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시련의 길(5)
발행일:2026. 03. 16. pm8:00
<전편노트>
옥비녀를 훔쳤다는 누명을 썼으나 그것이 금파에 의한 괴략임을 안 신호장에 의해 깊은 산속으로 소리공부를 하러 온 채선은 김선달의 관리에 심한 압박감을 느낀다.
곧 올 줄 알았던 재효는 오지 않고 재효를 대신한다는 김선달과 매일 똑같은 스케줄에 의해 살아가는 일이 갑갑하고도 억울했다.
그러던 어느날, 채선은 참지 못하고 오두막을 나가겠다고 울부짖는다.
제4장 시련의 길(5)
혹독하여라-2
더는 못견디겠다 한계를 느끼던 날이었다. 아침 밥상을 물린 이선달이 적벽가 가사본을 들이며 오늘은 완창을 하라고 했다. 채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작했다 하면 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 적벽가를 완창하라니 심하다 싶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소리, 도무지 발전이 있는지 없는지 평가도 없는 소리를 언제까지 홀로 연습해야 하나 싶어 채선은 가사본을 밀쳐버렸다.
평소 같았으면 부엉이 눈을 할 선달이었다. 그런데 모른 척 버려두고 봇짐을 꾸리는 것 같았다. 어딜 가려는가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절호의 기회가 올 수도 있었다.
“가까운 곳에 잠시 다녀올 일이 있으니 드린 것을 두 번 완창하십시오.”
예상대로였다.
속으론 춤을 추고 싶을 정도로 기뻤으나 부러 매달리는 척했다.
“저 혼자 두고 가려구요?”
“저도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만…. 아무튼 절대 나오지 말고 연습하십시오.”
이선달이 나서려던 걸음을 잠시 멈춰서는가 했는데 다시 나가버렸다.
얼씨구나.
채선은 냉큼 방을 뛰쳐나가 마당 한 가운데 서서 두 팔을 활짝 벌렸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내리는 햇살이 품 안으로 가득 들어왔다. 깊숙이 심호흡을 하고선 빙그르르 돌자 옅은 현기증이 돌았으나 곧 괜찮아졌다. 문득 뒤돌아서서 문간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이선달의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부자리 하나 없었다. 옷가지는 물론 먹고 잔 흔적조차 없었다. 후다닥 뛰어나와 뒤란을 돌아 부엌을 찾았다. 황토로 바른 부뚜막에 자그마한 솥단지가 하나 걸려 있었지만 역시 밥을 한 흔적 따윈 없었다.
부엌을 달려나왔다. 진정 귀신이 아니고서야 나 모르는 비밀이 있을 터이다. 사립을 뛰쳐나갔다.
오두막을 지나는 계곡을 따라 급히 뛰었으나 걸음은 곧 하느작거리기 시작했다. 좁은 방에 오래 갇혀 있던 몸이 금방 지쳐버렸다. 풀섶 위에 내려앉아 차오르는 숨을 도닥였다.
가쁜 숨이 가라앉자 풍경이 들어왔다. 투명한 빛을 머금은 나뭇잎들이 점점이 매달려 맞닿기도 하고 나란하기도 하고 저만치 떨어져 있기도 했다. 그 사이로 푸른 하늘이 조각조각 드러나 있었다. 천천히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았다. 길 아래 계곡엔 기묘한 모양의 바위들이 이어져 있었다. 바위들이 겹겹이 쌓인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나왔다.
이선달의 비밀을 알아내겠다는 생각은 온 데 간 데 없고 계곡 저쪽에서 물까치 한 쌍이 서로를 희롱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한 마리가 바윗덩이 위에 내려앉으면 파닥거리며 날던 나머지 한 마리가 따라 앉고, 그 녀석이 날아오르면 또 따라 날아오르는 것을 보다보니 절로 재효가 떠올랐다.
어떻게 지내고 계실까. 어디가 편찮으신 건 아닐까..
원망 대신 궁금하고 그리워지는 심사를 달래다 처벅처벅 길을 따라 또 걸었다.
펼쳐진 무성한 숲을 벗어났나 했는데 어디선가 목탁 소리가 들려왔다. 이 깊은 산중에 또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채선은 안심이 되었다.
