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시련의 길(3)
발행일:2026. 03.02. pm8:00
<전편노트>
흥선대원군의 요청에 대해 금파를 보내기로 생각한 재효는 젊은 날 흥선대원군을 처음 만난 날을 떠올린다.
그때 흥선대원군은 미래의 야망을 마음 깊숙이 숨긴 채 망나니처럼 살아가고 있었으나 재효는 그런 대원군의 속내를 간파했었다.
제4장 시련의 길(3)
은신
배나졸의 집에서 숨어살다시피 하는 채선의 하루는 길고 지루했다. 일단은 아무의 눈에도 띄지 말고 배나졸의 아나람인 김천댁을 돕고 있으라던 양반이 봄이 다 가도록 소식이 없으니 답답하기도 했다. 야심한 시각이면 누군가가 소식을 듣고 오진 않을까. 사립 밖을 살펴도 이집 저집 개짖는 소리만이 밤의 고요를 가를 뿐이었다. 책에다 눈을 박고는 있으나 머릿속으로는 도무지 잡히지 않는 어릴 적 기억을 찾으러 온갖 상상을 하다 창호문을 열었다.
밤바람엔 아직도 찬기가 묻어났다.
건넌방은 불이 밝게 켜져 있었다. 김천댁이 아직도 바느질감을 앞에 놓고 있는 모양이었다. 건너가서 아까 다녀간 망구할멈이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신호장의 기별을 가지고 왔다면 여태 아무 말 없을 까닭이 없을 터였다. 김천댁 아주머니가 무슨 말을 해오기 전에는 일절 바깥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던 신호장의 명 또한 어길 수 없었다. 밥값도 못하고 얹혀 있는 주제에 괜히 나섰다가 배나졸과 김천댁 부부에게 해가 될지도 모를 일이기도 했다.
채선은 대나무 시렁 위에 층층이 쌓여 있는 책들을 바라보다 읽고 있던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윗사람을 섬기는 자를 백성이라 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자를 사라 하나, 사는 벼슬하는 자이고 벼슬하는 자는 백성을 다스리는 자이다. 지금 수령은 만백성 위에 홀로 외롭게 있으면서 간사한 백성 셋을 좌로 삼고 교활한 아전 육칠십으로 보를 삼고 사나운 자 몇 명을 막빈으로 삼고 성격이 뒤틀린 자 열여명을 복인으로 삼고 있다.”
몇 줄 읽지 않았는데도 어느새 마음이 둥둥 책을 떠나 동리정사를 향해 떠가고 있었다.
고개를 흔들었다. 쓸데없는 생각 접고 글을 읽자. 그 분이 부르시면 예란이란, 기능하는 사람이 아니고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보듬고 쓰다듬을 정도의 소양과 인격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 길은 오직 책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셨기에 주야로 책을 읽었노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기억을 되찾아 집으로 돌아가기는 그른 것 같았다. 이제 길은 하나 뿐이다. 때를 보아 이 나라 최고명창이 될 수업을 시작하겠노라던 그 분의 말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왜 아직도 기별을 넣지 않을까? 재효에 대한 서운하고 야속한 마음에 글자가 흐려졌다.
채선은 호롱 뚜껑을 덮어버렸다.
방금 전까지 형체를 드러낸 것들이 까맣게 사라져버렸다. 문득 나도 이렇게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싶어졌다.
누군가 밤마실을 나섰는지 멀리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캉캉거리는가 하면 저기서도 컹컹거렸다. 캉캉, 컹컹 소리가 소리를 받고 또 그 소리가 소리를 받았다.
묘한 장단이 느껴졌다. 채선은 소리에 가락을 담아 손가락으로 책상 테두리를 톡톡치며 따라했다.
“캉캉 컹컹, 캉캉 컹컹.”
리듬을 타니 노래가락이 흘러나왔다.
“매화 넷등걸에 봄절이 또 돌아온다. 넷 뛰던 가지가지마다 뛰엄즉도 하다마는 춘설이 분분하니 필지말지 하다마는.”
개짓는 소리에 맞춰 얼씨구,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노래를 하다가는,
“어허! 숫제 귀곡성을 내는구만 귀곡성을! 그 부분에서는 수리성이 나와야 하는 것이야.”
좀 잘해보려고 기교를 부렸을 때 단박 날아왔던 김세종의 꾸지람도 따라해 보았다.
소리를 높였을까. 건넌방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나는 것 같더니 발자국 소리가 마루를 건너왔다. 채선은 경솔한 행동을 후회하며 후다닥 이불을 뒤집어썼다.
“처자! 무슨 일 있는겨?”
