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용과 실천적 지혜로 완성되는 행복

2-2,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과 정치해 추상화 읽기

by Plato Won


(1) 중용으로 실현되는 덕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의 종류를 지적인 덕과 도덕적인 덕으로 구분합니다.

지적인 덕은 사유의 탁월함을 뜻하며, 교육을 통해 길러집니다.

그 핵심은 긍정과 부정을 통해 진리를 인식하는 것으로,

학문적 인식, 기술, 실천적 지혜, 이성, 철학적 지혜가 여기에 속합니다.


이에 비해 습성의 탁월함을 뜻하는 도덕적인 덕은 습관을 통해 길러집니다.

이러한 덕은 행위와 감정에서 중용을 취하는 것으로 구현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어떤 감정을 갖거나 행동을 취할 때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중간을 택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중용을 실천할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중용이 산술적인 중간이 아니라서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6과 10의 중간은 누가 봐도 8이지만,

비겁함과 무모함의 중간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난감하지요.


비겁함과 무모함은 용기라는 덕의 양 극단에 자리한 악덕입니다.

용기가 부족한 사람은 비겁한 행동을 하는 반면,

용기가 지나친 사람은 무모한 행동을 할 것입니다.

이 경우에 중용을 실현하려면 무조건 도망가거나 무조건 덤벼들지 말고,

상황에 맞게 적절한 방법으로 용기 있게 싸워야 합니다.

(2) 중용과 실천적 지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을 가리켜 “적당한 때에,

적당한 것에 대하여, 적당한 사람들에게, 적당한 목적을 위하여,

적당한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이렇듯 인간의 모든 행동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탁월성은 보편적이고 상황은 구체적이라서

둘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최적의 행동, 중용에 맞는 행동을

판단하고 실행할 방법을 찾는 능력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실천적 지혜입니다.


지적인 덕의 일종인 실천적 지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알고,

참된 이치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욕망을 조절하여 행동의 목적을 올바로 세우는 것이 덕의 역할이라면,

실천적 지혜는 다양한 상황에서 중용의 발견을 도움으로써

목적을 잘 실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실천은 삶 속에서 숱하게 마주치는 개별적인 상황과 연관이 있습니다.

지식은 부족해도 경험이 많은 노인들이

지식만 많은 젊은이보다 일을 더 능숙하게 처리하곤 하는 것은

바로 이 실천적 지혜 덕분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실천적 지혜란 ‘숙고를 잘하는 능력’인데,

숙고의 대상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입니다.

의사는 환자의 치료 여부가 아니라

어떤 치료법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해 숙고합니다.

환자마다 체질과 병의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서는 풍부한 임상 경험을 쌓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탁월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도

지식뿐만 아니라 경험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요.


(3) 습관화된 중용과 행복


덕은 중용이자 품성으로, 덕을 아는 것과 덕을 행하는 것은 다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와 행동에 의해

품성이 만들어진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정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정의로워지고,

절제 있는 행동을 함으로써 절제 있게 되며,

용감한 행동을 함으로써 용감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덕을 ‘습관화된 중용’이라 정의합니다.

행위와 감정에서 중용을 선택하는 것이 습관이 되려면

한 번의 덕행, 하루의 실천으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꾸준한 반복을 통해 평생에 걸쳐 실천해야 합니다.

탁월한 행동이 몸에 밴 사람은 내면의 덕을 실천함으로써

정신적인 만족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인간의 실천 능력을 올바르게 실현하는 데서 오는

이러한 자아실현의 즐거움은 진정한 행복의 밑거름이라 할 수 있지요.


(4) 추상화 이해하기


자, 그러면 중용과 실천적 지혜가 지니는 의미를

추상화를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지렛대를 들고 터널에서 나오는 한 사람.

지렛대 양쪽 끝에는 바구니가 걸려 있습니다.

꽉 찬 바구니는 지나친 악덕을,

텅 빈 바구니는 부족한 악덕을 상징하지요.


두 바구니의 무게 차이 때문일까요.

주인공은 위태위태해 보이는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무진장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윽고 어두운 터널 속에서 등장한 눈과 발.

‘눈’은 중용을 발견하여 덕의 실천을 돕는 실천적 지혜를,

‘발’은 덕의 실천을 상징합니다.


현실주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선택해야 덕을 실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눈이 ‘외눈’인 이유는 중용이 산술적인 중간이 아님을 암시하지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무수히 많은 발자국들이

바닥에 더욱 진하고 깊은 무늬를 남깁니다.

이는 주인공이 덕을 실천하며

꾸준히 한 길을 걸어 왔음을 암시합니다.


외줄 위에서 균형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실천적 지혜가 든든히 받쳐 준 덕분이지요.

그래서인지 주인공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유난히 따스한 빛을 띠고 있네요.


지혜로워 보이는 눈동자에 다채로운 빛이 감돕니다.

채색된 눈동자는 인생의 연륜과 함께 풍부해진 실천적 지혜를 상징합니다.

변함없이 균형을 잘 잡고 걸어가는 모습은

주인공이 실천적 지혜의 도움을 받아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을 상징하지요.


올바른 목적이 곧바로 탁월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과녁 한복판을 똑바로 조준했다고 해서

언제나 한복판을 맞힐 수 있는 것은 아니듯,

중용을 지향했더라도 실천적 지혜가 없다면

중용을 발견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 풍경마저 변했습니다.

중용을 내면의 습관으로 만든 주인공은

더욱 굳건하고 강인해진 모습입니다.

오늘도 그는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눈동자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광채가

주인공 주위를 감싸며 그의 앞길을 비추어 줍니다.

그 빛이 너무도 환하고 따사로워서

음습한 겨울의 터널을 지나

봄 햇살이 비추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느낌입니다.


“실천하는 사람, 덕을 생활 속에 베푸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행복이 따른다.”

이성의 도움을 받아 동물적 욕망을 절제하고 덕을 실천하는 삶.

이러한 삶을 향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실천할 때,

인간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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