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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윤리학의 본질은 "善을 행하지 마라"
by
Plato Won
Apr 16. 2020
동양의 윤리학은 맹자의 사단,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에서
출발한다.
맹자는 이 네 가지 마음이 주체의 의식적인 노력이나
판단으로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서
직접 발현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근거해 맹자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윤리적인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맹자의 성선설이다.
성선설의 대표적 상징은 사단 가운데서도 측은지심,
이라는 동정심이다. 맹자가 말하길 우물에 빠진 아이를
보고 우리는 동정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측은지심이다고
했다. 이
때문에 동양의 윤리학은
동정심 윤리학으로 규정될 수 있다. 후에 신유학에
이르면 측은지심은 만물 일체, 즉 모든 존재자들이
나의 수족처럼 느껴지는 우주론적 감정으로까지
확장된다. 동양의 윤리학이, 우주적 연대감으로서
동정심을 강조했던 흄의 동정심 윤리학, 쇼펜하우어
의 형이상학과 가까워지는 것도 이 대목에서다.
그러나 서양의 철학에서 동정심이란 선천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 사유되지
않고 누적된 자기 경험을 외부로 투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간주된다. 이것이 바로 흄의 입장이다.
즉 감정이란 습관적인 반응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인 것이다. 감정은 본능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경험의 산물이라고 이해된 것이다.
하지만 윤리란 결단과 책임의 문제를 수반해야 하는
것이므로 개인의 변덕이나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흄의
윤리적 관점에 대한 문제 제기로 칸트는 자율적인
윤리학을 주장했다.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기 위해서, 그 행위자는
자율적 결단의 주체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동정심을 포함한 일체의 감정들에 입각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선한 행위를 이끌었다고 할지라도,
감정에 사로잡힌 주체는 자율적인 주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명료한 의식, 고뇌에 찬 결단만이
주체에게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책임을 묻는 것을
가능하도록 해준다고 보았다.
표면적으로 흄과 칸트의 윤리에 대한 입장이 상이하고
대립적이라고 보이나 양자는 모두 주체의 윤리학을
피력하고 있다. 흄의 동정심이나 칸트의 결단은 모두
일인칭 그러니까 오직 주체라는 영역 안에서 발생한다.
그러니 두 경우 모두 타인에 대한 고려란 있을 수 없다.
즉 자신의 윤리적 행위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두 사람은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와서 들뢰즈나 레비나스의
경우처럼
타인이 윤리학의 영역 중심부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의 동정심을 타인에게 관철시키거나 혹은 나의
윤리적 결단을 타인에게 적용하는 윤리학은 유아론적
일뿐만 아나라 폭력적이기까지 하다는 반성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타인의 윤리학이란 전적으로 타인의 의지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도 파괴하지 않고 자신도 파괴하지
않는 윤리학이라 할 수 있다.
장자의 인간에 편에 따르면
"대붕이 바람을 타지 않는다면
날 수 없듯이 인간은
타인 와의
관계에서 자유를
얻어야 한다.
타인을 자신의 수레로 삼아 마음이
움직이도록 하고,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것에
의존해서 균형을 기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라고
했다.
이는 타자의 고유성과 자기의 고유성이 모두 긍정될
수 있는 어떤 균형 지점에 우리는 이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장자의 중용이다.
원효가 말하길 옛날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 자기
아들에게 훈계하기를."스스로 조심해서 선을 행하지 않으려고 해야 한다" 고 하였다.
이에 아들이 반문하기를
"그럼 악을 행하란 말입니까?" 하자 아버지는
답하길 "선마저도 행하지 말라는데 하물며 악을
행해서야 되겠느냐"라고 하였다.
아마 자율의 윤리학을 주장한 흄과 칸트가 이 말을
들었다면 큰 지적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원효가 이야기하려 했던 것은
바로 타자의 윤리학이다.
"너희가 생각하고 있는 선과 악은 결국 너희 마음에만
있는 것이지, 세상 혹은 타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는 지적이다. 한마디로 주체의 윤리학에서
벗어나 타자의 윤리학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주체의 윤리학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을 행했는지
의 여부일 뿐, 선을 행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국 주체의 윤리학은
타자를 사랑하기 보다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윤리학
일 뿐이다. 이와는 달리 타자의 윤리학은 자기 자신보다
타자를 사랑하는 윤리학이라 할 수 있다.
원효의 선을 행하지 말라는 예전 동양에서는
타자의 윤리학이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대변해준다.
도덕이나 윤리의
본질에 대한 접근에서
동양적 윤리사상이 서양적 윤리사상보다 고전부터
훨씬 더 이타적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도덕이나 윤리, 예절은 나 자신이 고상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을 먼저 고려하면서 선행
하는 것일 때 진정한 빛을 발휘한다.
사회 공동체 모두가 이타적일 때 그것은 곧 돌고
돌아 나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는 점에서 타자의 윤리학
이 돋보이는 사상임에 틀림없다.
타인을 기분 나쁘게 하는 선행은 선행이 아니라
폭력이라는 점 숙고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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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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