“아, 아니어요. 아무것도 아니라요.”
“잠이 안 와? 그래서 그러는겨?”
“예? 아, 예에.”
“그래, 우찌 안 그러겠나. 그러고도 남지. 어쩌까? 좀 건너오려나?”
배나졸은 밤근무 나갔을 터, 채선은 잠시 생각하다 후다닥 일어났다.
“들어와.”
배나졸의 아내 김천댁의 방으로 가니 콩기름을 먹인 방바닥에 비단 옷감이 가지런히 펼쳐져 있었다. 손맵시 뛰어나니 바느질 일감이 끊이지 않는 김천댁이다.
옷감은 짙은 흑진주에 은사로 매화와 앵무 두 마리를 수놓은 백색 모본단이었다. 화려한 색이 아니어도 저렇듯 고급스럽고 우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탄복하며 옷감을 쓸어보았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촉감이 미끄러져 내릴 듯 촉촉했다.
“이렇게 배색을 해보려는데 어때?”
김천댁이 흑진주색 비단을 치마감으로 놓고 은사로 수놓인 백색 비단을 저고리감으로 배치해 보였다. 참으로 곱고도 품격이 느껴졌다.
“이걸 누가 입을까요?”
행여나 옷감이 밟힐세라 발끝으로 폴짝 뛰어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어쩌까? 골선을 이리로 두어야겠지?”
김천댁이 비단의 가장자리 한 끝을 손가락으로 죽 눌러 그으며 물었다.
“그쪽보다 이쪽이 나을 것 같은데요?”
“그러까?”
“예. 그쪽으로 골선을 잡으면 새가 왼쪽을 보게 되잖겠어요?”
김천댁이 채선을 빤해 들여다보았다.
“새가 왼쪽을 보면 왜 안 돼?”
“네? 아 네에… 그냥….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보는 게 안정감이 있을 것 같아서요.”
그냥 물어본 것이겠으나 채선은 깜짝 놀라 얼버무렸다. 어느 결에 동리정사를 가려면 여기서 나가 오른쪽 골목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자!”
채선을 빤히 바라보던 김천댁이 옷감을 놓고 불렀다. 자신을 바라보는 김천댁 얼굴에 측은지심이 가득했다.
“예, 아주머니.”
“신호장 어르신 기별이 많이 기다려지지?”
부창부수라더니 아주머니는 어찌 이리 자애로울까. 자신의 속마음을 곱게도 어루만져 준다 싶어서 코끝이 찡하니 아려왔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 기별이 늦어지는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거야. 그간 나랑 이렇게 지내자 응?”
“예. 그렇게 할게요.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그나저나 나한테 노래 한 곡 불러주려나?”
“예?”
채선은 깜짝 놀랐다. 이 집에 온 후 단 한 번도 소리내어 노래하지 않았다. 신호장의 당부가 있기도 했지만 스스로가 그러고 싶었다. 고창천에서 하나가 되어 곤두박질 친 그 순간부터 물이 줄줄 흐르는 몸으로 자신을 업고 ‘너를 어쩌면 좋으냐? 고뿔에 들면 어쩌냐?’ 달리는 동안 채선은 재효에게 속해버렸다. 말하지 않아도 그의 속을 다 알아버린 듯 했다. 그의 기별이 오기 전에는 단 한 소절이라도 노래하지 않는 것이 의리라 여겨졌다.
“괜찮아, 해 봐.”
“아주머니 전….”
김천댁이 옷본을 밀쳐놓고는 바투 앉았다.
“왜? 노래같은 거 못한다고 할 참이야?”
“네. 전 노래 못해요 아주머니.”
“무슨 소리. 나 다 들었어. 처자가 밤마다 잠꼬대로 소리하는 거.”
“네?”
“놀랐지. 내 오십 평생 처자 같은 목청은 처음 들었거든.”
참으로 기이한 일이었다. 신호장이 허락하기 전에는 절대 아니하겠다 한 노래에 대한 갈증이 김천댁의 한마디에 그만 터져버리고 말았다. 갈 것이다. 동리정사로 갈 것이다. 당장 가사 소리칠 것이다. 나 노래하고 싶어요.
그러자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채선은 슬그머니 일어났다.
“해 볼테야?”
그러나 홀린 듯 방문을 열고 나가는 채선을 향해 김천댁이 혀를 찼다.
“내가 괜한 소릴 했구만, 쯧.”
사립문을 나서는 채선의 등 뒤로 김천댁의 삭이는 한숨 소리가 이명인 양 들려왔다.
자리옷 차림이란 것도 몰랐다. 동리정사를 찾아간다는 일념뿐이었다. 그곳으로 가서 불켜진 동리당을 보고 싶다는 마음 뿐이었다.
