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시련의 길(2)
발행일:2026. 02.23 pm8:00
<전편노트>
채선을 배나졸집에 맡겨두고 돌아온 재효는 대원군 이하응의 서찰 한 통을 받는다. 첫 경복궁 중건을 실패하고 재도전을 하는 사이 나라의 재정은 말이 아니었다. 첫 중건공사 때는 기꺼워 하던 국민들도 재중건 때는 불만이 커져갔다. 그러한 가운데 대원군도 강제적 징수를 하게 되고, 부역 역시 강제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부역자들의 위로와 창력을 위해 소리꾼을 보내곤 했는데 이번에는 최고의 명창을 보내라는 서찰이었다.
이에 재효는 금파를 염두한다.
제4장 시련의 길(2)
석파 흥선대원군 이하응
겹쳐진 쌍까풀이 깊디깊은 눈매엔 어느 먼 땅에 혼을 부려놓은 듯 때때로 텅 빈 우수가 드리운 외모의 흥선대원군 이하응.
그래서 더 깊고 어두워 보이는 인상을 가진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어머님의 첫 기일이었다.
한양시절이었던 그날, 아버지 광흡이 급한 전갈을 가지고 고창으로 내려간 뒤 홀로 아머님 제상을 차려놓고 앉았으나 달은 밝은데 야속히도 귀뚜리까지 울어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에 가슴이 사무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서둘러 이른 제사를 지내고 집을 나왔다.
북촌의 저자는 여느때처럼 흥청거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깔깔대는 여인네소리, 취해서 혀가 고꾸라진 사내들의 호기가 질펀한 취기에 섞여 밤공기를 물들이고 있었다.
한데, 그 흥청거림이 전에 없이 편했다. 이도 저도 아니어서 이에도, 저에도 속할 수 없는 중인이란 태생적 한계를 타파하기 위해 하나 있는 아들을 끊임없이 질책하던 아버지가 업ㄱ는 한양의 밤은, 정제되지 않는 객기를 부리기에 더 없이 좋았다.
어느 여인이든 좋다. 안기고 싶구나. 살품 철벅한 여인의 품이면 어디든 좋을 것 같았다. 어머니처럼 늙은 퇴기를 찾아 온밤 내 젖무덤을 헤치며 웃어도 보리라, 울어도 보리라 자못 객기를 부리며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살대 부러진 용수를 고깔로 씌운 홍등, 은은히 북은 빛을 발하는 어느 주가 앞에서 발을 멈추었을 때였다. 포릇한 갑사도포를 입은 사내 하나가 마주오다 재효를 보곤 걸음을 떡 멈추었다. 차려 입은 입성으로 보아 난다하는 집안 도령이겠으나 양태아래 숨긴 거무죽죽한 웃음기엔 무언가에 대한 야유와 불만이 검푸른 꽃잎처럼 피어 있었다.
네 놈은 운좋아 부러울 것 없는 명문가에 태어났겠으나 꿈도 야망도 희망도 없는 빈쭉정이 망나니로세.
사내는 그러한 재효의 속내를 꿰뚫어나 보듯 큼큼한 눈빛으로 머리에서 발끝을 훑어내리곤 만개한 매화 위로 벌 나비 날아드는 그림이 박힌 대문 안으로 휙 들어서서는 소리치는 것이었다.
“진주야! 우리 진주 있느냐? 서방님 오셨다 어여 나와 모셔라 진주야!”
그 호방한 목소리는 족히 십여 리를 휘감고도 남음이 있음인데 안에서는 쥐도 새도 끽 소리가 없었다. 사내는 껄껄 한바탕 더 터뜨리고는 다시 소리소리 질러댔다.
“아, 이년아. 그 사이 귀가 먹었느냐? 서방님이 오셨다지 않느냐. 냉큼 나와서 서방님 뫼시지 않고 뭘 꾸물거리느냐?”
닫혔던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늙은 기생 하나가 튀어나와서는 팔짱을 끼곤 이죽거렸다.
“얼씨구? 오늘 또 한양 술개님이 납시셨구만.”
천하디 천한 퇴기 주제에 어찌 저런 망발을 하는가 싶었지만 사내는 개의치 않았다.
“개? 암, 개지. 한양에서 제일 추잡한 개고 말고. 헌데 말일세. 수캐가 제 암컷 찾아온 것이야 당연한 일 아닌가?”
