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4 태어나다(3)

[에세이명리]나의 사주명리 입문기

by 취중진담

중학교 2학년쯤이었던 것 같다.

잠이 무척 많은 내가 어느날 밤을 꼬박 뜬눈으로 세웠다. 눈만 감으면 알 수 없는 문양이 눈앞을 가득 메워서였다.

첨에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하도 공상을 해대니 이런 일도 있는 거겠지. 이러다 말거야,

돌아누워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다 마는 게 아니었다.

온갖 기하학적인 문양이 끝도 없이 생겨났다 사라지고 또 생겨났다 사라졌다.

의식은 점점 몽롱해졌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 문양 속으로 빨리듯 흡수되기 시작했다.

의식이 대롱대롱거렸다.

곁에서 잠든 언니를 깨워야한다 생각했지만 문양 속에 빨려 들어간 의식은 이미 내 것이 아니었다. 빨판에 걸려든 먹이처럼 이리 허우적, 저리 허우적. 그러다 또 보기좋게 내동댕이쳐지곤 했다.

자정을 지나 새벽이 올 때까지 문양은 집요하게 생겨났고 나는 점점 피폐해져갔다.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문양과 기묘한 기운의 노예가 되어 허우적거리다 의식이 돌아올 때면,

‘언니야, 언니야. 나 좀...“

모든 건 의식 속에서만 이루어질 뿐이었다.

이번에는 허공의 한 점에서 어떤 기운이 생겨났다.

기운은 기운을 모아 나를 향해 달려왔다. 뱅글뱅글 하나의 점에서 점점 반경을 넓히며 달려오는 기운을 두 손바닥으로 막았다.

소용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혼미 갈 때였다.

의식의 오른쪽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막 태어난 애벌레처럼 꼬물꼬물 생겨난 사람들은 점점 왼쪽으로 움직였고 손에는 뭔가가 들려 있었다.

드디어 형제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었다.

흰 바지저고리를 입은 아저씨.

머리띠를 두른 할아버지.

어린아이를 들쳐업은 아주머니.

흰저고리 검정치마 젊은 처녀.

까만 차이나칼라 상의에 잘 다린 교복바지를 입은 남학생.

치맛자락을 움켜쥔 가채머리 기생들.

괭이며 낫을 든 선머슴들.

소매끝이 반질반질한 코흘리개들까지 한 명 한 명 너무나 또렷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건 태극기였다. 그들은 이제 내 의식의 가운데를 지나 왼쪽면으로 이동해 있었다.

텅빈 오른면에서 어떤 폭력성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나를 달려오던 뱅글뱅글하던 그 기운이 방향을 틀어 왼쪽을 향해 돌진하듯 달려갔다. 저저벅벅 군홧발소리가 들렸고 탕탕, 총소리가 들렸다.

깨알같이 작은 왼면의 그들이 쓰러졌다. 강풍에 쓰러지는 풀처럼 도미노식으로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아, 내 모습이 보였다. 노란저고리에 자줏빛 치마를 입고 자그마한 가채를 얹은 내가 그 가운데서 쓰러져 있었다. 군홧발 하나가 내 머리를 짓이겼다.

나는 웃고 있었다.

그런데 울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평범할 수가 없었다. 그 이상한 영상을 본 다음날이 하필 3.1절이라는 걸 알고 난 후였다.

그리고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종종 영상이 나타났다.

한 번은 설국소녀의 모습이 보였다.

천지가 눈으로 덮힌 마을에서 썰매를 타는 소녀가 보였다. 그게 나라는 것이 또렷이 느껴졌다. 뱃머리처럼 앞이 뾰족한 설피를 신고 신나게 눈을 지치며 나아갈 때는 쉭쉭 바람소리가 현실인 듯 들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속이 빈 나무통을 여럿 이어 만든 터널 속으로 두 팔을 모으고 다이빙을 했다. 내 몸은 그대로 속도가 되어 봅슬레이 경기를 하듯 미끄러졌다.

와, 신난다. 와, 와!

한참을 미끄러진 끝에 나무통에서 쑥 빠져나온 나는 하얀 눈 위로 퍼지는 햇살에 눈이 부셔 손차양을 했다.

멀리 마을이 보이고 나는 다시 설피를 타고 그 마을을 향해 달렸다. 심부름을 가는 것임을 그냥 알았다.

그리고 또 훌쩍 장면이 바뀌어 얼음담장이 둥그렇게 쌓인 아래 앉아 볕바라기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없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이후에도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그런 영상들은 끊임없이 나타났는데 시간이 갈수록 단편적인 형상보다는 의미심장한 형상 같은 것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시커먼 황소의 등으로 하얀 황소가 올라타는 영상을 보았을 때는 그 의미가 절로 해석되었다. 내 내면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고 있는 영상이었다.

십우도라는 불화가 있다.

심우도라고도 불리는 이 불화는 방황하는 우리가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깨달음에 이르까지의 과정을 야생의 소를 길들이는 목동을 등장시켜 열 단계로 그려놓은 그림이다.

그림에는 본성을 찾지 못한 채 욕망에 길들여진 나를 검은 소에 비유했고, 본성을 찾은 나를 흰소에 비유되어 있다.

내가 본 영상은 바로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내 영혼이었던 것이다.

모르겠다. 흰소인 척 하고 사실은 검은소로 살고 싶었는지도.

나는 누구지? 귀신인가? 저승에 있어야 할 사람이 잘못 태어난 건가?

온갖 망상들로 삶이 흐트러져갔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나는 조금씩 미쳐간 게 틀림없었다.

죽으려고 술을 마셨다.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

어서 죽기 위해서 사회적 관념을 벗어나는 행위를 겁도 없이 하며 살았다.

그래도 죽어지지 않았다.

염세적 경향은 점점 깊어갔고 급기야 잠들기가 두려웠다. 잠자리에 누우면 기도했다.

잠들면 깨지 말게 하옵소서.

만약 깨더라도 십년이 흘렀거라, 오년이 흘렀거라.

어느날, 직장 언니가 전화번호 하나를 줬다.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는 무당이라 했다. 만나려면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 자기가 긴히 부탁해 놨으니 문 열기 전에 찾아가 보라고 했다.

망설였지만 또 한 번 그런 영상에 시달린 새벽, 동이 트는 걸 보곤 벌떡 일어나 무당집으로 달렸다.

탕! 탕! 탕!

부서질 듯한 대문 소리에 중년의 여자가 부스스 나왔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여자가 뒤돌아섰다. 눈매가 매서웠다.

그녀를 따라 들어간 신당은 조촐했다.

그녀가 둥! 북 한 번을 두드리더니 나를 보았다.

“지 사주 지가 더 잘 알텐데 여긴 뭐하러 왔노 하신다.”

그리곤 돌아앉았다.

번개가 머리를 때리는 것 같았다. 사주라는 말을 듣는 순간!

처음 듣는 단어였다. 분명 처음 듣는 말인데 오래 듣고 쓴 것 마냥 익숙했고 정겨웠고 진짜 나를 만난 것 같아서 전율이 일었다.

기뻤던가?

슬펐던가?

애절했던가?

모르겠고 신당을 나온 후 도시의 거리가 살아날 때까지 거리를 배회했다.

거리마다 늘어선 간판들을 빠짐없이 훑으며 걸었다.

겨울 햇살이 아스팔트를 향해 기어오기 시작하며 거리는 살아났다. 그리고 나는 보고 있었다.

‘령각산 철학원’

이라고 쓰인 간판 아래 출입구로 어떤 중년의 남자가 들어가고 있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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