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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했으나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생각,찰스 다윈 진화론

2,찰스 다윈 종의 기원,

by Plato Won
찰스 다윈의 초상화

"들판을 거닐다가 발에 돌이 채었는데 그게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되었는가를 물었다 치자. 나는 아마도

그 돌이 언제가부터 있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손목시계를 발견했다면?

전에는 보지 못했던 시계를 말이다.


그 시계가 정확하고 복잡한 장치라는 것을

알면 나는 그것이 아무렇게나 생겨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 내릴 것이다.


인간의 눈도 복잡하고 미묘한 장치다

그것 또한 너무나 완벽하기 때문에 설계한 것이

틀림없고 그 설계자는 신이 틀림없다."


1802년 당시 종교 사상을 대표했던

영국의 주교 페안리가 발표한 <자연신학>

첫 장에 나오는 문장이다.


인간은 신이 창조했다는 창조론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이 문장에 찰스 다윈은 매료되었고 이를

확신했었다고 한다. 이후 진화론을 발견한 다윈이.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809년 영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찰스 다윈은 할아버지, 아버지가 당시 존경받는

의사였고, 어머니도 도자기로 유명한 웨지우드

집안이었다.


어릴 때부터 수집하기를 좋아했던 다윈은 식물학과

지질학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아버지의 권유로

1825년 에든버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수술실 들어가 역겨움을 느끼는 등 적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자, 다원은 다시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캠브리지 신학 대학에 들어가 신학을 공부

하였으나, 이 또한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캠브리지 대학 시절 헨슬로 교수의 식물학

수업은 제일 좋아했고, 헨슬로 교수는 지질학에 소질

을 보이는 다윈에게 지질학을 공부할 것을 권한다.


캠브리지 신학대학을 졸업한 1831년,

헨슬로 교수는 찰스가 영국 해군함 비글 호에

탑승할 수 있도록 추전을 한다.


당시 비글 호는 바다 지도를 만들려고 대서양과

남아메리카, 태평양을 거쳐 세계일주 향해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배에 탑승해 자연사를 연구하고 선장을

수행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헨슬로 교수는 식물학과 지질학에 관심을 보인

제자였던 다윈을 비글 호 선장에게 추천한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혀 탐험을 포기

하고 외갓집에 머물던 다윈은 외삼촌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겨우 설득하여 비글 호 탑승을 마침내

허락받게 된다.


그때 다윈이 아버지에게 쓴 편지 내용을 보면

다윈이 얼마나 비글 호 탑승을 원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 여행이 제가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저를 믿어 주세요. 아버지."


이렇게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세계 여행이

시작되고 다윈은 찰스 라이엘이 쓴 <지질학 원리>를

가지고 배에 승선한다.


다윈이 지질학 원리를 읽기 시작한 지 일주 일째

되는 날, 비글 호는 서아프리카 서해안 카보베르데

제도의 화산섬 생자고에 닻을 내렸다.


사화산인 그 섬에서 다윈은 해변의 낮고 커다란 언덕

측면 지표면에서 죽은 생물들로 이루어진 하얀 띠의

단층을 발견하는데, 이것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서

서서히 쌓여 암석층을 만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지구에서의 변화는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같은

격변에 의한 것이거나, 창조론을 주장한 페안리의

주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때 처음으로

하게 된다.


카보베르데 제도를 떠난 비글 호는 브라질, 아르헨티나,

포클랜드 제도, 우루과이, 칠레, 안데스 산맥, 페루를

탐험하였고,다윈은 가는 곳마다 동식물과 지질을 관찰하고 화석을 모으는 연구를 계속한다.


"이 숲 속의 아름다움을 하나하나 칭찬하기는 쉽지만,

마음을 채우는 놀라움. 경이로움, 애착심 같은 감정을

표현하기는 불가능하다."


다윈이 당시 브라질 숲 속을 탐험하며 대자연의

신비에 감탄해 쓴 일기 내용으로,이때 쓴 항해 일지

를 나중에 <비글 호 항해기>라는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다윈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광대한 평야라고

부르는 팜파스에 대해 "멸종한 거대한 네발동물들의

큰 무덤"이라고 일기에 써놓았고, 바다 생물들의

화석을 관찰하면서 땅이 솟아오른다는 사실도

알아낸다.


1835년에는 많은 섬들로 이루어진 갈라파고스 제도

에 들어갔는데, 이곳 모든 섬들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거북과 새 그리고 이구아나가 살고 있었다.


인도양의 킬링 제도에서는 산호초를 관찰하고

이후 모리셔스 섬, 남아프리카 희망봉, 대서양의

세인트헬레나 섬 등을 거쳐 영국 팰머스 항에 도착

하면서서 근 5년의 항해는 끝이 난다.


이때 다윈의 나이 27살로, 5년의 젊은 시절을

세계 탐험 여행으로 보낸 결과물은 770여 쪽에

달하는 일기와 수많은 관찰기록 노트, 수천 점의

표본들로, 이 자료는 이후 다윈이 진화론을 발견

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된다.


