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네 집 - 박완서
그저 하숙 칠 궁리지 손자, 며느리, 과년한 딸한테는 어떤 방을 쓰게 한다는 계획 같은 건 처음부터 들어 있지 않았다. 엄마에게 사랑의 기억이 서려 있지 않은 집은 차라리 영업장인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맏손자가 겨우 따로 선 날부터 대청마루 기둥에다 키를 새기기 시작했다. 아이의 키는 무럭무럭 자랐다. 안남냇가 집에는 지금도 그 눈금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집에 안 돌아오게 되자 눈금도 성장을 멈췄다. 아이는 계속해서 자랐다. 엄마는 그런 보이는 기억, 안 보이는 기억들을 짜던 비단폭 자르듯이 싹둑 자르고 새로운 피륙을 짜려 하고 있었다. 엄마가 모진 마음먹고 잘라 버린 것들 중엔 딸에 대한 꿈도 포함돼 있다는 걸 나는 섬뜩하게 실감했다.
62p 하숙을 치기 위해 준비하는 어머니를 보며
전쟁 이후에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에도 살아가는 아이의 모습, 딸의 꿈(공부)을 뒤로하고 하숙을 통해 삶을 이어가려 하는 어머니의 의지가 비참함을 더합니다.
아이들은 심심했다. 놀이에 굶주린 아이들에게 양아치 짓은 스릴 넘치는 장난이었다. 그 바닥에서 이름 난 악동도 아마 저녁상에선 선량한 부모의 예절 교육을 받을지도 모르고, 궁한 엄마는 세뱃돈 알겨먹듯 아들이 번 잔돈푼을 넘볼지도 모른다.
67p 전쟁 후 소매치기, 갈취를 일삼는 아이들을 보며
사람은 내적 요인(유전)과 외적 요인(환경)의 집합체이다.
개인적으로는 꽤나 설득력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하는데, 요즘 사건의 원인을 지나치게 개인 혹은 환경에 돌리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환경적인 요인을 나열하며 "모른다"라는 표현으로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 재미있습니다.
나는 마지못해 자리를 떴다. 쌍쌍이 붙어 앉아 서소를 진하게 애무하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늙은이 하나가 들어가든 나가든 아랑곳없으련만 나는 마치 그들이 그 옛날의 내 외설스러운 순결주의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통수가 머쓱했다. 온 세상이 저 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치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둑거렸다.
102p 경양식집에서 어색함을 느낄 때
"넘칠 때 낭비하는 것은 미덕이다"
스스로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민어를 아무리 잘 요리해도, 양곱창을 아무리 잘 손질해도, 그 맛의 극치나 진수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민어는 민어맛을 벗어날 수 없고, 소 내장은 결코 은근한 소똥 냄새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기가 굴비됐다고 해서 조기맛과 딴맛이 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민어맛이나 준치맛의 궁극까지 도달했다고 해서 어쨌다는 것일까. 누가 상을 줄 것도 아니고 인간이 신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136p 미식만을 추구하는 시집 생활에 지치다
첫째, 개인적으로 100% 동의했습니다.
둘째, 위와 같은 생각의 기저에는 '먹는 것'을 하위 욕구로 보는 가치관이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매슬로우의 욕구위계이론(생리적 → 안전 → 사회적 → 존경 → 자아실현의 욕구)을 떠올리면 대략 느낌을 잡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여기까지는 몇 년 전의 제가 가졌던 생각입니다.
셋째, 정말 그럴까요?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와 가벼움』에서 삶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라고 말하며 그 속에서의 조화를 말하는데,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면 미식의 즐거움을 낮게 보는 것 또한 적절한지 생각하게 됩니다.
창가에서 저녁 햇살이 엷어지다가 마침내 회색빛으로 사위어가는 걸 망연히 바라보면서 가까스로 그렇게 자신을 이해했다. 이 세상에 순결한 전쟁터가 어디 있다고.
220p 조카 광수를 보내고
저녁 햇살에 대한 묘사,
자연에 대한 묘사를 모읍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