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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ato Won Jul 04. 2018

철학과 사진 한 장


1990년 2월 용인 삼성인력개발원 연수원,
난 삼성공채 30기 26차  대졸공채 신입사원 수료식을
앞두고 있었다.

당시 삼성그룹은 50여 개나 되는 계열사의 대졸
공채신입사원 선발을 그룹에서 일괄적으로 실시하고
용인 삼성인재개발원에서 3개월 간 연수를 실시
하였다.

수료식 직전 그룹 비서실 인사팀에서 개별면담을
실시,최종적으로 계열사와 업무 직군을 결정한다.

사실 나는 삼성그룹에 입사할 생각이 없었다.
삼성이란 어떤 조직인지 딱 일주일 만 연수원 생활을
경험한 후,바로 그 다음 주에 있는 제일은행 연수에
참여할 예정이였다.

그러나 나는 해병대 의장대 복무경험으로 얼떨결에
30기 26차 기수단장을 맡게 되었다. 역할은 매일
아침 6시, 기상과 동시에 연수원 운동장에 집합하여 삼성체조와 삼성찬가를 부를 때  삼성사기를 들고
기수 선봉을 맡는 것이다.

이름도 거룩한(?)삼성공채 30기 26차 기수단장을
맡아, 매일 아침 기상 나팔소리와 더불어 제일 먼저
대열을 정비할 수 있도록 삼성사기를 들고 중심을
잡고 있는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그런 내가 갑자기  은행에 입사하기 위해 삼성
연수원을 나온다면 사기충천 해 있던 동기들을
배반하는 일대 중대 사건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고 남자의 의리를 목숨보다 더 중히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 그런 식으로 동기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그렇게 나의 인생은 뜻하지 않게 계획된
인생항로가 급 변경되었고 이후 나의 진로는
현기증 날 정도로 변화무쌍하고 다이나믹하게
전개 되었다.

50여 개나 되는 삼성계열사 중 나는 기수단장을 맡은
이유로 내가 원하기만 하면 당시 제일 선호하였던
회사로 지원하여 입사할 수 있었으나
굳이 신생 회사인 삼성에스원을 선택하였다.

당시 매출액 천억원 내외의 이름도 없었던 에스원을
선택하였던 이유는 10년 후의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기 때문이였다.이미 사업이 안정적으로 정착된  삼성계열사 보다는 신생회사에서 보다 많은 일들을 중추적으로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선택을 주저
할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 동기는 삼성그룹공채 30기로
에스원에서 최초로 그룹공채를 받아 들인 그룹공채
1기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도 있었다.

이후 나의 삼성에서의 10년 회사생활은 화려함 그
자체였다.특진을 두번 씩이나 했으며,삼성에서 최초
도입한 지역전문가 제도의 혜택을 받아 삼성멕시코
지역전문가로 선발되어 멕시코국립대학에서 공부
할 수 있었다. 이때가 1996~1997년도로,소중한
경험 두 가지를 간직할 수 있었다.

하나는 전세계 교환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며
인터넷 사업의 가능성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되었고

두 번째는 국가 외환위기 후 부의 지도가 바뀐다는
사실을 알았다.멕시코는 외환위기를 겪었던 나라로
외환위기는 오히려 기회라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국가는 부도가 날 수가 없으며 외환위기 후 오히려
이를 잘 대처하면 엄청난 부를 축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삼성 에스원 10년 근무 동안 원없이 신규사업을
전개하고 추진해 보았다.사실 신규사업을 기획하고
발굴해서 런칭시키고 안착시키는 일은 명작의 그림을
구상하여 창작하는 예술활동과 같아 흥분감을 안긴다.

그 짜릿한 맛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지 못한다.
마치 마약에 취한 듯 그런 황홀감을 안겨 준다.

백화점에서 사용되는 상품도난방지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도입하였고,무인화은행의 CD/ATM VAN
사업을 최초로 사업구상 하여 상용화하였으며,삼성
에스원의 물리적 보안시장을 사이버보안시장에 진출
하는 기획안은 시큐아이닷컴을 탄생시켰고,대규모
시설단지의 종합시큐리티사업부인 SI사업 신설을
주도하였으며,삼성에스원의 가칭 청년중역회의
의장을 맡아 신규사업을 직보하고 진행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신명나게 일하던 나는 삼성멕식코지역전문가
시절 구상하였던 사업아이템을 구체화하였다.

1999년 드디어 나는 Dynamic Pricing Algorithm
System이라는 전자상거래 특허를 출원하고 사업
아이템을 다듬고 있다가 청년중역회의의장 자격으로
당시 삼성에스원의 배동만 대표이사님께 신규사업을
보고하여 삼성에스원의 전무후무한 사내벤처로 지정
받아 사업을 시작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사실 나는 배동만 대표님께 보고 드릴 기획 안을
한 달째 다듬어 보고서를 만들었다.당시 인터넷,
전자상거래라는 생소한 용어,사업아이템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파워포인트를 만들고
한시간 반 동안이나 보고하였다.

