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소릿고#29

-제5장 득음의 길(1)

by 취중진담

발행일:2026. 03. 23. pm8:00


<전편노트>

첩첩산중 오두막에서 기계처럼 소리꾼으로서의 단련을 하던 채선은 부당한 대우라는 생각에 점점 원망심이 깊어간다.

그러던 중 처음으로 출타한 김선달이 없는 틈을 타 오두막을 나온다.

자유.

눌러놓았던 끼를 홀로 발산하며 숲속을 걷던 중 느닷없이 재효와 김선달을 만나게 되고, 그 자리에서 재효의 호통을 듣는다.

그리고 자신을 그렇게 한 재효의 진심을 알게 되고 둘은 다시 하나가 된다. 그 하루가 채선에게는 명창으로 태어나는 초석이 된 셈이다.


제5장 득음의 길(1)


도리화

동리 보시게.

기녀도 아니고 사당도 아닌 계집을 소리꾼으로 키워낼 생각을 했다니!

역시 동리 당신이야.

나랏법에도 없는 짓을 했으니 내 당신을 어찌해야 하겠나.

그렇다고 나랏법에 계집은 소리를 할 수 없다고 명시한 것도 아니니 처벌하기도 모호할 일이로세.

어쨌거나 덕분에 며느리 생일은 그럭저럭 치렀다네.

승냥이 같은 며느리야 탐탁해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나. 내 귀가 넘치게 호강을 했으면 된 일이지.

허나 말일세.

무릇 광대란 눈과 귀를 다 즐겁게 해 주어야 가히 일패라 할 수 있질 않겠나?

기왕 하는 일, 내 차에는 미색을 겸비해서 골라 보내주시게나 허허.

그렇다고 내 말을 너무 고깝게 여기지는 마세.

나야 아무려나 동리 당신에게 목숨줄을 빚진 인생 아니던가.

당신이 주는대로 넙죽 받아 먹을 수밖에.

약을 주었으면 병을 주지나 말던지.

병을 주었으면 약을 주지나 말던지.

약도 주고 병도 주고 또 다시 약을 주니 그 속을 해아릴 길이 없었다.

하나, 대원군의 평소 성정으로 보아 속이 불편한 게 맞을 것이다.

예상한 일이긴 했다. 금파를 한양으로 보내는 것을 세종에게 맡긴 후 채선에게 마음을 쏟느라 잊고 잊고 있었는데 기어이 질타하는 편지를 받고만 셈이다.

재효의 불편을 마음을 정작 더 힘들게 한 건 다음 대목이었다.

궁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니 내 마음이 여간 설레질 않는구먼.

그래서 말일세. 경회루 낙성식 땐 연회를 거하게 열려하네.

경회루 낙성식이 어떤 기회인가? 각국 사절에게 이 나라 조선의 면모를 베대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그땐 귀호강에 눈호강도 할 수 있도록 신경을 좀 써 주시게.

또 전갈 넣으리다.

아참, 보내준 원납전은 심히 과하다 여겨졌으나 고마웠소.


편지를 접는 재효의 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금파의 인물이 사내의 마음을 후릴 정도야 아니지만 그렇다고 눈을 시큼하게 할 추색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하다. 인물이야 보는 사람마다 다 다를 터, 해도 ’소리채 대신 석파란 한 장‘에 귀호강을 그렇게 하고도 내심 불만을 적어 보낸 것을 보면 참으로 욕심이 과한 양반인 게다.

뿐인가. 금파의 속치마 어디에도 석파란은 없었다.

알 길 없기는 금파의 속도 마찬가지다. ’석파란 한 촉‘이란 조건을 분명 일렀는데 제 미색 아무리 빠진다 하나 그것도 한 촉 못 얻고 돌아왔다는 것이 믿어지질 않았다. 금파라면 한 촉 아니라 세 촉, 열 촉도 얻어오고 남음이 있는 아이라 여겼다.

아내의 옥비녀를 훔쳐가고도 멀쩡한 사람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천연덕스레 웃는 아이다.

대체 무슨 내막이 깔려 있는 걸까.