가서 기도하고 싶었다. 제발 나리께서 빨리 와 주십사 부처님께 기도해야겠다는 생각에 힘이 드는지도 모르고 뛰어 올랐다.
금방 나타나리라던 절은 쉬이 나타나지 않았다. 땀이 흘러 목덜미가 따가웠다. 채선은 걸음을 늦추고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계곡물에 발이라도 담그면 땀이 좀 식을 것 같았다.
작은 소 하나가 보였다. 바위의 틈과 틈을 비집고 흘러와 모여서 웅덩이가 된 소에는 발간꽃이파리 몇 개가 동동 떠 있었다.
“곱기도 해라.”
훌쩍 바위를 건너 떨어진 꽃잎을 주워올릴 때였다.
“내 이럴 줄 알았다!”
길 위쪽에서 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놀라 돌아다보았다.
놀랍게도 재효가 노기 띤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리!”
뒤에는 이선달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이선달에게 일부러 지을 좀 비워보라 했더니 역시 예상대로구나. 이선달!”
이선달이 재효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내가 정한 목록에 이렇게 나와 돌아다니란 말이 있었던가?”
이선달이 어정쩡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하명대로 하겠습니다.”
이선달이 내려와 채선의 팔을 움켜잡았다.
“나리!”
“어허! 따라가지 않고.”
야멸차게 돌아서는 재효 등짝을 숲그늘이 내려와 덮어버렸다.
“왜요? 나리는 저한테 왜 이러시는데요?”
채선은 이선달의 손길을 뿌리치며 재효를 불렀다.
재효는 걸음을 멈췄으나 뒤돌아보지 않았다. 등짝이 찍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너를 왜 그렇게 방치해두는 말하는 것이냐?”
폐부를 뚫는 반문에 채선은 대답도 못한 채 눈물만 흘렀다.
“묻겠다. 네가 조선 최고 창자가 되고 싶다 한 말은 진심이었느냐?”
“예.”
“아니! 너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
채선의 대답을 재효가 잘랐다.
“아닙니다. 전 거짓말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조선 최고 소리꾼이 되어 힘든 백성들에게 희망이 되고 썩어빠진 관료들을 꾸짖을 겁니다.”
“이래가지고?”
숲이 쩌렁쩌렁 울리는가 했는데 재효가 돌아섰다.
“이래가지고 그럴 수 있다고? 잘 들어라. 매미가! 겨우 열흘 울고 죽을 매미가! 날개를 달기 위해 ㅇ둡고 컴컴한 땅 속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참고 견디는 줄 아는가?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깊은 땅 속에서 언젠가 날개를 달 그날을 기다리며 견디고 또 견디는 시간이 얼마인지 너는 정녕 아는가!”
내리치는 철퇴에 채선은 온몸이 으깨어지는 느낌이었다.
“나리….”
“너는 아니다. 너는 그저 운 좋아 목청 하나 잘 타고 났으니 그 목청에 기대어 흥청망청 살고 싶은 싸구리 광대에 지나지 않는다.”
“어르신, 제 말을 좀 들어주셔요.”
“입닫고 내 말을 들어라. 특별해지기 위한 자는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피를 몇 동이나 쏟고 땀을 몇 말이나 흘려야 하는지 모른다. 몸속의 진액이란 진액을 다 쏟아내며 뜨겁고 황량한 황무지를 건너는 민달팽이가 되지 않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너의 그 간드러진 걸음걸이, 헤프기 짝이 없는 웃음. 요기가 조랑조랑 묻어나는 목소리를 벗어던지고 천하를 호령할 목청을 얻기 전에는 기생꼬투리나 해먹기에 딱 알맞단 말이다. 이 나라 조선에서 여자가 예인으로 살아가려면 어때야 할 것 같으냐? 난설헌의 격조와 황진이의 독기와 사임당의 소양을 갖추어도 사당년으로 취급받기 십상인 나라다. 요망스럽기 짝이 없는 정신상태로 얼마나 엎드려 있었다고 이리 발광을 쳐대는 것이냐?”
