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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업적 이면의 그 밖의 것들

11, 뉴턴 프린키피아, 뉴턴의 업적 이면의 그 밖의 것들

by Plato Won
Plato Won 作 푸른 하늘에도 구름이 끼듯,뉴턴의 위대한 업적 이면에도 이야깃거리들이 남아 있다


1, 뉴턴과 광학


뉴턴은 3가지 분야에서 커다란 학문적 업적을

이루어 냈다. 물리학에서 운동과 만유인력,

수학에서 미적분, 그리고 광학이다.


뉴턴이 인류 사회에 공헌한 내용은 매우 크지만

인간적으로, 또 과학자로서도 부적절한 잘못을.

저질렀는데 대표적인 것이 로버트 훅과의 관계였다.


훅은 영국왕립학회의 실험 감독관으로 뉴턴이 발표한

내용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건 사람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뉴턴의 업적에 많은 공헌을 한 인물이다.


훅은 뉴턴에 역제곱법칙을 소개해줌으로 만유인력

법칙을 만들게 된 바탕이 되었다. 또 광학에 대한 많은

연구를 함으로 훅의 책을 바탕으로 뉴턴이 빛을

연구하게 돤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훅의 기여에 대해서 뉴턴은 아무런

인정을 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둘 사이는 매우

나빴었다.


그러던 중 훅이 죽은 후, 훅이 영국왕립학회에 있는

동안에는 학회를 멀리했던 뉴턴이 왕립학회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뉴턴은 그때까지 쌓였던 원한을 풀기라도 하듯,

로버트 훅의 과학적 업적들을 모두 짓밟았다.

그가 쓴 논문, 직접 쓴 원고를 모두 소각하기도 하고

왕립학회에 걸려있던 그의 초상화도 치워버렸다.


로버트 훅은 당시 현미경을 개량하여 지금 광학

현미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만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뉴턴은 빛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빛을 프리즘으로 연구했다.


뉴턴 이전에는 빛에 색깔이 없다고 여겼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색이 물체의 고유성질이라 여겼다.

사과가 가진 빨간색이 본질적인 색이고,

빛에 의한 무지개는 어두워지면 사라진다고 했다.


뉴턴은 프리즘 실험을 통해 빛에 대한 성질과 현상을

연구했다. 먼저 뉴턴은 어두운 방에서 한 줄기 빛을 들어오게 했다. 그러자 이 빛이 프리즘에 의해 굴절되면서

무지개 스팩트럼을 나타내었다.


이 실험을 통해 색은 물체의 고유성질이 아니라 빛에

의해 나타나는 성질이라는 사실과 여러 색깔의 빛을

모을 때에도 하나의 백광색의 모습을 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뉴턴은 '빛의 입자설'을 주장한다.

뉴턴이 주장한 빛의 입자설은 이후 아인슈타인에

의해 빛은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가진다는

사실로 수정되어 현재까지 수용되고 있다.


훅의 도움으로 또 하나의 위대한 뉴턴의 저작인

'광학이 탄생한 것이다.그러나 뉴턴은 광학의 연구에

도움을 받은 훅이 사망한 이후, 자신에게 대적할

유일한 인물이 사라지자 그때야 광학을 발표하였다.


2, 뉴턴과 미적분


프린키피아에서 뉴턴이 새로운 공식을 증명할 때

사용했던 방법은 기하학이었다. 뉴턴은 미적분을

이미 알고 있었고 이를 활용하면 훨씬 쉽게 뉴턴의

운동법칙, 만유인력의 법칙을 증명할 수 있었으나,


뉴턴은 이 방법을 쓰지 않고 훨씬 복잡한 기하학으로

증명한다. 그 이유는 당시 사람들은 미적분을 알고

있지 못하였고 대신 기하학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하학은 고대 문명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나일 강이 정기적으로 범람하자 토지의

경계가 사라지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강물이 빠진 후에 토지의 넓이를 새로

측정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하학 지식이 생겨났다.


고대 그리스의 기하학은 자명하다고 인정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기존에 알고 있는 것들 만으로

새로운 사실을 증명하는 '연역적 방법'정립하였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유클리드는 그의 저작

'원론'에서 주어진 정의와 공리만으로 수학 정리를

증명하였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는데 이 기하학을

'유클리드 기하학'이라고 하며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사용한 '영역법적 접근 방법'은 수학뿐만 아니라

서양 지성사의 모든 학문에 적용된다.


미국 독립선언서를 보면 유클리드의 원론에서

사용한 연역적 방법이 얼마나 광범위하게 서양 지성사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 몇 가지를 타고났다. 그 권리는 자유, 행복, 안전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이고,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인민은 스스로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그 정부는

인민의 동의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미국의 정부는

미국인들이 구성해야 한다. 그렇다면 미국은 영국에서

독립되어야 한다."