석파란 한 촉이면, 그것도 아녀자 속치마에 피어난 석파란이라면 금전적 가치를 넘어 대단한 의미가 될 것이다.

계산에 관한 한 거의 동물적인 감각을 타고났다 자부해온 재효였다. 남들이야 이름도 성도 모르는 떨거지들을 다 받아들여 입히고 재우고 소리공부까지 시켜준다고 치사가 미어졌으나 그것 또한 계산이 통 없어서 그런 건 아니다. 작게는 벗을 길 없는 자신의 전생 업장을 벗기는 길이요, 크게는 이 나라 썩어문드러진 사대부가에 일침을 놓을 인재 하나 키우는 일이다. 그 인재가 이 나라 조선의 명운을 가름하지 않는다 누가 호언할 수 있으리.

그 일을 금파라고 하지 못할 것 무엇인가.


”또 그 말씀을 물으십니까. 어제도 말씀드렸듯이 대원위 대감의 천 길 속을 제가 어찌 헤아리겠습니까, 영감?“

처소를 찾았을 때 아직도 풀리지 않은 여독으로 눈이 퀭한 세종이 약간 언짢은 투로 대답했다. 벌써 몇 번을 찾아와 한양행에 대해 물으니 그도 짜증이 날 만하다 여겼으나 찜찜한 마음을 달래야 하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양반이 금파를 영 탐탁치 않아했는가, 정말로?“


”대감. 대체 제게서 무엇을 원하시는 겁니까? 이미 다 말씀을 드렸는데요.“


재효는 자신이 조급해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뭔지 모를 불안감이 자꾸만 대답을 다그쳤다.


”대답을 해보게. 정말로 그 양반이 금파를 못마땅해 하셨는가?“


”그럴 리가요. 아주 흡족해 하셨습니다. 금파를 따로 부르기까지 하셨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영감. 영감이 오늘따라 낯섭니다. 왜 그렇게 불안해 보입니까?“


”묻는 말에 답을 하게. 그랬다면 말일세. 그랬다면 왜 약속한 석파란을 그려주지 않았을까?“


”그러게나 말입니다.“


재효는 세종의 피곤한 얼굴이 채선에게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제 품에 넣고 한 번 키워보려고 아이를 쫓아내버린 소견을 내심 못마땅해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혹시 무슨 내막이 있는 건 아닐까?“


”참으로 영감답지 않습니다.“


재효는 포기하기로 했다. 사내란 그런 것이니까.


”쉬게.“


세종의 다소 짜증서린 얼굴을 뒤로 하고 돌아나올 때였다. 세종의 음성이 뒷자락을 잡았다.


”그런데 말입니다, 영감.“


”뭔가?“


”제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망구할멈이 보이질 않습니다. 들리는 소리로는 영감도 그간 집에 계시질 않았다고 하던데요. 혹 제게 숨기는 게 있으신 겁니까?“


몹시 피곤했다. 이쯤해서 털어놓아야 하는가 싶었다. 망구할멈은 지금 도솔암에 가 있고 나 역시 한동안 그곳에 머무르면서 그 아이를 돌보고 있는데 그런데 지금 그 아이가 위험한 것 같다고, 고양이에게 뺏길까 숨겼더니 호랑이한테 뺏기게 생겼다고 털어놓으면 교활하다고 할 만큼 영민한 세종이 어떻게 생각할까. 제게서 빼앗아가시더니 결국 흥선군의 아가리에 쑤셔넣게 생겼다고 탕탕 웃어젖힐까.

재효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걱정이 있으십니까?“


”아니네.“


재효는 서둘러 세종의 처소를 나왔다. 금파가 내려왔단 전갈에 집으로 돌아왔지만 심중에 가득한 것은 채선 뿐이었다. 그 아이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되고 싶었던 명창의 꿈을 니가 대신 이루어주겠냐 물었을 때 바라볻ㄴ 눈 속 가득했던 물기, 세상 어떤 약속의 말보다 진실했다.

이제는 체면 따위, 명분 따위 벗어던질 것이라 재효는 생각했다.

