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lato Won Mar 13. 2019

行함은 영혼이 아파 잉태된 앎에서 온다

알게 되면 새벽부터 일어나 부지런해 진다.그곳에 지혜의 향기가 있으니까
killer Contents를 품고 탁월함,Arete를 추구하는 삶이 우리 조직이  걸어가야 하는 삶이다.그 출발은 내 자신부터 Arete를 실천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에 대한 知가 모든 한 행위의 원인이며

용기, 정의 따위에 대한 보편적 앎이 윤리적 함을

가져오는 원천이다.


에 대한 지식은 행동하지 않을 수 없는 자각을

불러일으키므로 함은 결국 앎에서 온다 하였다.


당연한 이야기다.

좋아 보이는 데 열심히 행하지 않을 수 있는가

좋다는 것을 모르니 게으른 것이지


어떤 조직에서나

제대로 알고 行함을 실천하는 30% 그룹과

제대로 알지 못하고 行함을 실천하는 40% 그룹과

제대로 알지 못하고 行하지 않는 30% 그룹이

공존해  있다.


제대로 된 조직이라면

제대로 알게 하는 일련의 노력들이 필수적이고

그것이 교육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사람이고

교육은 사람을 바꾸는 유일한 수단이다.

국가의 근간이  교육인 이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다.

무지함이 지식보다 더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낸다고 하지 찰스 다윈이 말했다.

가장 무식한 사람이 가장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모르고 있는 것을 안다고 확신하니까


인생에서 한 번도 제대로 알고 行함을

실천해 보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성공해 본

경험이 없을 것이고 그러니 안된다고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결국 무지는 익숙한 자기 자리를 지키다

서서히 늪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만든다.

무지의 종국은 이다.

개인이나 조직이나 기업이나 국가나 마찬가지다


반대로 앎을 익히면 익숙한 곳에서 벗어나

낯선 곳으로 도전하려는 용기와 힘이 생긴다.

왜?

익숙한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곧 滅을 재촉하는지를

정확히 아니까, 낯선 저곳에 향기 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는 것을 아니까 낯선 저곳으로 가려고 부단히

도전하고 용기를 내는 것이다.


앎이란 예리한 후각을 통해

지혜의 향기가 뿜어 나오는 저곳으로 나를 인도한다.


소크라테스가 볼 때 그가 살았던

당시 아테네의 혼돈은 무지 때문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장

현명하다고 말하지만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을 찾아 나서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생각한다.

'어도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만은 안다.

아테네의 젊은 청년들을 앎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이

함의 실천으로 이어져 이 혼돈의 아테네의

무질서를 치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소크라테스는 실천하는 철학자이다.

그는 아테네의 거리로 나가 젊은이들에게

의 사례를 열거해 스스로 답을 찾아가게

대화를 도한다.


대화의 목적은 단순하다.

그들의 무지를 스스로 닫게 하는 것,

'너 자신을 알라'라는 델피의 신탁을 전하는 것이다.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

소크라테스는 그 유명한 대화법을 이용한다.

대화법은 세 가지의 툴을 사용해서 무지를 인식하고

깨달음을 얻게 한다.


첫째는 반어법 , 은유법적  방법을 사용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훌륭함, 아름다움

올바름, 용기 등이 무엇인지 묻고 그 답변을 다시 논박

하여  혼돈의 아포리아에 빠뜨린다.

이윽고 무지를 자각시키고 개념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반어법적 은유법적 대화를 이용하는 것이다.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이런 반어법, 은유법적

글들이 독해를 어렵게 하지만 사색하고 질문해 보는

과정에서 울림을 받는다.

인문고전이 완독이 없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런 은유법적이고 반어법적 글들이 주는 메세시가

읽을 때마다 자기가 처한 환경에 따라 매 번 달리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문고전은 해답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사유하고 질문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해답을 찾는

책이다.


둘째는 산파술이다.

대화 과정에서 새 인식에 스스로 도달하도록  돕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임무다. 새 인식은 외부로부터

주입되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지식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이끌어내는 것이다.

사유하고 질문해서 스스로 생각을 분만할 뿐

소크라테스가 분만해 주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역할은 그저 생각을 분만하는

산파의 구실만 할 뿐이다.


셋째는 귀납법적 방법이다.

특수 사례를 예로 들고 고찰해서 보편성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러나 해답이나 결론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대화자가 길 없는 길에서 당황하지만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서도록 한다.

귀납적으로 여러 가지 나의 무지한 행동들을

모아 보면 왜 내가 여기서 헤매고 있는지 깨닫는다.

순간 길을 잃고 방황하지만 스스로 길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기 머물러 있으면 滅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정의롭지 못하면 결국 滅한다는 것을 알기에

정의로움을 필사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에 나가

젊은이들에게 올바름이란 무엇인가를 놓고 대화를

이어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의롭지 못한 아테네는 언젠가는 滅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바로 이야기해주지 않고 스스로

인식하도록  생각을 분만하는 역할만 자처할 뿐이다.


맨날 거리에 나와 질문만 해 대는 소크라테스에게

아테네의 한 젊은이가 질문한다.

"선생님 선생님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이에 소크라테스는 답한다.

"나의 역할은 여러분들의 생각을 분만하도록

산파 역할을 할 뿐 생각을 분만하는 것은 여러분

들이다.


이 보게 나 젊은이, 우리 가족은 신의 축복을

받았다네, 우리 어머니는 아낙네들의 아기를

분만하는 데 산파 역할을 해서 도움을 주고

나는 아테네 젊은이들이 생각을 분만하는데

산파 역할을 해서 도움을 주는 산파 가족이라네"


소크라테스는 생각을 분만하지 못한다.

자기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  소중하듯

나의 영혼이 아파서 낳은 생각이 나에게

소중하지 않겠는가?


스스로 사유하고 질문해서 잉태된 깨달음이

남들에게서 전달받은 깨달음보다 

더 큰 울림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함은 내 영혼이 아파 잉태된 앎에서

비롯된다는  깊이깊이 숙고해 보자.


사유하고 질문하는

패럴랙스적 앎이 필요한 세상이다.


 Plato Won



작가의 이전글 독서란 문장을 들어 올린 다음 그 밑으로 지나가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