서양 지식인의 사고체계는 이처럼 연역법적 방법을

준용한다. 영어 문장의 문법구조도 주어 다음에

동사가 오고 동사 다음에 목적어가 오고 수식어구는

뒤에 붙는 연역법을 준용한다. 뉴턴의 프린키피아도

그렇게 기술되었다.


뉴턴은 물리학과 광학 外 수학에서도 커다란 업적을

남겼다. 그가 고안해 낸 미적분학은 변화에 중점을 둔

학문이다. 미적분학은 자를 미, 미분과 쌓을 적,

적분이라는 2개의 분야로 분류된다.


프린키피아에서 밝힌 운동의 제2법칙인 가속도의

법칙(F=ma)에는 미분의 법칙이 들어가 있다.

가속도 a는 속도의 시간에 대한 미분이다. 즉 시간에

따라 속도가 얼마나 빨리 변하는가를 나타내는

값이다.


예를 들어 속도가 지금 1이었는데 변화량이 1이라면

1초 후 속도는 2가 된다. 실제로 미분이 다루는 시간

간격은 이렇게 1초가 아니라 매우 짧은 시간 뒤에

속도를 의미한다.


이런 방식으로 물체의 한 순간의 값을 알게 되면

그다음 순간의 값을 알 수 있게 다.


이러한 개념을 확장하게 되면 어떠한 물체의 초기

값을 알고 거기에 주어지는 힘을 알게 된다면 미래에

일어날 일도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뉴턴을 결정론자라고도 한다.


공중으로 던져진 볼이 만드는 궤적 곡선 또는 태양

주변을 돌고 있는 행성들의 궤도 곡선은 수학자들에게 커다란 관심거리였다. 케플러의 제2 법칙은, 행성과

태양을 연결하는 가상적인 선분이 같은 시간 동안 쓸고 지나가는 면적은 행성과 태양 사이 거리에 관계없이

항상 같다.”라는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이었다.


이러한 곡선 면적을 정확히 구하기 위해서 뉴턴은

미적분을 사용한 것이다.

이전의 수학자들은 근사치를 계산하였다.


뉴턴은 이 문제에 대하여 도전하였다.

1665년 2월, 대학교 3학년이었을 때, 그는 프랑스

수학자 페르마와 그의 스승 베로가 특정 곡선을 위한

공식을 설명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곡선에 일반화하여 사용할 수 있는가를

연구하였다. “나는 페르마의 접선을 그리는 방법으로부터 이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었고 이것을 일반화

시켰다.”라고 그는 나중에 밝혔다.


그렇지만 프린키피아를 출판물로 낼 때에는

그 시대의 수학적 표현 방법에 맞게 기하적 표현으로 적어냈다.


이것은 이후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와 미적분을

누가 먼저 만들었는지에 대한 논쟁거리로 번진다.


3, 뉴턴과 영국왕립학회


흔히 위인들에 대해서 그들이 발견했던 위대한 업적들에 대해서만 강조하느라 그들이 가졌던 인간적인 결함들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뉴턴은 잉글랜드 최초의 천문학자였던 존 플램스티드와도 반목하였다. 뉴턴은 프린키피아 두 번째 판을 출간하기 위해서는 달과 행성들 운동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필요했는데. 플램스티드는 그 당시까지 발견된 별들을 총망라한 하늘의 역사라는 책을 집필하고

있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에 필요한 달과 행성들에 대한 부분만을 출판하기 원하였고 이를 플램스티드가 반대하자, 그를 왕립협회에서 쫓아내고, 그가 관찰했던 결과들을 부당하게 사용하였다.


로버트 훅의 과학적 성과를 부정하고 냉대한 것도

뉴턴이 영국왕립학회 회장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누가 먼저 미적분을 발견하였는지를 두고

라이프니츠와 분쟁했을 때 그 판단을 한 주체도

뉴턴이 회장으로 있을 때의 영국왕립학회였다.


비록 18세기에 들어와서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이

인정되기는 했지만, 분쟁 당시 미적분의 최초

발견자는 뉴턴이 차지했고, 이에 몹시 상심한

라이프니츠의 일생은 우울했으며, 장례식에서도

비서 한 명만 참석할 정도로 쓸쓸히 떠나깄다.


4, 뉴턴과 연금술


물리학과 수학에 대한 그의 업적은 인류 문명을 뉴턴

이전과 뉴턴 이후로 나눌 수 있을 만큼 지대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과학적인 업적 대부분은 1665, 1666년 2년 동안 완성된 것이었다.