자신의 내면이 시키는 대로 행할 것이다. 그러려면 이선달을, 아니 예인스님을 본래 자리로 보내드려야 한다. 착용했던 두건과 더그래를 벗게 하고 가사장삼을 입혀 드려야 한다.

될성 부른 싹 하나 키워보자고 부처님 시봉하며 수행하고 계신 분께 어럽게 부탁을 드렸는데 좋은 일 하는 데야 중이라고 못할 것 있느냐 흔쾌히 승낙을 해 주신 분이었다. 비구니의 몸으로 무술을 익혔으니 다행한 일 아니냐는 말까지 해 주셨다. 참으로 불경을 저질렀다.

망구할멈도 마찬가지다. 집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그 아이의 먹을 것, 입을 것, 잘 것들을 칭기게 도솔암에 머물러 달라 했을 때 군말 없이 따라 주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인덕이 통 없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일들을 내가 도맡을 것이다. 여생을 모두 바쳐 울창한 나무 한 그루 키우는 것이이승에 온 몫일 터이다. 동리정사를 떠나 당장 오두막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작정했다.

달이 지고 있었다.

서천 우거진 잡목 사이로 떨어진 달은 조각이 났다가 뭉쳤다가 또 조각나기를 반복하다 결국은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기울어갔다.

조각이 나도 흩어지지 않는 저 달처럼 아가, 너와 나도 수백 번, 수천 번 부딪치고 깨어져도 닷 하나 되어야 하느니!

각각이 되어서는 결코 득음의 경지에 이를 수 없느니!

진동하는 울대를 뚫고 올라오는 웅장하고 장엄한 성음을 들으며 필박받는 자의 울분을 쓰다듬고 착취하는 자의 모가지를 눌러야 하느니!

그리하여 우리 이 나라 조선의 한덩이 혼이 되어야 하느니!

아가, 우리 함께 기쁨이 되자.

비록 네가 곧 나임을 약속하였다하나 아니다. 너는 나만의, 나는 너만의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그 사욕을 담을 넘어 우리 조선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불꺼진 채선의 방문 앞에서 주먹을 불끈 쥐었으나 심장의 살점들이 되기 이전에 단 한 사람의 기쁨이 되고 싶은 늙은 사내의 보잘 것 없는 본능 때문이었다.

보잘 것 없으므로 본능을 따르는 순간, 역사의 바퀴살을 떨어져 나가 구를 것이고, 하늘은 조각 나 한 뼘 웅덩이 속으로 곤두박질 칠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현생에서 행하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므로 한 생이 지고 다시 태어나 윤회하며 역사는 이어지는 법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사슬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너와 내가 아니냐.

아가! 그러니 어찌해야 하겠느냐? 거슬러 십여 리를 올라야 있는 도솔암이 아니라면 이 숲 속엔 다람쥐와 더불어 우리 둘 뿐이질 않느냐. 예인스님과 망구할멈을 떠나보낸 후 나는 몹쓸 망념으로 괴로웠다. 너무 괴로웠다. 하루가 다르게 피어오르는 너를 사심없이 훈육하는 일이 내겐 형벌이었다. 뿜어대는 정욕을 참아내야 하는 청춘의 수행승과 다를 바 없었다. 새벽녘에 깨어난 너의 모습은 봉오리를 터뜨린 도화꽃 같았고, 아침 공부를 끝낸 네가 기지개를 켜면 이파리를 활짝 펼친 오얏꽃 같아서 나는 너에게 질끈 날아가 주둥이를 처박고만 싶었다. 나는 아득한 전생 어느 날에 도리화 마냥 물든 얼굴로 가마에 오르는 너를 향해 숨어 손 흔들던 어린 마당쇠였는지 몰라. 너의 송긋한 도리화 웃음 한 다발이면 내 긴긴 평생은 너의 향기로 겨웠을지도 몰라. 설레게 고운 석양빛 물드는 하늘을 보면 너의 고운 볼을 물들이는 노을이 되고 싶었을지 몰라.

하고 싶음과 해서는 안됨 사이에서 사지가 찢기는 통증을 감내해야 하는 자신을 재효는 갈등하고 질책했다

“아가….”


