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과 양심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by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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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은 무엇이고 또 윤리란 무엇이란 말인가?

선함은 무엇이고 악함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동서양의 근대 철학자의 윤리학에

대한 접근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중 15세기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는

도덕에서 윤리를 어떻게 구별하려 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는 인간은 마주침의 존재로 이 마주침은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마주침은 우리의 삶의 의지로, 이를 코나투스라

하고 이 코나투스가 증가되는 경우를 '좋음(good)

이라고 하고, 반대로 감소되는 경우를 '나쁨(bad)

라고 했다.


이 좋음과 나쁨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적

이며 상대적인 범주라 할 수 있는데

이는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는 사전에 미리

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윤리적 행동을 이 좋음을 지향하고

나쁨을 피하는 것이라 정의했다.


그렇다면 스피노자는 도덕을 어떻게 정의할까?

그는 도덕 법칙이 인간의 자유로운 마주침을 부정하면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이 타인과 만나서 좋음과

나쁨을 느끼기도 전에, 도덕 법칙은 미리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결정해놓았다고 보았다.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에서 '선악을 넘어서'라는

표현이 있는데 니체는 선악이 적어도 좋음과 나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선과 악이 공동체적 차원의 논의라면,

좋음과 나쁨은 개인 차원의 논의다.

따라서 공동체의 선과 악이 개인 차원의 좋음과

나쁨과 불일치가 발생하기 때문에

"선악을 넘어서는 이것이 좋음과 나쁨을

넘어서라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즉 사회가 규범 한 선악을 따르지 말고 자신의

기쁨과 슬픔을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스피노자와 니체의 윤리에 대한

사유는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 개인의 편에 서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의 사상은 국가나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불순하기 이를 데 없을 정도로

혁명적이다.


그러나 그 혁명성은 점차 희석되어

오늘날 우리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윤리학은

동정심의 윤리학 혹은 자율의 윤리학이 자리 잡고

있다. 바로 흄의 윤리학과 칸트의 윤리학이다.


분명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근대적 윤리학이었지만, 흄과 칸트의

동정심의 윤리학이나 자율의 윤리학은 인간이

가진 가장 원초적인 감정 , 기쁨과 나쁨을 우회해

버리고 만다.


그러니 개인의 윤리학이라고 할지라도,

동정심과 자율의 윤리학은 결국 도덕의 변형된

형태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쉽게도 현대의 윤리 개념에서

공동체의 선과 악이라는 범주가 개인차원의

기쁨과 나쁨이란 범주를 압도하고 있다.


흄의 윤리는 동정심으로부터 출발한다.


인간이 가진 선천적인 동정심에서 윤리성의 기초를

찾으려고 시도했던 데이비드 흄은 네덜란드

근대 철학자다.


흄의 동정심은 쇼펜하우어처럼 형이상학적이지

않다. 경험론자답게 그는 동정심도 고통을 겪었던

지신의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보았다.

흄에 따르면 동정심은 우리가 겪은 고통의 경험에서

타인의 경험을 추론하면서 생기는 감정일 뿐이다.


흄은 인간 본성에 관한 논고에서 다음과

같은 사례를 든다.


무시무시한 외과수술을 시작하기 전 수술을 받는

사람 앞에 놓인 수술도구를 보면 이것이 나의 마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매우 강한 연만과 공포의 감정을

유발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느끼는 고통의

정념 그 자체가 직적 나의 마음에 느껴질 수는

없으나 결과적으로 이것들이 우리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결국 동정심이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인식에서

촉발되는 나의 고통에 대한 회상 혹은 기억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동정심을 경험론적으로 설명하는 흄이 말하고

싶었던 깃은 윤리적 행위가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동정심이 들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동정심이 들어야 그다음 단계로 우리의 이성이

작동해서 어떻게 그 고통을 완화시켜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즉 흄의 동정론의 윤리학은 이성은 정념 passion에 복종하는 노예로 이성만으로는

우리는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도덕성의 법칙들은 우리 이성이 내리는

결론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고 흄의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고에서 기술하고 있다.


도덕은 기본적으로 이성 차원이 아니라 감정 차원에서

다루어야만 한다. 그것이 동정심이어도 되고 분노여도

상관없다. 따라서 흄의 동정심 윤리학에 따르면

타인의 처지에 대한 어떤 공감이나 동정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윤리적일 수 있다.


여기서 윤리적으로 문제가 발생한다.


노숙자에게 측은한 동정심이 생겨서 이성적으로

도와주어야겠다는 이성이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도와주게 되면 노숙자가 나약해지므로

도와주면 안 된다는 이성이 작동한다면 이성은

우리의 정념을 돕기는커녕 방해하고 마는 것이고

여기서는 윤리적인 실천이 일어나지 않는다.


자연과학의 법칙처럼 혹은 사회의 법률처럼 도덕도

이성적인 인간 활동이라고 보는 사람들로서는 흄의

생각이 너무 인위적이라 불편하다.


그러나 흄의 동정심 이론은 현대 윤리학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동정심과 같은 따뜻한 감정이 없이

인간에 대한 의무만으로 이루어진 선행을 윤리적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현대의 감정 윤리학은 셀러의 현상학에서 정점을

이룬다. 동정을 중요한 윤리적 계기로 인정하지만

셸러는 더 나아가서 사랑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고통

보다는 더 깊게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동감이든 사랑이든 셸러가 지향하는 윤리학은 어느

경우든 이성 중심의 윤리학, 혹은 그의 말대로 형식주의

윤리학이 아니라 실질적인 윤리학이라 할 수 있다.


윤리적인 문제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올바른가 하는 문제다. 흄은 동정심이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서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윤리적

근거라고 보았다. 그러나 동정심은 나와 타인을 연결할

수 있는 중요한 윤리적 매개가 될 수도 있지만 개인의

변덕 혹은 상황의 차이에 따라 전혀 다른 양상으로

드러나는 심각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이 점을 가장 예민하게 의식했던 칸트는 윤리를

변덕에 노출되어 있는 수동적인 감정 차원이 아니라

감정이 변할지라도 항상 그 보편성을 유지할 수

있는 도덕 법칙의 차원에서 정당화하려고 노력하였다.


"너는 네 의지의 준칙에 의거하여 자기 자신을 동시에

보편적인 입법자로서 간주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행위

해야만 한다"이것이 칸트의 <도덕 형이상 학원>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결정과 행동들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허용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도덕심이나 양심은 어디에서 발현되는가?

흄은 동정심에서 셸러는 동정심과 사랑이라는 정념에서

나타나고 그것으로 윤리적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칸트는 감정이나 변덕스러울 수 있으므로

스스로에게나 타인에게도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도덕률이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개인의 동정심과 사랑만으로 충분히 윤리적일 수

있는가 아니면 보편적인 도덕 법칙이 있어야 하는가?


수능시험에서 윤리와 사상이 포함되는 이유는

교과과정에서 이런 문제들을 사유하고 질문해

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현실은 개념은 빠지고 외워서

실전 문제만 풀다 보니 배우고 배워도 어렵고

어려운 것이다.


사탐 윤리와 사상, 생활과 윤리에서 1등급은

이런 내용을 깊이 있게 사유하고 질문할 때 나온다


Plato Won





Plato Won




















않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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