가만히 들으시던 배동만 대표님께서는 "사실 내가
원 군 자네 이야기를 다는 이해를 못했지만 자네의
그 눈빛과 열정을 보니 어떤 일을 해도 잘 할 것 같다.
의지를 굽히지 말고 끝까지 하고픈 사업을 진행해
봐라" 라고 하시며 예산 10억원을 신규사업에 배정
해 주셨다.배 대표님의 그때 그 의사결정이 없었다
면 나의 이후 사업도 없었을 것이다.감사하고 감사한
분이고 큰 은혜를 입었던 분이시다.

그렇게 나의 의지는 불타 올라 당시는 스스로 생각해도
뭔가 쇠덩이도 녹일 만큼의 열정과 자신감이 충만한
시절이였다.그렇게 나의 사업은 삼성사내벤처라는
타이틀로 시작되었고 역삼동 충현교회 근처 상은빌딩 지하실에 아지트가 마련되어,마치 신밧드의 모험처럼
그렇게 미지의 신세계를 향한 모험의 여행은 시작
되었다.

당시에는 약간의 흥분감과 두려움이 있었던 듯 하고
미래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발동하여,낮에는 삼성
에스원의 팀장으로,밤에는 아지트에서 사내벤처
소사장으로서 하루 24시간을 풀로 가동하는
진군에 진군을 하였다.

그러나 사내벤처를 하면 할수록 어려움은 더욱 더
커져만 갔다.예산을 집행하려면 일일이 관련부서를
찾아다니며 설득에 설득을 해야 하였고,회사 내 정보
보안팀의 못마땅한 시선과 견제는 또 다른 복병으로
다가왔다.

몇일 밤을 지새우며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깨지더라도 밖으로 나가 부딪혀야 쪽박을 차든
대박을 터트리든 결론이 나올 것 같았다.

사실 삼성사내벤처라는 제도가 나의 미래에 대한
안전판으로 작용해,실패해도 돌아갈 곳이 있다는
안이함을  느끼게 하여 헝그리 정신이 발동되지
않고, 계속되는 의사결정이 한방없이 안이하게
흘러가며 구조적으로 큰 의사결정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당시로는 제법 큰 여유자금도 있었다.
1990년 신입사원 입사 시 바로 위에 모시던 부서의 과장님들이 분당,일산,중동 신도시 아파트 청약대열에
합류하여 집을 장만하는 일련의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조만간 나의 고향 부산에서도 신도시
바람이 불 것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1994년 드디어 부산 해운대 신도시 청사진이 발표
되고 최초로 주공에서 24평형 아파트를 분양하였는데
대규모 미달사태가 발생하였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주공 꼭대기층에서 청사포
해변이 훤히 바라다 보이는 전망 최고인 아파트가 대량
의 미분양 사태로 계약금 삼백만원만 있으면 그냥
한 채가 뚝딱 내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때 교통이 멀다,인프라가 부족하다 등등의 이유를
대며 머뭇거리고 있었고 주공은 대량의 청약미달
사태를 돌파하기 위해 더욱 더 파격적인 조건이
내 걸렸다.분양 중도금 무이자 대출,임대사업자
세금감면 등등 ᆢ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특혜 중에
그런 특혜는 없을 것이다.

하여간 나는 주말에 부산에 내려가 주공 분양사무실
을 방문, 담당 여직원이 24평 미분양 한 채를 팔기
위해 열심히 설명하는 중간에 말을 끊고 " 저 아가씨
빨강 색연필 좀 가져다 주세요."하고는 그 빨강
색년필을 들고 미분양 동호수 중  가장 해운대 청사포
앞바다가 잘 보이는 10채를 빨강 색연필로 쭈욱
아래로 그어 표시를 하고는  "이거 내일 계약금
10채 3천만원 입금할테니 다른 사람 주시지 말고
가계약 지금 할 수 있죠"이렇게 이야기를 던졌다.

그렇게 난 졸지에 10채의 아파트를 가진 임대사업자가
되었고 그 아파트 일부를 정리해 사업자금의 씨드머니
1억5천만원은 그리 마련되었다.

사실 나의 재테크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화려했다고
해도 무방하다.삼성에스원이  90년대 중반 상장을
추진할 때 난 그 가능성을 누구보다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당시 상장가격 대비 적어도 열 배는 무난한 수익이
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물량을 구할
수가 없었다.나는 바로 장외시장에서 업계 2위 기업인
캡스주식을 사모아 꽤 큰 수익을 남기기도 하였다.

96년 외환위기 전, 난 쌍용증권 우선주를 주당 8000원
대에 보유하고 있었는데 삼성멕시코지역전문가를 마치
고 귀국하니 주식이 주당 80원까지 내려가 휴지조각이
되어 있었다. 멕시코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국가는
부도가 나지 않는다는 생각과 증권주는 허가사업이므로 설사 부도가 나도 인수가치가  있을 것으로 판단,
80원짜리 쌍용증권 우선주를 사들였다.

일종의 물타기 이자 베팅인 셈이다.그리고 당시
모시고 있던 상사분들에게 살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결과는 80원짜리 주식이 1년 만에 12,000원까지 폭등하면서 그 수익금은 99년 사업준비하고 2000년
대 초에 강남에 40평대 아파트를 구입하는 자금 등으로 소중히 쓰였다.