오른쪽 골목을 빠져나가자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기 시작했다. 꺼졌던 집들에 하나 둘 불이 들어왔다. 겁이 났지만 그냥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는 날엔 그 분의 입장이 난처해진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 분을 밝혀주고 있는 불빛 한 점이라도 보아야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신없이 걸었다. 하거리만 벗어나면 고창천 방둑이 나온다. 방둑길을 따라 빨래터로 내려가 돌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 밤, 둘이 하나가 되어 허공을 가르던 돌다리.
돌다리를 건너면 오거리가 나온다.
오거리를 지나면 아, 꿈결같은 담장길이 나온다.
동리정사 동서남북 사대문을 잇는 담장길을 따라 걷다보면 동문에 이르고 그때야 걸음을 멈출 것이다.
포도넝쿨이 시렁 위로 얼기설기 얽힌 동문을 생각하자 채선의 마음은 더 급해만졌다. 주검 직전이 된 몸으로 지게에 얹혀 들어갔으나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쫓겨나온 동문이다. 그런데 그 문이 이리도 그립다. 채선의 보폭이 더 빠르고 넓어졌다.
동문 앞에 다다르자 ‘동리정사’ 네 글자가 새겨진 목판이 달빛 속에 드러났다.
두드려 저 글자의 주인인 동리를 깨우고 싶었다.
차마 두드릴 수 없었다. 서성거리던 채선은 돌연 모양성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지난 날 옥비녀 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쫓겨났을 때 갈 곳 없어 올랐던 그곳에서 보았던 동리정사 정경이 생각난 것이다. 숨이 턱에 차오를 쯤, 어둠에 익숙해진 눈 속으로 모양성 망루가 유령처럼 들어왔다. 순라꾼이 오나 살펴가며 망루 위로 올라갔다. 부러 동리정사를 비켜 오거리 넓은 장터른 눈으로 더듬었다. 북적거림이 사라진 장터는 음산하고 퀴퀴해 보였다. 시야를 장터 곳곳으로 옮기며 눈에 익은 곳들을 찾았다. 대장간을 기웃거려보고 어물전을 기웃거렸다. 갖가지 옷감이 진열된 포목점을 지나 한참을 달려 장터를 빠져나온 시선은 하늘을 가릴 듯한 느티나무 우람한 당산에서 멈추었다. 수북한 돌무더기 위에다 마음으로 돌 하나를 올린 후 오색 천을 두른 당산나무로 걸어가 합장했다.
다음으로 실버들이 주렴처럼 드리워진 고창천 빨래터를 눈으로 더듬었다. 달빛에 비친 돌다리가 어슴프레 드러났다. 차가운 징검돌이 미끄럽다고 느끼는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자신의 몸을 받다가 한 몸이 되어 곤두박질치던 신호장의 하얀 두루마기도 보였다.
찍찍, 울음기가 치밀어 올라왔다. 견디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성벽길을 타고 내려갔다. 멀리 순라를 도는 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려사려 동문 앞까지 다다랐을 때 채선은 또 가슴이 아렸다. 자신의 모든 것을 맡겨버린 사람이 저 안에 잠들어 있는데 나는 왜 들어가지도 못하고 숨어 지켜보아야 할까. 떨칠 수 없는 서운함을 누르며 그나마 행복했던 시간들을 되짚었다. 조금 있으면 포도가 열릴 것이다. 넝쿨에 잎이 달리고 꽃이 피고 포도알이 맺히면 동네 아이들이 몰려 들 것이고 나리께선 타이르시겠지.
얘들아, 포도가 익거든 오거라. 이 포도는 어차피 너희들 것이란다.
아이들은 그래도 눈을 떼지 못할 것이고 나리는 다시 한번 낮고 고요히 이르실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소용없다. 아직 먹기에 이른 것을. 무엇이든 때가 있는 법이니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러다 어느새 포도가 익으면 참새같은 아이들 오종종 모여들 것이다. 어떤 일이든 적당한 수확기가 있고 그 수확은 노력하며 기다린 끝에야 거둘 수 있다는 진리를 나리는 이 포도송이로 가르쳐 주신 분이다. 어떤 영민한 판관보다 더 영민한 처신을 하시는 분이다. 그런 분이니 내게 소식 안 주심에도 다 뜻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 뜻이 무엇이기에 이리도 소식이 없으신지 못내 서운하고 궁금하였다. 그러자 울먹거림이 섞인 노래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그것이 무엇이냐?”
“예. 변학도의 방에서 발견된 명부이옵니다.”