터져나는 탄식을 목울대로 밀어넣고 발을 돌리는데 방안에서 채선의 음성이 새어나왔다. 재효는 바짝 다가가 귀를 세웠다.


“들로 내려가면 초동목수 아이들이 몽둥이 들어메고 으음 산토끼 잡으러 가자.”


수궁가 한 대목이었다.


“무심한 것.”


내 저의 잠자리 밖을 서성이며 이리 괴로워하는 줄도 모르고 잠결에도 노래연습을 하는구나 싶으니 대견하면서도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거의 죽어서 죽을 토끼, 목궁기 쓴 내 나고 밑궁이 조총 놓니, 이 아니 팔난인가.”


돌아서려던 재효는 다시 귀를 세웠다

.

“거의 죽어서 죽을 토끼, 목궁기 쓴 내 나고 밑궁이 조총 놓니, 이 아니 팔난인가.”


잠꼬대로 부르는 노래가 출구를 찾지 못한 물도리처럼 자꾸만 되풀이 되고 있었는데 소리가 이상했다. 아무리 잠꼬대로 부르는 소리라 하나 간헐적으로 섞여나는 쇳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그저 잠꼬대로 부르는 소리라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분명 이상이 있음이었다.

졸이는 마음으로 두 발을 댓돌 위에 올렸지만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딸 같은 아이라 하나 잠든 처녀 방이 아니냐. 차마 댓돌을 내려서지 못했다. 그냥 두기에도 불안했다. 창자에게 목은 생명이 아니랴. 결국 발 하나를 쪽마루 위로 성큼 올려놓았다.

어둠 속에서 채선은 모로 돌아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작고 가냘팠다.

내려앉아 윗목에 놓인 호롱을 당겼다.

옅은 호롱빛 아래 드러난 채선의 얼굴은 박꽃보다 창백했다. 창백한 관자놀이 위를 두어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이 눈꼬리에 걸려 있었다.


“아가….”


천천히 손을 내려 머리칼을 걷으려는데 채선이 돌아누웠다. 손다락 끝에 관자놀이 부분이 살짝 닿았다. 전신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내가 너를 어찌하면 좋으냐, 아가.”


연배가 맞는 총각을 만나 봄이면 산으로 들로 나물을 뜯고, 여름이면 시원한 냇물에 발을 담그고, 가을이면 색색이 든 단풍을 주워 머리에 꽂으며 피어날 너를 내가 어찌해야 좋으냐.

재효는 양손을 모아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거칠고 메마른 손박으로 골 깊은 주름이 우글거리며 기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서글펐다. 외로웠다.

무엇을 할 것인가. 저 많은 소리청 창자들을 키워 세상에 내놓는 일들로 전생 업을 닦을 수나 있을까. 차라리 너를 데리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들꽃처럼 사는 것이 어떨지.

그렇게 생각하자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만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재물을 던져서라도 시간을 사고 싶었다.

다음 날 새벽, 호롱이 켜지는 것을 보고 재효는 채선의 방 앞으로 갔다.


“일어 났느냐?”


잠시 후, 방문이 열렸다.


밤새 뜬 눈으로 저를 지킨 것을 알면 외려 불편해하리라. 짐짓 음색을 가다듬어 물었다.


“들어가도 되겠느냐?”


“예, 스승님.”


개던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다가앉은 채선의 얼굴에는 예상했던 창백함 대신 젖빛 홍조가 폭삭하니 드리워져 있었다. 젖빛은 월하의 이화요, 홍조는 이슬 깬 도화이니 너의 낯빛을 내 도리화 같다고 말하고 싶구나. 속엣말을 침에 섞어 넘기고 물었다.


“밤새 열은 없었느냐?”


“미열이 있긴 하지만 괜찮습니다.”


아직 잠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 더 고왔다.


“목은 어떠하누?”


“저보단 스승님의 목소리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어디가 편찮으신지요.”


“펴, 편찮긴. 내가 그럴 일이 있겠느냐. 그보다… 그보다 너는 내가 싫지 않느냐?”


