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 박완서
그해 겨울 퇴근하는 전차 안에서 그 남자를 만났다. 남자가 먼저 반색을 했다. 그는 다짜고짜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누나라는 말은 묘했다. 마음을 놓이게도 섭섭하게도 했다.
31p 전쟁 중, 그 남자를 다시 만났을 때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서 창백하게 일렁이던 카바이트 불빛, 불손한 것도 같고 우울한 것도 같은 섬세한 표정, 두툼한 파카를 통해서도 충분히 느껴지던 단단한 몸매, 나는 내 몸에 위험한 바람이 들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36p 그 남자를 만나고 돌아와서
그 남자의 입김만 닿으면 꼭꼭 숨어 있던 비밀이 꽃처럼 피어났다. 그 남자하고 함께 다닌 곳 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가 있었던가. 만일 그 시절에 그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내 인생은 뭐가 되었을까. 청춘이 생략된 인생, 그건 생각만 해도 그 무의미에 진저리가 쳐졌다. 내가 그토록 감사하며 탐닉하고 있는 건 추억이지 현실이 아니었다. 나는 이미 그 한가운데 있지 않았다. 행복을 과장하고 싶을 때는 이미 행복을 통과한 후이다.
70p 전쟁이 끝나고 그 남자와의 기억을 돌아보며
엄청나게 많은 장정들이 죽거나 행방불명된 뒤이기 때문에 적령기 처녀들은 일종의 조급증에 걸려 있었다. 전민호를 만만한 아저씨에서 신랑감으로 격상을 시키니까 그야말로 웬 떡이냐 싶은 최고의 신랑감이 되는 걸 보고 나도 속으로 좀 놀랐다.
76p 전민호의 직업(은행원)을 알게 된 다음
그 남자도 나에게 어떤 마음의 부담도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비로소 나도 돌아앉아 눈물을 보였다. 답례처럼, 절차처럼, 그는 잠자코 있어도 되련만 계속해서 뒤라고 중얼거렸다. 두서없이 주섬주섬, 집 사고 판 일, 이사, 복학, 거기 따른 시시콜콜한 식구들의 참견 등, 이미 다 아는 사실을 변명처럼 다시 늘어놓는 건 그동안 나하고 소원해진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려는 절차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가 취한 행동은 그전부터 예정된 일이었다. 나의 눈물에 거짓은 없었다. 이별은 슬픈 것이니까. 그러나 졸업식 날 아무리 서럽게 우는 아이도 학교에 그냥 남아 있고 싶어 우는 건 아니다.
95p 그 남자에게 결혼 소식을 알린 후
그게 내가 벼락 치듯 깨달은 정답이었다. 나는 작아도 좋으니 하자 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다. 그 남자네 집도, 우리 집도 사방이 비 새고 금가 조만간 무너져 내릴 집이었다. 도저히 새끼를 깔 수 없는 만신창이의 집,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내 새끼를 위해 그런 집은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답이 나오면 비밀은 없어진다. 나는 그렇게 초라해지고 싶지 않다. 인생이 살 만한 건 정답이 없기 때문인 것을.
101p 시간이 흘러 작아도 좋으니 하자 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으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끼를 위해 그런 집(그 남자네 집)은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을 깨달은 후
그저 하숙 칠 궁리지 손자, 며느리, 과년한 딸한테는 어떤 방을 쓰게 한다는 계획 같은 건 처음부터 들어 있지 않았다. 엄마에게 사랑의 기억이 서려 있지 않은 집은 차라리 영업장인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맏손자가 겨우 따로 선 날부터 대청마루 기둥에다 키를 새기기 시작했다. 아이의 키는 무럭무럭 자랐다. 안남냇가 집에는 지금도 그 눈금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집에 안 돌아오게 되자 눈금도 성장을 멈췄다. 아이는 계속해서 자랐다. 엄마는 그런 보이는 기억, 안 보이는 기억들을 짜던 비단폭 자르듯이 싹둑 자르고 새로운 피륙을 짜려 하고 있었다. 엄마가 모진 마음먹고 잘라 버린 것들 중엔 딸에 대한 꿈도 포함돼 있다는 걸 나는 섬뜩하게 실감했다.
62p 하숙을 치기 위해 준비하는 어머니를 보며
아이들은 심심했다. 놀이에 굶주린 아이들에게 양아치 짓은 스릴 넘치는 장난이었다. 그 바닥에서 이름 난 악동도 아마 저녁상에선 선량한 부모의 예절 교육을 받을지도 모르고, 궁한 엄마는 세뱃돈 알겨먹듯 아들이 번 잔돈푼을 넘볼지도 모른다.
67p 전쟁 후 소매치기, 갈취를 일삼는 아이들을 보며
나는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쌍쌍이 붙어 앉아 서소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든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통수가 머쓱했다. 온 세상이 저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치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둑거렸다.
102p 경양식집에서 어색함을 느낄 때
민어를 아무리 잘 요리해도, 양곱창을 아무리 잘 손질해도, 그 맛의 극치나 진수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민어는 민어맛을 벗어날 수 없고, 소 내장은 결코 은근한 소똥 냄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기가 굴비됐다고 해서 조기맛과 딴맛이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민어맛이나 준치맛의 궁극까지 도달했다고 해서 어쨌다는 것일까. 누가 상을 줄 것도 아니고 인간이 신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136p 미식만을 추구하는 시집 생활에 지치다
창가에서 저녁 햇살이 엷어지다가 마침내 회색빛으로 사위어가는 걸 망연히 바라보면서 가까스로 그렇게 자신을 이해했다. 이 세상에 순결한 전쟁터가 어디 있다고.
220p 조카 광수를 보내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