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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ato Won Nov 16. 2020

1. 생각열기 학습의 선구자, 존 스튜어트 밀

'자유를 포기할 자유는 없다'라고 외친 밀

존 스튜어트 밀


“배부른 돼지가 되기보다는 배고픈 인간이 되는

편이 낫고, 만족해하는 바보가 되기보다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낫다.”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이 남긴 말이다.


밀은 1806년 영국 런던에서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제임스 밀은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지식인들 중의 한 명으로, 공리주의 벤담과 경제학자 리카르도와 친밀히 교류했다. 제임스는 자신이 직접

아들의 교육을 전담하였는데, 존 스튜어트 밀의 천재 학습법은 유명하여 시카고 대학의 허친슨 총장이 이 교육법을 도입하여 삼류 대학에 불과했던 시카고

대학을 일약 노벨상 수상자를 89명이나 배출한 명문대학으로 발전시켰다.


“나는 진정한 인생의 목적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세계의 개혁자가 되는 것이다. 나

자신의 행복은 이 목적과 전적으로 일치해야 한다.”


밀은 20대에 벌써 ‘인간의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사색적 질문을 거듭하였는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의 공리주의자 벤담의 저서가 그에게 인생에 대한 뚜렷한 목표를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밀은 어렸을 때부터 엄청난 양의 지식을 독서로 습득하였는데, 아버지 제임스 밀로부터 전수받은 천재 학습법이 그의 지식 축적에 큰 역할을 하였다.


밀은 세 살 때부터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하여,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이솝 우화들, 헤로도토스 역사, 플라톤의 대화편을 그리스어로 읽었다. 열두 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을, 열세 살에 정치학과

경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을

읽었고 열여섯 살 때는 계몽주의 철학에 심취하였다.


훗날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일관된 신념으로 자신의 글쓰기에 온갖 노력을 다한 사람”,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크리켓

놀이를 해 본 적이 없다.”라고 기술할 정도로 아버지

로부터 특별한 조기교육을 받아 지적으로 성장한

조숙한 천재였다.


그러나 너무 이른 성공에 만족해 버린 자신에 대해

사상적 성장 외에 감성적 성숙에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자각을 갖게 되면서 우울증과 신경쇠약에 시달리게 된다.


그 후로 밀은 모든 문제를 논리와 경험만으로 해결

하려 했던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게 된다. 자연을

찬미한 워즈워드와 바이런의 시에서 위로를 받고

기쁨을 발견하며, 감정을 배양하는 수단으로써 시와 상상력의 가치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25세가 된 밀은 운명적으로 유부녀 해리엇 테일러를

만나 21년 동안이나 정신적 교류를 이어 갔으며,

그녀의 남편이 죽은 다음 해에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으로 결혼 생활은

7년 만에 끝나고 만다.


두 사람은 사상적 동지이자 삶의 동반자였으며

『자유론』을 공동 집필하였다고 밀은 자서전에서

밝히기도 하였다.


나보다 더 뛰어난 사상가이며 내 생애의 영광이며, 으뜸가는 축복으로 나에게는 하나의 종교이며,

가치의 근본이며, 내 생애의 표준 같은 사람”이라고

아내를 극찬한 밀은 프랑스 아비뇽에서 말년에 연구에

몰두하다 갑자기 병을 얻어 운명하고 만다. 그의 유해는

평생 그가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 해리엇 테일러의

묘 옆에 나란히 누워 잠들었다.


예순일곱 살의 나이로 진리에 대한 뛰어난 능력과

자유에 대한 열정적 마음을 가졌던 ‘밀의 생애는

자유에 대한 그의 신념을 실천하는 여정이었다.


“자유를 포기할 자유는 없다.”


밀에게 있어서 자유란 문명사회가 지속적으로 진보

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개인의 자유란 국가 권력에

의해  침해될 수도 있지만 더 심각한 것은 다수의 사회 여론에 의해서 침해되는 것이라는 밀의 통찰력은

탁월했다.


개인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자유를 가져야 한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면 인류는 진리 발견의 기회를

가질 것이며, 설사 틀렸다 하더라도 다수의 옳은

견해의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

아니겠는가.


160년 전 자유에 대한 밀의 사유는 오늘날 자기

정체성 없이 사회의 불편한 진실에 휩쓸려 살아가는

이 시대의 지성인들에게 강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다수의 견해가 진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

진실은 군중 속의 단 한 사람이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여론에 매몰되어 사상적 동조화가 군중심리를 지배

하게 되면 히틀러의 나치즘 대변자인 괴벨스의 세 치

혀에 놀아나는 신세가 될 수 있다.


민주주의가 건강하게 발전하려면 자유주의와 같이

가야 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법으로

보호하자는 법치주의와 연결된다.


밀은 자유론을 1854년 짧은 에세이로 집필했다가

1855년  로마 의사당 돌계단을 올라가던 중 이것을

다시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밀은 자유론 원고를 집필할 때 늘 하던 방식대로

원고를 두 번씩 썼다고 한다. 초고를 그대로 옆에

두고 가끔 꺼내서 문장 하나하나를 다시 읽어 생각해

보고 비판하면서 다시 써  내려갔다.


이런 그의 집필 습관은 어릴 적 그의 아버지와 학습한

경험에서 나온 학습습관이었다.


밀의 아버지 제임스 밀은 밀이 절대  단순히 기억력에만

의존하는 학습태도를 용납하지 않았다. 모든 단계에서

이해력이 앞서도록 훈련시켰다. 스스로 사유하고 질문

해서 알 만한 지식은 노력해서 알게 될 때까지 절대로

먼저 가르쳐 주지 않았다.


밀은 아버지와 아침 식사 전에 늘 산책을 하며

전날 읽고 정리한 내용들을 아버지에게 설명했다.


아버지는 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걸어가며  밀이

설명한 내용들 중 보충할 부분을 지적해주면

밀은 다시 그것을 찾아보고 정리해서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나갔다.


그렇게 익힌 지식은 다시 9남매의 장남인 밀이

8명의 동생들에게 설명하고 가르치도록 아버지는

독특한 학습 훈련을 시켰다.


이것을 그대로 시카고 대학의 허친슨 총장이 도입하여 '시카고 플랜'이라는 인문고전 100권 읽기 독서

프로그램을 운영했고,이후  시카고 대학은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배출한 명문대학이 되었던 것이다.


생각열기 학습의 선구자 밀은 어릴 적부터 지식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관점을 달리하여

재해석해서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생각열기 학습훈련이 습관화 되어 있었다.


밀의 이런 생각열기 습관은  당시 영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가지게 했고

남들은 보지 못했던 '민주주의의 다수결의 원칙'의

심각한 위험성을 간파하고 자유론을 집필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자유의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밀이 이 시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신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허락했으나

자유를 포기할 자유는 허락하지 않았다."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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