채선이 비켰던 시선을 돌려 재효를 보았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 늙은이가… 이 늙은이가 너를….”


복장 안에서 뭔가가 울컥 올라오려 했다. 기침을 핑계로 얼굴을 돌렸다. 잠시 침묵하던 채선이 나직이 말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스승님.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먹는 만큼 지혜를 키우는 일인 것 같습니다.”

목소리가 도리화 꽃잎에 떨어지는 이슬 같았다.


“그렇다면 스승님께서 살아오신 긴 세월은 스승님이 지닌 지혜의 크기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아직 미숙합니다. 미숙하니 지혜란 것이 있을 턱이 없지요.”


채선의 말에 재효는 심장이 베이는 것만 같았다.


“스승님께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하나라구요. 스승님은 곧 저이고 저는 곧 스승님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스승님의 지혜는 제 것이요, 저의 젊음 또한 스승님의 것이 아닙니까. 무엇이 부족하시어 그런 못난 말씀을 하십니까. 스승님께서는 될 성 부른 싹을 볼 줄 아는 매의 눈과 절벽 둥지에서 밀어내어 새끼의 독립을 돕는 독수리의 강인한 육아법을 아시고 계십니다. 누가 이러한 스승님을 늙은이라 부른단 말입니까?”


모르는 사이 이 아이가 이렇게 컸구나. 이렇게 성장했구나. 예인스님께 맡겼던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구나. 고맙고 또 대견했다.


“그래, 어젯밤 잠자리 들기 전 입정에서는 무엇을 알아차렸느냐?”


“제가 참으로 운이 좋은 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운이라니. 무슨 말이냐?”


“저는 원래 죽었어야 할 몸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살아 스승님의 모든 것을 받으며 소리꾼으로 커가고 있으니 어찌 운이 좋지 않다 하겠습니까. 게다가 성스러운 수행자의 수발을 받았습니다. 이승 빚이 하늘을 찌릅니다.”

우문이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현답이었다.

어찌 이런 것이 내게 왔나 싶었다. 내 전생에 지은 악업으로 아내를 넷이나 앞세운 박복한 사내다. 그런 남귀팔자를 타고난 내가 이렇게 복이 많아도 되는 것인지 두렵고 또 두려웠다. 이 아이를 내게 보내준 사람이 혹 죽은 네 명의 아내가 아닐까. 착했거나 후덕했거나 바지런했ㄱ나 검소했거나 그러했던 아내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더욱 열성을 낼 일이다. 머지않은 날에 이 아이를 조선 최고 명창으로 우뚝 세울 일이다. 재효는 그 일 하나를 위해 여생을 바치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아가.”


“예, 스승님.”


“너는 소리가 뭐라고 생각하느냐?”


부드럽게 바라보던 스승의 시선이 채찍처럼 날아온다 싶었는데 눈 앞이 노래졌다. 늘 하고 있던 소리이건만 정작 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대답하여라. 판소리가 무엇이냐?”


판이 주어지면 그 판 위에서 노래로, 너름새로, 아니리로 청자들을 웃고 울리는 것이 판소리다. 그것 말고 더 무엇이라 설명할까. 채선은 대답을 찾으려 눈을 깜빡거렸다.


“그런 것이다. 우리는 늘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알아야 한다. 자기가 모른다는 것을, 특히나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려는 자들은 더 잘 알아야 한다. 자기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자기의 일을, 실은 제일 잘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최고는 그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이제부터 너는 니가 알고 있다고 생각한 판소리에 대한 믿음일랑 모두 버려라. 파도가 왔다 간 모래사장처럼 완벽히 지워내어라.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채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지만 이 분의 말씀이라면 모래를 바위라 해도 믿고만 싶었다. 화사하게 익은 복숭아를 따는 농부도, 붉게 물든 자두를 따는 농부도 이 열매들이 잘 익으리란 믿음으로 그 많은 땀을 흘렸을 테니까.

채선은 주먹을 쥐었다. 어떤 어려움도 견뎌내리라. 어떤 불길이라도 뛰어들리라. 스승님이 지금처럼 내 곁에 계셔주시기만 한다면.


next….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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