육근이 있으니 감정이 흔들릴 법도 한데 받아치는 언사가 퇴기보다 한 수 위였다.
“흥! 개도 개나름이지. 어디서 굴러들어온 똥개가 우리 집 보배를 제 계집이라고 하는 거여 시방? 내가 죽 쒀서 개 줄라고 여태 그 앨 키운 줄 아나? 재수 없으니 썩 돌아가라 이놈!”
늙은 기생이 쥐고 있던 소금을 사내 얼굴에다 대고 휙 뿌렸다. 소금 알갱이는 사내의 갓과 얼굴로 사정없이 쏟아졌으나 사내는 허허탕탕 웃어제꼈다.
“허허, 이 사람아. 오늘은 술값을 후하게 쳐 줄 터이니 너무 야박하게 굴지 말게나.”
재효는 사내의 짙게 쌍까풀 진 눈에서 엉뚱하게도 슬픔을 읽어냈다. 어머니를 여읜 자신의 슬픔과는 ㄷ른 것이었으나 감히 엄두내지 못할 깊고도 쓸쓸한 슬픔이었다. 야심한 밤에 홀로 앉은 여인네가 밝힌 촛불의 그늘 같기도 하고 솔가지를 걸타고 앉은 밤짐승의 울음 같기도 한, 서늘하면서도 막막한, 고달프고 지친, 연원 모를 슬픔에 빨려들고 싶지 않아 재효는 얼른 자리를 떠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이보시오!”
걸음을 멈췄으나 돌아보지는 않았다.
“어떤가? 그대가 오늘 내 술값을 좀 내어주시려요?”
망설이는 재효를 사내가 재촉했다.
사내의 눈빛에는 감히 거절치 못할 기운이 넘쳐 흘렀으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흐트러지자 작정한 길이다. 망설일 까닭이 없었다. 도리어 같이 망가질 동무가 되어주기에 충분할 것 같았다.
“내가 술값을 쳐주면 그대는 무엇을 주시려오?”
참으로 불경스러운 언사였음을 안 것은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양태를 올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 눈빛에는 천지를 품어 안고도 남을 호기가 서려 있었다. 가파른 절벽 끝을 단단히 쥐고 선 채 만천지를 바라보고 선 독수리의 눈빛이었다.
“무엇을 받고 싶소?”
섬뜩했다. 허공을 진동하는 사내의 음성이 나온 입술이 독수리 부리 같았다. 그러한 섬뜩함은 곧 무한한 은혜로움으로 바뀌었는데 아득한 절벽 끝 둥지에서 새끼를 밀어버리는 어미 독수리 모습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네가 살려한다면 날개를 펴라. 그리고 날아라. 재효는 예바르게 허리를 굽혔다.
“그 말씀이면 족합니다.”
그리고는 허리춤을 올려 동전꿰미 하나를 풀어 퇴기의 발치 앞에다 던졌다. 눈이 화등잔만해진 퇴기가 꿰미를 주워 올리더니 집안으로 뛰어들어가며 소리쳤다.
“아야, 진주야! 어여 나와라. 나와서 니 서방 자알 모셔라.”
석파 흥선대원군 이하응과의 인연은 먼 과거의 어느날 그렇게 시작되었다.
꿈같고, 환영 같았던 그 밤을 지내고 집으로 돌아온 재효의 기억속에 남은 것은 어머니처럼 보듬어주던 기녀의 손길도 아니었고, 천길 벼랑을 타고 흐르는 듯한 비기의 술맛도 아니었다. 진주라는 기생의 펼쳐진 속치마자락에 피어났던 한 촉 난이었다. 허공을 가르며 휘어지다 접하며 떨어지는 난 잎의 굴곡은 바람 잘 날 없을 당신의 삶을 그린 것마냥 굵고 가늘어지기를 거듭했다. 잎과 잎 사이에 피어난 난화는 꽃을 찾아 막 날개를 펼친 나비 같아서 무걍이 은은히 퍼지는 기녀의 방은 그밤 난향만큼이나 안온했다. 말하지 않아도, 말을 듣지 않아도 뭔지 모를 마들이 서로의 가슴으로 깃드는 기묘함 속에서 흥선의 손은 흰 갑사 천 위에서 마음껏 날아다녔다.
“석파란이라….”
이제는 한층 농익었을 그 석파란이 금파 속치마에 그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러 재효는 그간 지긋했던 압박감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난 듯한 가벼움을 느끼며 연지정을 떠났다.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