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5 태어나다(4)

[에세이명리]사주는 도둑도 못 훔친다더라

by 취중진담

살면서 누구나 분기점을 만난다.

분기점은 이전까지 살아온 삶이라는 물길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흐름은 때로 너무나 격변하여 미처 몸을 가눌 틈도 없이 휩쓸려 가 버릴 때도 있다.

그랬다. 그 하루가 내겐 그런 격류였다.

딱딱하니 네모진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자 남자는 생일을 말하라고 했다.

불러주는 생일을 적은 남자는 깨알같은 글이 적힌 시커먼 책 한 권을 이리저리 펼치더니 누런 갱지 위에 검은 사인펜으로 한자 몇 자를 휘갈겨 적고선 혼자말인듯 중얼거렸다.

참, 간도 커네.

말꼬리 눅눅한 한숨이 회충처럼 이어졌다.

예?

아니, 이런 사주를 어찌 챙겨 들고 세상에 나왔냔 말이지.

잔뜩 긴장해 있는 나를 향해 그가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던졌다.

이 모양대로 살겠다고 아가씨가 가지고 온 거잖아, 이 사주 말이야.

역시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뭔가 내가 잘못한 것만은 틀림없었다.

무당집에서와는 달리 졸아든 마음이 더욱 졸아드는 것 같았다.

사주를… 제가 가지고 오나요?

죄책감 같은 감정에 짜증이 살짝 뒤섞였다. 자기 말대로 사주라는 게 태어나는 날의 하늘과 땅의 기운이라면, 그리고 그 날의 기운이 죄다 복이라곤 없는 날이고, 대신 일복과 욕복 뿐인 날이라면 그게 어디 내 선택이란 말인가. 내가 어디 그날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나 말이다. 거슬러 근 10개월 전의 어느밤, 어머니 아버지가 나를 만든 거가 아니냔 말이다.

참 하늘도 무심하시지.

이건 또 무슨 소린가? 내가 겁도 없이 그날을 선택해서 왔다고 해 놓고 이번에는 또 하늘 타령이다. 양어깨로 열기가 몸살처럼 올랐지만 나는 암팡지게 물었다.

왔다갔다 하시는데 똑바로 말씀해 주세요, 선생님.

속으로 선생님이라 부르는 내 입이 미웠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갱지 위에 그려진 글자에 동그라미를 치더니 한마디 하고, 체크를 하고는 또 한마디 하고, 죽죽 줄을 긋고는 또 한마디 했다.

기분이 상했다. 아무리 좋지 않다 하더라도 꼭 저렇게 말을 해야할까 싶었다. 만약, 내가 저 자리 앉았다면 나는 저러진 않으리라.

박차고 일어나려는 찰나, 남자의 말에 나는 갇힌 듯 주저앉았다.

아가씨, 나한테 사주 배워보지 않을 겨?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과 터널 멀리 빛이 드는 기분 중 내 진짜 기분이 어느쪽인지 모를 알쏭한 의식 속에서 나도 몰래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남자는 다시 나를 이리저리 내동댕이치기 시작했다.

이후 남자에게 들은 이야기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너는 하늘복도 땅복도 없는 사주를 가지고 왔다.

너는 부모복도 형제복도 선생복도 없는 사주를 가지고 왔다.

너는 시집을 안 가는 게 좋겠다. 서방복도 자식복도 없는 사주다.

니가 시집을 가면 새벽에 길을 떠나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죽고 말 것이다.

대신 니가 가진 복이 두 가지 있다. 일복과 욕복이다.

잔인했다.

사람이 어찌 면전에다 대고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러면 나는 뭐하러 태어났다는 말이지?

애벌레 같은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가채를 얹은 노란저고리의 내가 떠올랐다.

눈물이 흘렀다.

남자는 물러나지 않았다. 확인 사살이라도 하려는 듯 한 방을 더 당겨 주었다.

사주는 거짓말 안 해. 내 말대로 사나 안 사나 봐. 사주는 도둑도 못 훔쳐가거든.

비실비실 일어나 뒤돌아섰을 때는 현기증이 일었다. 의자가 발길에 채여도 아픈 줄을 몰랐다.

아가씨!

사무실 문을 밀 때 남자가 불렀다. 어떤 희망 고문을 더 듣고 싶었을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남자의 반질거리는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방법이 딱 한 가지 있는데….