그 돈들이 굴러 굴러서 지금의 판교단독주택으로,기타
자산구입자금 등으로 소중히 성장해서 나의 주요 자산
구성요소들이 되어있다.

최근 술자리에서 그때 모시던 상사분이 왜 그때 증권
우선주를 사야하는 이유를 멕시코 경험과 연결시켜
이야기 하지 않았냐고 말씀하셔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철학은 정의고 정의는 권리와 의무의 균등이다.
수익을 얻을려면 리스크도 감수해야한다.리스크
없이 수익만 취하려 한다면 그것도 공평하지 못하다.
다만 만인이 위험하다 해도 내 기준에서 그 위험을
헷지할 수 있으면 기회가 왔을때 베팅쳐야 한다.
의사결정을 해야 할 때 겁을 먹고 결정을 하지 못하면
그 자체가 더 위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요즘에는 일절 주식투자 등 재테크는 하지 않는다.
이유는 사업하는 입장에서 정신이 분산되며,내가
하는 사업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난 주식과 관련된 특별한 경험들이 많다.
1999년 디지탈밸리라는 IT 벤처기업을 창업하고
주당 5000원 짜리 주식을 주당 80만원에 유상
증자 해 100억원을 투자 받았다.

무려 160배나 할증해서 투자를 받은 것이다.
거기에다 삼성사내벤처 출신 기업이라는 프리미엄이
붙었고 내가 가진 특허인 다이나믹가격결정알고리즘이
인정받아 손정의가 운영하던 넷에이지라는 일본VC의
투자를 받아 일본 시부야에 해외법인을 진출하는 등
초기 스타트가 화려했다.

어느날 지인을 통해서 당시 새롬기술의 주주동호회
회장이란 분이 만남을 요청해 자리를 가졌다.

그 자리에서 이 분이 요청하기를 내가 가진 주식
오백만주 중 오십만주를 장외시장가격의 30%할인
해서 사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다.

액면분할로 500원 짜리 주식이 장외에서
13~140,000원대에 거래되었으니 십만원씩만 잡아도
오백억원의 현금을 쥘 수 있는 솔깃한 제안이였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좌고우면하지 않고 단 번에
거절했다.이유는 간단했다.나는 긴호흡을 가지고
제대로 사업 해 보고 싶은데 그렇게 주식을 팔게 되면
쫒기듯 회사를 키워나가야 한다는 중압감이 싫었고
회사 창업한지 6개월 만에 회사가치가 6천억원에
육박한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그 주식은 단 한 주도 팔지 않고 지금까지 보유
하고 있다.이후 영어회사와 합병하여 공동경영을
하며 전국 1,700개 가맹학원을 가진
지앤비교육의 창업자로, 워크홀릭으로 일하면서도
난 단 한 주도 팔지 않았다.

2013년 이후 뜻하지 않게 경영권 분쟁으로 5년이란 백수생활을 하면서도 상대방의 회사공동매각의 제안도
받아 들이지 않았다.주변에서는 회사 복잡한데 주식
팔고 그 돈으로 다시 사업 시작하라는 조언이 있었으나
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난 리더고 나를 따르는 직원들이
있는데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명분도 없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잘못으로 내 인생의  길이 틀어
지는 것도 원치 않았다.

2013년 자존심이 엄청 상했다.말로 형언할 수 없는
모멸감이였다.30건이나 되는 소송들,나를 따르던
직원들의 해고,차가운 듯한 주변시선 등등 ᆢ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막은 그저
바보멍청이 처럼 누워있는 것 밖에,그리고 이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그렇게 인고의 5년이란 세월이 흘렀고,비우고 비우기 연습을 반복했다.

사무실에 걸려 있었던 사진을 떼어 와 집에 걸어놓을
수가 없었다.2002년 당시 신문기자가 각 부분별
대표성이 있는 말띠 생 인사를 취재할 때, 정치분야
에서는 임종석,벤처분야에서는 원종호가 선정되어
찍은 사진과 신문기사 내용 타이틀 제목
"위험과 기회를 감지하는 눈"이 유독 눈에 밟혔다.

"아니 위험과 기회를 감지하는 눈을 가졌는데 왜
나는 그런 사람을 못 피했을까?멍텅구리같은 놈"

자책감에 묻어 두었던 저 사진첩을 집에서 비품
정리하다 발견했다.소복히 앉은 먼지를 털어내며
나는 생각했다.

과거의 아픔을 털어내고
과거의 악연을 떠나 보내자고 ᆢ

비우니 채워진다고 악연을 떨쳐버리니
새로운 기운과 인연이 샘쏫는 것을 ᆢ

이제 먼지를 털고 어디 적당한 사무실
한 켠에 저 사진을  걸어 놓으리 ,

그리고 새로운 기운과 새로운 인연을 만나
알프스 산자락을 오가는 꿈꾸는 목동으로 살아가리니 ᆢ

                                  Amor fati


  
ᆢ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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