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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ato Won Feb 10. 2019

사람 관계에서 뒷모습이 보일 때

Plato Won 作.시끄러운 고독

결국 사람과의 관계다.

많지 않은 세월이지만 삼성에서 10년 간 근무하고
20년 동안 교육사업을 하면서 느낀 점이다.

결국은 사람 때문에 상처 받고

사람 때문에 위로 받고 여기까지 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이 말은 원래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의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아테네는 도시국가였다.

도시국가를 'Polis'라 칭하였는데

이것이 정치라는 Politics으로 발전한 것이다.


인간은 공동체속에서 누군가와는 연결되어 살아야 

하는 정치적이자 사회적 인간일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이다.


당연하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니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두 사람만 모여도

정치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하였다.

지배자 피지배자가 형성되는 것이다.


친구 사이에서도,연인 사이에서도,사업 관계에서도

알게 모르게 지배,피지배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단지 눈으로 보이지 않을 뿐 

서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그것은 뭔가 리는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정서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권력의 힘이든 이해 관계가 형성되는 지점에서

인간 관계는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순전히 취미생활을 위한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도 

상호 간의 관심사를 공유하려는

정신적인 물물교환의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다.


결국 인생은 사람 관계고

사람 관계가 형성되려면

주고 받는 것이 같거나 권리와 의무가 균등해야 한다.

정의란 권리와 의무의 균등이니

사람관계가 형성되려면 서로 정의로워야 한다.


사람 관계에서 이것이 무너지면 관계는 깨진다.

그래서 철학이 정의를 물고 늘어지는 것이다.

정의롭지 않으면 주변에 아무도 없게 된다.

단순히 양심때문에 정의로움을 외치는 것이 아니다.


친구사이에서도, 연인사이에서도

한쪽이 관심을 강력히 표현하는데 

다른 한쪽은 뜨뜻 미지근할 때 우정은 균열이 생긴다.

부부 사이에서도 각자의 역할이 부족할 때

불만이 생긴다.


철학하는 이유는 유다모니아,행복을 위해서고

공동체 사회에서 정의로워야 다툼이 없는

평화와 행복이 생겨나기 때문에 우리는

내적으로는 윤리학을, 공동체적 입장에서는

정치학을 배운다.


사람관계에서도,국가와 국민과의 관계에서도

권리와 의무가 얼추 맞아 떨어져야 한다.


어릴 때 어머니한테서 늘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남한테 짐이 되면 안된다.'

남한테 짐이 되는 순간,혹은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신호만 보여도 인간 관계에서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인간사 복잡하고 어렵고 힘들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살다가 힘들 때도 있고

도움을 주고 도움 받을 수도 있지,

항상 자로 잰듯이 정확히 주고 받는 방정식이

성립될 수 는가?


그렇게 살 수 있는가?그렇게 살 수 없다.


정의에도 연민이 있어야 제대로 된 정의 아닌가?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는

양파 한 뿌리로 연민을 이야기 한다.


살아 생전에 착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아

지옥에 보내진 할머니가 등장한다.

그러나 신은 그 할머니가 살아생전 텃밭에서

앙파 한 뿌리를 거지에게 준, 딱 하나의 선행에

연민을 느껴 그 할머니에게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기회를 주라고 천사에게 지시한다.


천사는 지옥으로 가 할머니에게 말한다.

"할머니 이 양파 뿌리를 잡고 지옥을 빠져 나오세요"


할머니는 너무 기뻐 양파 뿌리를 잡고 지옥을

탈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이를

지켜보던 다른 죄인들이 할머니의 다리를

붙들어 잡고 서로 지옥을 탈출하기 위해

치열하게 다툰다.


할머니는 말한다.

"이 놈들아,이 양파는 내 양파야"

그러다 양파 뿌리는 끊어지고 죄수와 할머니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 광경을 지켜 본 수호천사는 눈물을 흘리며

지옥을 떠나 간다.


수호천사는 왜 울었을까?
도스토옙스키는 양파뿌리를 통해

나와 너를 구분하는 단절,이기심,배려가 없는

인간의 모습에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살벌하게 살지 말자.

만약 누군가 큰 성공을 했다면 그의 성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고 했으니

사회적 사람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누군가의 부가 쌓였다면

그만큼 그는 사회로부터 받은 것이 많은 것이다.


큰 성공을 이룬 사람,큰 기업의 행동 반경은

단지 당연히 지켜야 하는 법률의 잣대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안쪽의 양심으로 좁혀 

들어와야 한다.


물질로 베푸는 것은 작은 정의이며

마음으로 베푸는 것은 큰 정의이

품격으로 베푸는 것은 더 큰 정의의 실천이다.


품격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품는 것이다.철학이 물고 늘어지는 것이

정의이고 정의로워야 행복해지는 것이니

그 철학이 깊이 깃든 사람이 품격있는 사람이다.


품격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도시는,사회는 온화해 진다.


품격있는 인생은 균형 잡힌 인생이고,

균형 잡힌 인생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우리 뿐만 아니라 주변에게도,

세상 사람들에게도 배풀어야 한다. 


생은 투쟁이며 모험이다.

인간이 겪을 어려움과 좌절이 우리를 멈춰 세우는

핑계거리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쉬운 것을 보고 감탄하거나

고귀하다고 느끼지 않는다. 

인생이 쉽다고 마냥 행복할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자.

인생 최고의 순간은 진정으로 어려운

도전을 이겨냈을 때이다.


그러나 그 여정에서

문득 문득 외로울 때,방황할 때

간혹,아주 간혹 깊은 수렁에 빠져 뒷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이 삶의 모습 아니겠는가?


사람관계에서 누군가 뒷모습을 보일 때

연민의 정의로움으로 다가가 보자.


그가 나의 주변에 있었다면

나는 그로부터 충분히 뭔가의 혜택을 받았다.


받지 못했더라도 받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기 때문에 나의 주변에 존재하는 것이다.


너무 살벌하게 살지 말고

누군가 뒷모습을 보일 때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연민의 정의로움을 실천해 보자.


인생의 뒷모습은 언제든지 누구나에게나

불현듯 다가온다는 사실을 숙고할 때

철학은 시작된다.


Plato Won


●11월 5일 화,경춘본부 패럴랙스 학부모님

    세미나 있습니다.


● 패럴랙스 인문아트 시리즈 2편 마키아벨리 군주론

    교정 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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