비식비식 걸어서 다시 마주 앉자 한 말은 부적이었다. 자기가 쓰는 부적은 효험이 특별해서 나 같은 사주를 가진 사람한테는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 깎고 중이 되거나, 신을 받아서 무당이 되거나, 자기처럼 사주를 배워서 철학관을 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국어선생님 중에서도 시 쓰는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윤동주를 쓰고, 백석을 쓰고, 김기림을 쓰고 싶었다.

만 번을 양보해서 선생님이 되지 못한다면 요리사라도 되고 싶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 것이다. 해가 뉘엿해질 때까지 들에 나간 엄마가 안 돌아오기에 어린 것이 쌀을 씻어 안쳐 밥을 지었다. 짚단으로 불을 때서 한 밥은 밑은 눌고 위는 선밥이 되었다. 시키지도 않는 짓을 했다고 어머니는 나무랐지만 아버지는 이 세상에 먹은 밥 중에서 제일 맛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다. 요리사의 꿈은 그렇게 생긴 것이다.

그런 내가 중이 되거나 무당이 되거나 사주쟁이가 되어야 한다니.

부적이라는 걸 쓰면 그런 사람 안 되나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일 이유 없었다. 새벽의 무당말대로라면 나는 내 사주를 아는 사람이다. 그렇다. 나는 선생님이나 요리사가 될 사주다.

그런데 하늘복, 땅복, 사람복이 없다 하니 선생님이나 요리사가 되려면 힘은 들 것이다. 그렇다면 부적이 어느 정도는 도와 줄 지 모른다.

얼마…예요?

70인데 특별히 40만 받을게.

남자가 제시한 금액은 내 지갑 속에 있는 돈의 액수와 정확히 일치했다.

아마도 내 맘 깊은 곳에 사주공부라는 일말의 가능성이 씨 뿌려진 순간이었을 것이다.

아, 이런 사람들은 남의 지갑 속도 다 보는 능력이 있나 봐.

어쨌든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고 싶었고, 땅의 도움을 받고 싶었으며, 사람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무엇보다 훌륭한 스승을 만나고 싶었다.

또 적게 일하고 많은 돈을 벌고 싶었고, 실수를 좀 해도 욕먹고 싶지 않았다.

중도 되기 싫었고, 무당되기는 더욱 싫었다.

그랬지만 남자가 부적을 쓴다고 기다리라 말하고 사라진 사이 후회가 살짝 밀려왔다.

정말로 부적 써서 지닌다고 하늘복, 땅복, 사람복이 생길까. 사기꾼 아닐까?

하므나 부적값은 남자의 손으로 넘어가 버린 뒤인 걸.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믿고 싶었다. 남자가 써 줄 부적의 효력을!

절대 열어보면 안 돼, 알았지?

십여분 뒤에 돌아온 남자의 손에는 노란 종이인지 봉투인지가 들려 있었다.

남자에게서 받은 종이는 도톰했는데 무명실 같은 것이 묶여 있었다. 실을 풀기 위해 고리를 잡았다.

풀지 말라니까! 열어보면 효력 말짱 꽝이라고 했잖아.

화들짝 놀란 나는 그제야 방금 전 남자가 열어보지 말라고 한 것을 기억해 내곤 핸드백 깊숙한 곳으로 집어넣었다.

핸드백을 닫으며 나는 어쩐지 불안했다.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내 성격이 결국 이걸 열어보고야 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저러니 간이 크다 하지. 또 열어 볼 생각하고 있구만.

저 사람은 어쩌면 정말로 특별한 사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주쟁이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 한 꺼풀이 또다시 벗겨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주 도둑은 없어도 부적 도둑은 있어. 특히 내 부적은 탐내는 사람 많아. 그러니 꽁꽁 넣어서 가. 꺼내면 아가씨 거 안 돼. 명심해야 해.

처음으로 신빙성이 느껴진 남자의 말은 사무실을 나와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서 믿음으로 바뀌었다.

일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중간에 서서 나는 결국 부적을 열어보고 말았던 거다.

알 수 없는 문양인지 글자인지 모를 붉은 글자만 어지러이 써 있을 뿐 별 다른 것이 없어 좀 실망스러웠던가.

아, 그리고 몇 분 후, 남자의 모든 말을 믿지 않을 수 없는 사건이 생겨버렸다.

터덜터덜 걷다가 달려오는 택시를 세우려는데, 어떤 남자가 길을 물었고 무심히 대답해 줬는데 뭔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앞에서 멈춰 선 택시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알았다.

내 어깨에 걸려 있던 부적 든 핸드백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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