84세 나이로 죽을 때까지 학문에 대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던 뉴턴은 그의 연구 노트 내용을 보면 물리와

수학에 대한 연구는 약 10% 정도이고 나머지는

연금술과 성경에 대한 내용이었다.


당시 르네상스 학자들이 갖고 있었던 자연의 위대한

진리를 고대인들이 이미 알고 있었고, 이러한 지혜들은 이미 고문서 등에 적혀 있을 것이라고 뉴턴은

생각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 데모크리토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그리고 성경 속의 인물 등을 연구하며 이들이 자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암호 형태로 써 놓았다고 생각했다. 지혜를 자연에서뿐만

아니라 창세기, 욥기, 시편, 이사야, 다니엘, 요한 등의 예언자들의 기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닥칠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적어 놓은 것이라고 믿었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수백 페이지가 넘는 연금술에 대한 자료를 남겼다. 후대에 역산해 보면 그는 오천 권 이상

되는 연금술 관련 책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그가 이렇게 많은 연금술 책을 읽고, 평소 새벽 2~3시, 늦을 때는 5~6시까지 실험을 했던 이유는 세계의 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보편적 물질에 대한 단서를 얻고자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단순히 허왕된 욕심으로 비금속으로 금을 만들어낸다는 연금술에 심취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5, 그 밖의 것들


그는 가장 작은 입자부터 큰 별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질에 대해 알고자 했다.


뉴턴은 당시의 인간의 능력과 기술로는 얻을 수 없었던 어떠한 것을 평생 찾아다녔던 것으로 여겨진다.

뉴턴의 활약하던 당시 영국은 사회적으로도 큰 변화를 겪고 있었고 명예혁명이 일어났다. 성공회를 국교로 삼고 있던 영국 국민들에게는 제임스 2세의 친카톨릭 정책은 많은 반발을 받게 된다


뉴턴은 카톨릭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에 새 의회에서 하원 의원으로 정지 활동도 하게 된다.


의회 활동을 하면서 맺은 고위층과의 인맥으로

케임브리지 대학 학장에 앉고자 원했으나, 자격 조건이 못 되어서 놓치게 된다. 그 후로도 계속 공직 자리를

알아보다 1695년 조폐국 부국장이 되고 1699년부터 국장으로 25년 동안 지낸다.


말년에는 역사적인 버블 투자로 유명한 남해 회사 주식 투자로 약 20,000파운드(현 시가로 약 20억 원) 손해를 본 적도 있었다. 이때 "천체의 움직임은 계산할 수 있어도 인간의 광기는 도저히 측정할 수 없다”라는 유명한 말도 남긴다.


1727년 2월 마지막날, 뉴턴은 3월 2일 왕립학회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런던에 도착한 후 방광에 돌이 생겨 의사를 불렀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

한다.


죽은 뒤, 영국 위인들이 묻히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

안장되었다. 석관 위에는 자신이 쓴 저서들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몸을 기댄 모습이 조각되어 있으며, 연구에 사용했던 망원경과 프리즘 등의 기구가 표현되어 있다.


가장 이성적이고 수학적 사고로 우주의 원리를

밝혀낸 뉴턴이 가장 비이성적인 연금술에 평생 빠져

살았다는 사실.


나는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탔을 뿐이라고

겸손해하면서도, 자신의 업적에 큰 영향을 미쳤던

동료 과학자들을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는다고

그들의 성과를 철저히 무시하고 냉혹히 대하는

이중적 태도.


우주의 심오한 운동법칙은 수학적으로 증명해도,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심리는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편승해 주식으로 돈을 몽땅 닐린 그 허당끼.


실제 뉴턴은 대학시절에 의붓아버지가 물려준

유산으로 친구들에게 이자 놀이를 해서 원망을

싸는 등, 돈에 집착을 보이기도 했다.


평생을 혼자서 외로이 살면서 너무나 외로웠던

것일까?


마치 인간이 아닌 듯 신의 영역으로 들어가 우주의

숨겨진 비밀을 밝혀낸 뉴턴이지만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를 저지르며

"나는 이제 이 외로운 여행을 마감한다."

는 말을 남긴 듯 우리 곁을 떠나갔다.


뉴턴의 업적은 지극히 수학적이었으나

그의 일상은 지극히 수학적이지 않았으며,


그의 삶은 지극히 냉철했으나 그의 마음은

지극히 냉철하지 못히였고,

그런 삶의 기록을 그의 위대한 유산과 함께

여백으로 남기고 쓸쓸히 떠나갔다.


인간적인,너무나 인간적인 뉴턴이었으므로


Plato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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