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ato Won 作,인류는 뉴턴의 집요함과 외로움 덕분으로 인식의 지평선을 코끝에서 발끝으로 성큼 다가설 수 있었다.다만 그래도.발끝까지만이다.
뉴턴이 어린 시절 살았던 생가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자연과 자연의 법칩은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신께서 "뉴턴이 있으라 하시니 모든 것이 밝아졌다."
인간에게 받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
영국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대문호 알렉산더 포트가
썬 이 문장은 영국 국교회의 성지 웨스트민스터 사원
의 뉴턴의 묘비명에 새겨져 있다.
1727년 뉴턴의 장례식이 열렸다.
생전의 권위를 누렸던 뉴턴은 죽어서 묻히는 순간도
영예로웠다. 그의 장례식은 이 모든 화려한 업적과
이력을 역사에 봉인하는 장엄한 행사였다.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이끈 볼테르도 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장례를 국가가 치러주고 온 국민이 애도하고,
신분보다 학문을, 귀족보다 지식인을 존중하는
뉴턴의 장례식 광경에서 프랑스 대혁명의 불꽃은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한다.
조국 프랑스에서는 뉴턴과 같은 과학자의 죽음이
국장으로 예우받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이때를 전후로 볼테르가 문인에서
계몽철학자로 거듭났다고 해석한다.
조국 프랑스의 절대왕정과 기득권을 독점한 가톨릭
교회의 개혁에 대한 청사진은 바로 볼테르가 뉴턴의
프린키피아에서 받은 충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처럼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계몽주의 시대의 문을
열고 프랑스 대혁명, 미국독립전쟁으로 이어지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과학서를 꼽으라면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유클리드 <기하학>,
다윈의 <종의 기원>을 꼽을 수 있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는 인류의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책이다. 중세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인간의 인식
체계를 흔들면서 근대 사회로 이끈 절대적 공헌서다.
뉴턴 사후 250년은 중세 시대의 패러다임과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 체계로 변환되었으니, 이것이
절대주의 세계관이다.
1900년대 아인슈타인의 등장으로
이 절대주의 세계관은 상대주의로 전환되었지만,
뉴턴을 비롯한 이 절대주의 사고방식은 인류의
발전에 있어 엄청난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뉴턴이 등장하기 전 영국은 주위 국가로부터 수많은
외침을 당한 변방국이었으나, 뉴턴의 등장으로 영국
의 과학은 비약적 발전을 거듭해 산업혁명을 낳았다
마침내 영국은 뉴턴의 프린키피아로 인해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나라로 변해갔으니,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바로 대영제국이된 것이다.
대영제국의 영광은 예전 로마제국의 지배영토를
넘어서며 전 세계를 상대로 200년 동안이나 유지된다.
"내가 멀리 볼 수 있었던 것은,
오직 거인의 어깨 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뉴턴의 남긴 말이다.
뉴턴이 프린키피아란 책을 낸 배경에는 과학적인 여러 발견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또 이러한 발견들은 16세기부터 이어졌던 기독교 신과
아리스토텔레스로 대변되는 과거의 지식 체계에 반발해서 나온 새로운 발상들과 관측을 통한 천문 데이터의 축적, 실험을 통한 지상의 운동 법칙에 대한 이해 증가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단편적이고 부분적인 이 새로운 지식들은 과거의 세계관이 틀렸다는 것이지 새로운 과학 지식 체계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당시 철학적으론 베이컨의 경험론이 새롭게 과학 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었고, 데카르트의 합리론이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은 자연 즉, 자연은 정확한 수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완전한 기계라는 기계적 세계관을 주장하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수학을 물리에 접목하고자 시도했고, 또 케플러는 물리학을 천문학에 결부시켰지만 그의 법칙들은 각각의 사실로 있었을 뿐 하나의 법칙으로는 설명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데 확실한 기반이 될 수 있는 수학은 여러 시도를 하고 있는 단계였다. 당시의 수학은 곡선의 접선과 주어진 곡선 영역의 면적을 기하학적으로 계산하는 방법론 개발에 한창이었다. 유클리드의 기하학에 기반한 지식만을 가진 당시의 학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문제로서, 이를 해결하고자 무한히 나누는 방법으로 접선을 구하거나 면적을 구하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연구들은 자연법칙의 수학적 기술을 위한 기틀이 수학적으로 마련되기 위한 기반이 되었다. 과거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웠던 견고한 사상체계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전체 그림의 핵심 요소를 구성하는 주요 조각들이 하나라도 빠져 있으면 안 되었지만 다행히도 뉴턴의 시대는 이러한 각각의 조각들이 개별적으로는 존재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각들을 연결해서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탁월한 천재가 필요했다.
뉴턴은 대학을 졸업한 그해(1665년)부터 본인이 독학했던 수학에 관련된 논문들을 쓰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의 천부적인 수학적 재능과 더 이상 자연 현상 관측 만에 의지하지 않고 실험을 통해서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는 그의 열정, 사과가 지표면에 떨어지는 현상을 일반화해서 이 힘이 모든 물체들에 작용하는 만유인력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의 통찰력과 그 당시까지 발견되었던 과학적 지식이 한데 모아져서 뉴턴 역학 체계라는 새로운 과학 체계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뉴턴의 역학은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전개된 절대주의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과연 그럴까? 여기에 의문을 품은 과학자가
있었다.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이지 않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상대주의적 세계관으로 인류의 인식을 다시 한 차원 더 높인다.
뉴턴의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이 등장하기까지
200년 동안 고전 물리학을 이끈다.
학자들은 1905년을 아인슈타인의 기적의 해라고
부를 만큼 물리학에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진다.
이 해에 아인슈타인은 광속에 가까운 속력으로
내달리면 길이가 줄고, 무거워지며, 시간이 느려진다는
특수상대성 이론을 밝혀 낸다.
또한 이 해에 아인슈타인은 질량이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질량과 에너지 등가 원리를
밝혀 낸다.
원자들이 핵분열 반응을 일으킬 때 반응 전과
반응 후에 약간의 질량의 차이가 생겨난다. 이 차이는
아주 미미하지만 그것이 전부 에너지로 전환되면
어마어마한 에너지류 방출한다.
이런 예측으로 인류는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원자폭탄을 손에 쥐게 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티탄족의 영웅
프로메테우스가 불을 훔쳐 인간에게 문명을 선사한
죄로 하늘의 신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
코카서스의 바위에 묶여 평생을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고통을 당한 것처럼,
인류는 과학이라는 원자폭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따라 프로메테우스 신세가 될 수 있음을 직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