“무슨 명부가 그리 많기에?”
“예, 죄인들의 명부이옵니다.”
내친 김에 암행어사 출두 후의 한 장면을 상상하며 일인이역으로 나직이 사설을 읋었다.
“그래? 어디보자. 무슨 죄인이 그렇게나 많은지. 하이고나 한나, 두울, 서이, 너이….”
그러자 서럽고 원망스러웠던 마음은 간 데 없고 대청 아래 엎어진 채 슬슬 기는 변학도를 바라보는 이도령이 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남문쪽 성벽을 따라 재효가 걸어오다 걸음을 멈추었다.
채선은 눈치채지 못했다.
“죄수 명부를 펴놓고 각기 죄목 따져가며 차차 조사하여 보니, 본관 사또가 돈 꿔달라고 할 때 아니 바친 부민이며 현직 자리 뺏으려나 안 들은 아전이며 출패 사령 대접 잘못하여 사사로운 혐의 있는 백성들 모두 원통한 죄인들이라….”
흠뻑 빠져들어 소리를 하는데,
“어찌 이 밤에.”
분명 자신의 소리가 아닌 음성이 들렸다.
채선은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자리옷 차림의 재효가 눈앞에 서 있었다.
“오, 나리…,”
달빛에 젖어 푸릇해진 재효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질책하고 있었다. 어이 이리도 경망스러운 짓을 하고 있느냐는 무서운 질책을 침묵으로 전하고 있었다. 꾹꾹 누르고 있던 속을 채선은 그만 밭아내고 말았다.
“어르신이 너무 보고 싶어서.”
“입을 닫아라.”
무겁고도 엄중한 음성이었다. 채선은 저도 몰래 한 걸음 물러나며 또 말했다.
“너무 보고 싶어서 그래서 이렇게….”
“아무 말 말라 하였다.”
낮고 무거운 음성에는 그러나 물기가 그렁그렁했다.
“아무말 말고… 고개도 까딱이지 말고…눈빛으로…그저 눈빛으로 내 묻는 말에 대답을 하거라.”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그리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음성이었다.
“너는 좋으냐?”
“나리….”
“소리내지 말고 답하라 하였다!”
질책이 아니었다. 반가움이었다.
소리 안 낼게요. 그러니 이렇게 달려온 절 나무라진 말아주세요.
채선의 눈에서는 반가움과 원망이 뒤죽박죽 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재효가 다가왔다.
“너는 죽어도 좋으냐?”
“…….”
“너는 소리하다 죽어도 좋으냐 물었다.”
일순, 채선의 얇디얄은 눈꺼풀이 크게 열렸다.
재효는 얇은 눈꺼풀 안에서 일렁이고 있는 채선의 눈물을 보며 읽어냈다. 열망이었다. 간절함이었다. 애타는 사랑이었다.
오, 지상에 저토록 청명한 빛이 또 있었단 말인가.
채선의 눈빛에 담긴 애절한 긍정을 읽어내곤 그간 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꺼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내가 시키는대로 할 터이냐?”
“…….”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오직 내가 하는 말을 하늘의 말이라 여기고 따를 자신이 있느냐?”
“…….”
“오장이 녹아내리는 외로움을 참아야하고, 사지가 마르는 고립감을 견뎌야하고, 땀을 몇 말이나 흘려야 하고, 피를 몇 동이나 쏟아내어야 할 지도 모르는 고통스러운 길이다. 그래도 하겠느냐?”
채선은 견딜 수 없었다. 그러겠노라, 나리 곁이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기겠노라 소리내어 대답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도 참아야 했다. 세상의 모든 것인 사람의 명이니 말하지 않고 듣기만 해야 했다.
“내가 때로는 너에게 마귀가 될 수도 있다. 저승야차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하겠느냐?”
“예, 스승님.”
순간, 재효의 입에서 벼락같은 고함이 터져나왔다.
“입벌려 소리내지 말라 하지 않았느냐. 너의 입술이 움직이면 움직이는만큼 바람이 스치는 것을! 달빛이 묻어나는 것을! 나는 세상 그 무엇도 너의 입술을 움직이고, 세상 그 무엇이 너의 입술을 묻히는 것을 용서치 못한다. 그래도 하겠느냐?”
채선은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재효의 정강이를 부여잡았다. 고개를 숙였다. 발 끝에 이마를 묻었다.
그리하지요.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달이 구름 속으로 숨었다 다시 나왔을 때까지 둘은 그렇게 한참을 정지해 있었다.
이윽고 거대한 슬픔에 휘감겨 있던 자그마한 노구가 돌아섰다.
“다시 가서 기다려라.”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