들은 흥선을 치사했다.
“궐이 떠억하니 서야 나라의 뿌리가 탄탄한 게야. 그러니 우리도 자진해서 부역을 나가세. 우리 세금을 줄여준 양반이니 도와야지 않겠나?”
호포제와 사창제의 직접적 수해자인 백성들이 너도나도 부역을 자청하고 나섰다.
“어쩌겠나. 무리인 줄이야 알지만 우리라고 나 몰라라 할 수도 없고.”
망설이던 일부 종친들도 기꺼이 재원을 내놓았다.
“우리들 별 수 있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원위 대감이 하려는 일 아닌가. 생떼 같은 세금을 거둬가는 것이 괘씸키야 하지만 한다면 하는 양반이니 모른 척하고 있다간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르지 않겠나?”
울며 겨자를 먹던지, 웃으며 연시를 먹던지간에 주어진 할당에야 당할 재간이 없었다. 원납전 명부에 기꺼이 도장을 찍었고 숨겨놓았던 당백전도 내놓았다.
백성이란, 이끌면 이끄는대로 따르게 되어 있는 족속들이다. 하지만 고마웠다. 그러하니 나도 그들을 위해 이 한 몸 불태워야 한다. 흥선은 몸을 사리지 않는 부역자들을 위해 어식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소리마당을 열어 노고를 위로했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던 어느날이었다.
공사장에 큰 불이 났다.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던 건축물은 순식간에 무너져내렸고 준비해두었던 모든 재목들이 숯덩이로 사라져버렸다.
흥선은 절망했고 백성들은 좌절했다. 모두들 경복궁 중건은 없던 일이 될 거라 여겼다.
포기할 대원군이 아니었다. 일에 무리가 따르면 반드시 부작용이 생기는 법. 다시 공사를 시작하려니 전보다 더 많은 재원이 필요했다.
백성을 부리는 일에 있어 신중을 다할 것.
조정 고관에서부터 지방수령까지 실력에 따라 재원을 보탤 것.
자진 원납하는 양반들에게는 관작을 내리고 포상할 것.
전국 종친들에게도 자진 협조를 요청할 것.
이러한 애초의 취지는 사라졌다. 사라진 목재를 마련하기 위해 양반들의 선산이나 성황당 나무가 베어져나간 것은 물론, 원납전은 강납전 성격인 결두전으로 징수되었다. 뿐만 아니었다. 도성문을 출입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문세門稅가 매겨지더니 급기야 기존 엽전보다 백 배나 값어치가 높다는 당백전이 발행되었다.
당백전은 처음 목적과는 달리 원활히 유통되지 못했다. 대부분은 재력가들의 금고로 들어가 나올 줄 몰랐다. 나라의 재원을 마련하려 했던 애초의 취지는 간 데 없고 재력가들의 배만 한정 없이 불리는 결과로 변질되고 말았던 것이다. 가진 자는 더욱 배가 부르고 가지지 못한 자는 더욱 궁핍해지는 악순환이 이어졌다. 원성이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재효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끊임없이 재원을 요청해오는 사이사이 창자들을 차출해 보내줄 것을 요구하는 전갈이 쇄도했다. 오랜 부역에 지친 사람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려는데 노래가 빠질 수 없다는 이유를 거절할 명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보낼 수 있는 한 다 보냈다.
그러나 최근에 온 요구는 질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 나라 최고 명창이어야 한다고 했다.
굳이 그래야 할까?
재효로서는 종내 이해되지를 않았지만 그 또한 지엄한 명이었다. 거절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 일을 어찌한다….”
연지정에 올라앉은 재효는 고민에 빠졌다.
“뭘 그렇게 고민하십니까, 영감.”
어느새 왔는지 세종이 계단 밑에 서 있었다.
“올라와 앉게.”
세종의 얼굴은 축이 많이 나 있었다. 경복궁 중건이 시작된 후 몇 번이나 한양을 다녀왔는지 모른다. 거기에다 사방에서 불러대는 소리판에 창자들을 데리고 다니며 모자랄 땐 스스로 한 대목을 맡아야 하니 천하에 세종이라도 축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또 누굴 보내나 생각하고 있었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세종의 한숨도 전에 없이 깊었다.
