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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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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den Aug 15. 2020

게임하는 남자

  안방에서 남편과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다.


  예전 같으면 아마 왜인지 모르게 속이 답답했을 거다. 애들이랑 밖에서 공을 차고 놀아주거나 집에서 영어책을 못 읽어줄 망정 왜 저러고 있나 한심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지금은 그저 아이들과 남편의 웃음과 편안한 대화가 새들의 노랫소리처럼 들린다. “올~아빠 왜 이렇게 잘해?” 큰 아이의 놀라워하는 소리가 들린다.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내적 환호를 참는 남편의 미소가 눈에 선하다. 저 모습은 부녀지간이 아니라 마치 남매들 같다. 남편 생일에 큰 맘먹고 게임용 책상과 의자를 사 준 게 참 잘한 일 듯하다.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했고 그래서일까 그때는 남편의 게임사랑이 얼만큼인지 잘 몰랐다. 대학 때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교대근무(?)로 24시간 게임을 돌렸다는 이 남자. 신혼 때에는 이 사람이 굉장히 많은 시간을 게임에 쓰고 있구나 알고 나서 실망감과 속상함이 있었다. 나는 게임이 재미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참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눈도 아프고 앉아만 있으니 허리도 아프고 뭣에 좋은지 모르겠는 게임. 모니터 안에 있는 캐릭터들을 아무리 키워 놓아 봤자 실생활에 눈곱만큼도 보탬이 없는데 참 부질없고 의미 없다고 생각한 나는 신혼 시절 남편과 부딪히기 시작했다. 매사에 이성적이고 효율을 강조하는 이 공대 남자는 왜 게임이 전혀 그렇기 못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걸까. 사실 남편은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집안 일도 반 이상 하는 모범 남편이었기 때문에 나는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답답했지만 쿨한 척 넘어가고 싶은 쿨병과 더 이상 간섭하기 싫다는 방관으로 그 시절을 지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남편의 그 여가시간도 내 맘대로 하고 싶었나 보다. 꼭 나와 함께 보내야 한다기보다는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들로 그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잠이라던가 운동이라던가 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남편은 내가 무엇을 하던 간섭하지 않고 오히려 응원해 주었다. 죽 끓듯 변덕이 심한 내 취미의 역사들을 두 눈으로 다 보아오고도 지금 내가 또 새로운 무언가에 열중한다면 그것 또한 응원해 줄 남편이다. 그런 천사 같은 남편의 유일한 취미를 내 기준에 안 맞다는 이유로 못마땅하게 생각했다니.


  문득 남편이 부러워졌다. 저렇게 행복할 수 있는 취미가 있다는 것이 부럽다. 나는 그런 취미가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정말 슬프게도 인생의 매 순간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 해 왔다고 생각했던 나에겐 그것이 없다. 부지런하게 이것저것 취미라고 건드려 본 분야가 많은데도 말이다. 그림, 수영, 코 바느질, 사진 찍는다고 샀던 dslr 카메라, 심지어 재미있겠다고 대학 때 플래시를 독학해서 홈페이지도 만들어 봤다. 순간순간의 호기심과 바로 해 보는 행동력을 가진 나는 참 많은 취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어떤 것도 남편의 게임처럼 나를 오랜 기간 질림 당하지 않고(?) 지켜준 취미는 없었다. 자기 꿈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 부러운 것처럼, 자기의 ‘인생 취미’가 무엇인지 아는 남편이 너무 부러웠다. 게임을 할 때마다 천사처럼 밝고 맑게 웃음 짓는 그의 미소가 정말로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한 건 이런 부러움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아는 남자 중에 또 한 명의 게임과 관련된 이가 있는데, 그건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평소에는 바둑을 좋아하시지만 바둑 둘 상대가 항상 있을 수는 없는 법. 아버지는 남편처럼 컴퓨터로 총 게임이나 스토리가 있는 게임을 하시지는 않았다. 컴퓨터에 기본으로 깔려있는 지뢰 찾기나 카드게임이 아버지의 주 종목이었다. 아버지가 게임을 하실 때에는 남편이 게임을 할 때 보이는 그런 소년 같은 미소는 없었다. 마치 캠프 가서 불을 피워 놓고 멍 때리는 것 같은, 그런 멍한 표정이셨다. 머릿속으로 지뢰의 추정 위치를 계산하고, 펼쳐져 있는 카드판을 주도 면밀하게 계획해 내는 아버지의 게임을 대하는 태도는 비장함과 나른함 그 사이 어딘가에 있었다. 엄마와 말다툼을 하시고 난 후나,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이 있었을 때, 혹은 좋은 일이 있었을 때에도 지뢰 찾기와 프리셸은 아버지가 머릿속을 정리할 시간을 함께 해 주는 친구였던 것 같다. 어렸던 나는 아버지의 그 모습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게임하는 동안만큼은 대화를 단절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아빠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어린 나로서는 당연했다. 그러고 보면 게임은 세상 쓸모없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나의 생각은, 이런 내 성장과정의 한 페이지와도 관련 있을 수도 있겠다.


  어른이 되고 나니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아버지의 게임. 거기에 환호는커녕 미소조차 없었어도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성취감의 목마름을 해갈해 줬으리라. 상하 복종관계가 뚜렷한 직장(아버지는 직업군인이셨다)에서 가족을 위해서 열심히 버티고 난 후, 누구에게 하소연조차 하기 귀찮고 싫은 힘든 날 그것은 아버지의 고단한 마음을 어루만져 줬으리라.  


  문득 궁금하다. 게임 말고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고작 40년 정도밖에 안 되는 내 인생의 경험들로 인해 나로부터 과소평가받고 오해받고 있는 것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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