채선의 눈에 기어이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굽이굽이 틀린 말이 없었다. 그간 자신의 경망됨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지금까지 내 너를 지켜봐 왔다. 너에게는 진정성이 없었다. 더 높은 꿈과 더 높은 이상으로 똘똘 뭉쳐 나고난 요망기를 없애려는 간절함도 없었다. 얄팍한 미색과 요망한 몸짓으로 내 마음을 가질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이곳을 벗어나 동리정사 소리청의 안락한 환경 속에 묻힐까만 소망했다. 그리고 너는 나를 원망하고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해 여생을 허비할 여력도 시간도 없다. 예인의 길을 가고자 하는 길을 갈구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나리….”
시야를 가리는 눈물 너머로 재효도 자신처럼 울고 있음을 채선은 보았다.
“누군가를 지옥으로 보내는 자는 지옥길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지옥훈련을 시키는 자의 하루는 더욱 지옥이라는 뜻이다. 네가 일어날 때 나는 이미 일어나 정좌헉 있었다. 네가 좌선을 할 때 내 의식은 오직 너를 위해 열려 있었다. 아침 독서를 할 때 나도 책을 읽었고 소리 연습을 할 때 북을 앞에 놓고 있었다. 네가 잠들기 전에 나는 단 하루도 먼저 자리에 든 적 없었다. 그랬으면서도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의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서였다. 이래도 내 말에 반박할 참이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어르신.”
채선은 태산처럼 크고 높은 한 사내를 앞에 두고 끝도 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온 몸의 열기를 품고 쏟아져내리는 눈물에 그간의 어리석음을 씻어내었다. 우뚝하니 장대한 분이 내 앞에서 서 계심이니 나는 얼마나 복이 많은 아이인지. 기억 속에 묻혀 드러나지 않는 시간 따위 이제 있을 것이다. 내 삶은 포도넝쿨 주렁주렁 휘늘어진 동리정사 동문에 든 순간부터 시작된 것이니 이제 이 분은 나의 아버지요, 스승이요, 연인이요, 친구이다. 내겐 오로지 이렇게 크신 한 분이면 족하다.
채선의 처절한 진정성을 읽었을까. 피곤함이 역력한 음성으로 재효가 물었다.
“내가 미우냐?”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시 시작하려느냐?”
"예, 스승님.“
자기도 모르게 스승이라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누가 감시하지 않아도?“
”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예. 할 것입니다. 저 혼자서도 묵묵히 하겠습니다. 껌껌한 어둠 속에서 인고의 시간을 보내며 우화등선의 날을 기다리는 한 마리 굼벵이처럼 기어가겠습니다.“
”그 말이 진심일 터.“
이번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마 알량한 말 한마디로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내 한 번 더 지켜보도록 하겠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재효가 계곡쪽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리고 채선 앞에 이를 무릎을 꿇었다.
”아가, 나는 명창이 되고 싶었다. 왜? 한 때문이었다. 내게는 너보다 더한 한이 더께더께 앉아 있다. 나는 그 한을 소리로 풀어내고 싶었다. 허나, 나는 좋은 목을 타고 나지 못했다. 아무리 연습해도 철성이나 파성이 되는 생목을 타고났다. 어찌하여도 통성이나 천구성을 낼 수 있는 목이 아니었다. 그런 목으로 명창 반열에 오를 수는 없는 법이다. 대신에 나는 석파께서도 졌다 하는 귀명창이다. 지난 날 못대로 토해내는 너의 배비장을 들었을 때 나는 작정했다. 너에게 내 여생을 걸자.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너에게 주자.“
숨이 차는 모양이었다. 재효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내가 너의 목숨을 살려주었뜻이, 니가 나의 목숨을 살려주었듯이 우리는 다시 한 번 서로를 살리자. 너는 이 나라 조선의 둘도 없는 명창이 되고 나는 그런 너를 목숨바쳐 지원하는 것은 어떠하겠느냐?“
”예, 스승님. 저는 스승님의 것입니다. 스승님도 제 것입니다.“
자신의 신발 끝에 이마를 묻고 대답하는 채선을 두고 재효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고 입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이제 우리는 하나다. 네가 곧 나이고 내가 곧 너이다.“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