연잎 위에 올라앉은 청개구리 한 마리가 두 사람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연못 속으로 폴짝 뛰어들었다. 재효는 자신도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었다. 배나졸에게 부탁해놓은 아이를 몰래 데리고 심심산골로나 숨어들어 북이나 두드리고 노래나 들으며 세상을 잊고만 싶었다.
사는 일이란 보이지 않는 끈과, 끈에 묵여 버둥거리는 행위다. 한 때는 조선 최고 풍류가였던 대원군과 호형호제하며 청루가를 휘저었다. 그 끈으로 살았고, 그 끈이 있음으로 자신도 있다고 여겼다.
바보같은 생각이었다. 세상사 변치 않은 것 없고, 변화가 주는 관계에 따라 죽음도 불사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제 생각에는 아무래도 금파뿐인 듯합니다만.”
세종의 말에 재효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금파를?”
“예. 모험을 한 번 해 보시지요. 모 아니면 도가 될 겁니다.”
세종의 말은 맞다. 아직 이 나라에서 계집을 예인으로 키운 이는 없다. 소리나 춤이 귀격이라 해도 그저 계집일 뿐이다. 사당패를 따라야 했다. 그런데 자신이 키운 최고의 창자라며 금파를 보낸다면 대원위대감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미지수였다. 그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 나라 소리판이 완전히 달라질 수도 있다. 배나졸 집에 머물고 있는 아이가 떠올랐다.
뭔가 희망적인 느낌이 들었다. 막장에 처박힌 절망 속에서 빛을 보았다고 할까. 이번에 금파를 보낸다면 여자소리꾼을 대하는 대원군의 반응을 살필 기회가 될 것이긴 하다. 며느리 일로 여자에 대해 더욱 마음을 닫아버린 양반이니 금파를 대표 소리꾼으로 보내는 것은 일견 위험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외려 잘된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 멀쩡한 아이를 도둑으로 몰아붙이고도 태연히 밥을 먹고, 글을 읽고, 소리공부를 하는 금파를 명분 좋게 내칠 수 있는 기회가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 속이 어찌 이러누
재효는 머리를 저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영감?”
혼잣생각에 젖어 중얼거린 것을 세종이 놓치지 않고 물었다.
“아, 아니네.”
옹졸한 마음을 스스로 질타하는 속을 세종이 알 까닭이 없었다.
“금파라, 금파라….”
오래 풀지 못한 숙제를 풀 실마리이긴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찜찜한 것도 사실이었다. 금파의 소리실력이라면 대원군 귀호사야 넘치겠지만 눈이 문제될 소지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왜요, 보내기가 싫으십니까?”
“싫기야 할까마는….”
흔쾌치 못해하는 재효를 쳐다보던 세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석파란 한 촉이면 어떨까요? 금파의 추색을 삼키고도 남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석파란?”
“예. 이번에는 소리채 대신 석파란 한 촉만 주십시오, 하면 그 분이 좋아하지 않을까 해서요. 나라살림이 오죽해야지요.”
“그러니 색이 좀 빠져도 어떻겠냐는 말인가?”
“그렇다고 그분께서 빈손으로야 돌려보내겠습니까? 말이라도 그렇게 해 주니 고맙다 하시겠지요.”
세종의 웃음이 의미심장하다 느꼈지만 재효는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것까진 챙길 정신적 겨를이 없었다. 딴엔 수지맞는 장사일 수 있다. 풍류를 아는 조선여인치고 제 속치마에 석파란 한 촉 그려넣고 싶지 않은 이 없을 것이다. 금파라고 다르지 않을 터, 금파를 보내어 석파란 한 촉 얻어온다면 명분으로도, 실리적으로도 밑지지 않을 것이다.
“허락하셨다 생각하고 당장 준비를 하라고 이르지요.”
연지정을 내려가는 세종의 뒷모습이 전에 없이 들떠 있는 것 같았다. 제가 끼고 키우겠다 호언한 아이가 사라졌는데도 궁금해 하지 않는 속도 참 모를 일이다. 무슨 상관이랴. 지금은 심신이 너무 피곤하다.
재효는 정자 난간에 등을 대고 기대앉아 길게 한숨을 뿌렸다.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