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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ato Won Nov 16. 2020

2. 영국의 산업혁명과 빅토리아 시대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의 시대적 배경

박토리아 여왕 대관식
통치기간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여왕 통치 50주년 기념식
빅토리아 여왕 장례식
영국 산업혁명

밀의 자유론의 배경에는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물결이 있었다. 또한 당시는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시대이기도 했다.


18세기 중엽 시작된 영국의 산업혁명(1760~1850)

은 재화의 생산에 기계를 광범위하게 이용해 가는

경제 성장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산업혁명으로 1인당 국민소득의 증가가 나타나는

근대적 성장이 지속되는 현상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산업화, 도시화의 급속한 발달로 빈부격차의 심화,

노동력 착취 등의 문제가 대두된 일련의 과정이기도

다.


그렇다면 산업혁명이 당시 여러 다른 경쟁력 있는

국가가 아닌 영국에서 시작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영국이 다른 지역에 비해 인건비가

압도적으로 높다 보니 인건비를 절감해 주는 기계

발명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영국이 이렇게 인구압이 낮고 인건비가 높았던 이유는

유럽에서 주로 재배되던 작물인 밀의 생산성이 동양의

쌀에 비해 훨씬 낮았다는 데 있다. 밀과 호밀의 농사는

지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에 생산성이 저하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신대륙으로 인구이동도 그 원인

되었다.


또한 영국은 17세기부터 시작된 금융시장의 혁신

덕분에 저금리를 통해 저렴한 비용으로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금이 산업의  공업화를 촉진시켰고 풍부한 석탄으로 인해 세계에서 가장

저렴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었던 영국 환경은

공업화에 불을 지폈다.


나아가 영국은 막강한 해군력을 보유하여 다른 식민지

들과 교류할 수 있는 물류네트워크를 지켜며 거대한

시장을 확보하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유럽의 전쟁 상황을 피해 영국으로 건너간

지식인과 자본의 존재 그리고 뉴턴과 같은 과학자들을

우대한 영국의 전통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다


밀은 영국 사회가 정치, 경제적으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던 빅토리아 시대에 자유론을 저술하였는데

빅토리아 시대는 산업회가 진행됨과 동시에 의회

정치의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던 시대로,

이것이 다수의 횡포라는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빅토리아 여왕은 국민의 애정, 전통에 대한 동경,

그리고 충성심 높은 중산층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더욱 강화된 의례적인 군주제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녀는 영국 그 자체다."


전기 작가 스탠리 웨인트럽의 찬사다.


유럽사에 있어 19세기는 영국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구가 돌아 밤이 오더라도 세상

어딘가 식민지 중 한 곳은 낯이기 때문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영국을 불렀다.


19세기 영국은 산업자본주의 국가인 동시에 의회

민주주주의 국가이자 제국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영광의 뒤안길에는 하층 빈민층의 희생과

약소국에 대한 착취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다. 


빅토리아 시대는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64년 기간을 한다.

19세기의 2/3를  차지하는 이 시기는 영국이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누린 시기였다.


영국 고유의 전통이 이 시기에 정돈되었고, 유럽 어느

나라들보다 먼저 해외에 눈을 돌려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두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으로 산업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부를 쓸어 담았으며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던 의회

민주주의도 정착시켰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시기가 바로 빅토리아 시대로

그녀의 존재는 상징성만으로도 영국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 3세의 4번째 아들 켄트 공의

딸이었다. 조지 3세는 많은 아들을 두었으나 하나같이 제대로 된 결혼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요절하는

바람에, 빅토리아는 거의 유일한 왕위 계승자로 

영국 왕위는 빅토리아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켄트 공은 빅토리아 여왕이

두 살이 되던 해에 사망하고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

손에 자라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경직되고 엄한 성격으로 시댁인 영국

왕실과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딸이 장차 여왕이 되면 자신이 섭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생각으로 빅토리아 여왕을 독점하고

자신의 말에 순종적인 딸로 교육시키려고 했다.


그래서 빅토리아 여왕은 고립적이었고 고독한 성장기를

보내며 이때 기억이 큰 상처가 되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 유일하게 마음으로  신뢰한 사람은

외삼촌인 레오폴드였다. 훗날 벨기에의 국왕이 되는

레오폴드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

하는 사람이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반려자를 찾아주는

역할도 했다.


18세의 나이에 빅토리아가 영국의 왕위에  올랐을 때

그녀는 국왕이라기보다는 가녀린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을 둘러싸고 강압적이어머니와  그 정부를

제거하고 자유를 찾았으나 국정을 수행할 군주의 능력은 없었다.


빅토리아 여왕에게 제왕의 위엄을 갖추도록 도와준

것은 당시 영국 총리였던 멜버른 경이었다. 그녀는 세계

최고의 국가, 영국의 여왕이 갖추어야 할 긍지와 카리스마

를 왕위에 올라서야 배우게 된 것이다.


20세 때 벨기에 국왕의 주선으로 엘버트 공과 결혼하였고

20년 결혼생활 동안 엘버트 공은 왕실의 재산관리뿐

아니라 외교 문제에서도 관여하여 분쟁을 막는 등

실질적인 군주 역할을 수행했다.


엘버트 공은 빅토리아 여왕과 자녀들을 데리고 런던을

떠나 스코틀랜드의 벨모럴 성으로 자주 여행을 했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정치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영국적 군국제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


국가적 중대 사안은 여왕이 직접 관여하였으나, 그 외에

정치적 문제는 수상의 소관이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엘버트 공과 만족스러운 결혼생활로

두 사람 사이에는 9명의 자녀가 태어났으나 결혼 21년

만에 엘버트 공이 병을 얻어 사망함으로써 빅토리아

여왕은 이후 40년을 홀로 살면서  평생 검은 옷을 입고

미망인을 자처하며 엘버트 공의 죽음을 애도했다


영국 국왕은 흔히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왕이라고 모든 것을 왕 뜻대로 하지 않고 영국 국왕은

내각에 정치 대부분을 내어주며 왕은 군주의 위엄과

권위, 카리스마만 가진다.


국왕의 위치를 이렇게 만든 것은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유럽의 많은 왕들은 끝까지 자신의  권좌를 붙잡고

있다가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은 현명했다.

그녀는 남편 엘버트 공이 살아 있을 때부터 국정의

일부를 내어놓기 시작해 1861년 앨버트 공이 병사하자

버킹엄 궁전으로 물러나 일반적인 국무에서 손을 뗐다.


그녀는 자신이 내놓은 통치권의 일부를 수상과 정치인

들이 성들의 구미에 맞게 행사하는 동안 자신의 안전과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사안의 마지막 결정권은 끝까지

쥐고 있었다.


무리한 고집을 부리지 않고 때에 따라 적재적소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면서도 국사 전반에서 남성들의

힘을 빌렸다. 빅토리아 여왕은 짐짓 물러나 있으면서도

그들을 지배하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만들어  나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권력에만 집착하지 않고 역사와 시대의

흐름을 읽고 큰 그림을 그릴 줄 알았던 빅토리아 여왕은

현명하고 양보심 많은, 그러나 왕으로서의 권위는 절대

놓쳐버리지 않았던 여왕으로 대영제국의 건설을

완성하였던 위대한 여왕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의 산업혁명과 빅토리아 시대에

태어나 성장하면서 영국의 민주주의의 발전이 오히려

시민들이 점차 획일화되어가는 현실을 직시하고 자유론

을 집필하였다.


다수의 뜻을 내세워 소수를 겁박하면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로 포장된 독재일 뿐이라는 점을 밀은 자유론을 통해 우리에게 엄중 경고하고 있다.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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