다윈이 가지고 온 표본들 중에는 아직 영국에

알려지지 않았고 연구된 적이 없는 내용들이 많았고

이미 다윈은 영국에서 유명인시가 되어 있었다


다윈은 1838년부터 3년 동안 영국 지질학회의

간사직을 맡으면서 지질학 관련 글을 썼고 이때

<종의 기원>의 초안이 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다윈은 집에서 동식물을 키우며 관찰과 실험을

계속 했고,이를 통해 사람들이 좋은 품종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좋은 품종끼리 교배를 하는 선택을

핵심 원리로 삼는다는 점을 알아낸다.


이런 생각에 젖어있을 때인 1838년 다윈은

우연히 맬서스의 <인구론>을 접하면서 '생존경쟁'과

'자연선택'의 개념을 그의 연구에 접목해

마침내 논물을 완성한다.


토머스 맬서스는 영국의 인구통계학자로

저서 <인구론>을 통해 이론적으로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인구 증가가 억제되는데, 그 이유는 생존경쟁 때문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다윈은 자연 세계의 질서를 설명하기 위해

맬서스의 경쟁의 개념을 도입해서 생존 경쟁과

자연선택의 개념을 정립하면서 그의 진화론을

발전시킨다.


1838년부터 1844년까지 다윈은 진화론의 기초를

정립하고, 1844년 230쪽짜리 논문을 완성한 후,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식물학자 후커에게 자신의

생각을 편지로 보낸다.


"저는 갈라파고스 제도에 있는 동식물을 보고

깜짝 놀라 종의 변화에 대해 어떤 빛을 던져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자료를 많이 보았습니다.


관련 책들도 많이 읽었고 자료 수집을 잠시도

쉰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한 줄기 빛이 비춰오는

것 같았고, 이제는 당초의 생각과는 달리 종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에 거의 도달

했습니다.


마치 살인을 자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종이 다양한 방법으로 환경에 정교하게 적응해

나가는 방법을 일아냈다고 생각합니다

"


이때 다윈은 그의 연구논문을 책으로 출간하려 했으나,

영국에서 익명으로 <창조의 자연사 흔적>이라는

생명의 진화를 주장하는 책이 출간되고 엄청난

비난을 받는 것을 목격하게 되자, 다윈은 더 많은

증거를 모으며 20년이나 출간을 미루게 된다.


그러던 중 1858년 월리스라는 젊은 지질학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는데, 그 내용에는 다윈이 그동안

연구했던 진화론과 똑같은 내용이 담겨있었다고 한다.


이에 무척 놀란 다윈은 동료학자게게

이런 편지를 보낸다.


"이보다 더 간결하고 좋은 요약은 없습니다.

그가 쓴 용어는 마치 내 책의 소제목들 같았습니다"


다윈은 학자로서 월리스의 생각을 훔쳤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자신의 논문을 발표하지도 못하고

깊은 고민에 빠졌었는데, 동료 학자들인 라이엘과

후커가 그동안 다윈으로부터 받은 논문 편지와

그리고 월리스의 논문을 함께 묶어 런던 자연사

학회에 공동 발견자로 발표하게 했다.


이런 과정을 거체 두 논문은 1858년 7월 1일

린네 학회에 발표되었고, 학계에서는 찰스 다윈에게

자연선택이론에 대한 우선권을 인정한다.


월리스보다 15년 앞서 다윈의 진화론이 정립되었고,

이를 뒷받침하는 <종의 기원>이라는 책이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1859년 <종의 기원>은 출간되었다.


다윈의 종의 기원에서는 인간의 진화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기술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종이

진화했다면 인류는 어디에서 오게 되었는가?를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후 진화론은 인간의

기원에 대한 논쟁을 피할 수 없었다.


다윈은 1871년 출간한 <인간의 유래>에서

인간과 원숭이는 같은 조상을 뿌리로 두고 있다고

확실히 밝혔고, 세상사람들은 다윈을 원숭이로

풍자하는 만화를 그려 그를 조롱하기도 했다.


이런 연유로 다윈이 임종할 때 진화론을 포기하고

자신이 기독교라고 밝혔다는 이야기가 떠돌지만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고 1882년 그의 명성에

걸맞게 뉴턴이 묻힌 웨스트민스터에서 고이 잠들었다.


찰스 다윈의 삶은 지극히 평범했으나, 그의 생각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이런 그의 과학적 업적이

어떻게 만들어졌가는 그가 생전에 쓴

자서전 "나의 삶은 서서히 진화해 왔다."를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규칙적인 습관은 특정한 작업을 하는 동안

많은 도움이 되었다. 건강이 나빠져서 내 삶이

몇 년 동안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 덕분에 사교나 오락으로 정신이 산만해지는

일은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에 대한 사랑이었다.

사실을 관찰하고 수집하는 이 분야에서 주제가

하나 생기면 오랜 시간 동안 무한정 참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으며, 상식뿐 아니라 어느 정도의

창의성도 필요했다."


"내가 만일 20년을 더 살아서 일할 수 있었다면

<종의 기원>에 고쳐 쓸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시작일 뿐이니 그 자체로 뭔가

의미가 있을 것이겠지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그의 규칙적인 습관과

삶에 대한 긍정적 태도, 그리고 자신의 일에 대한

집요한 집념과 끈기, 열정 덕분이었다.


지극히 평범했으나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찰스 다윈의 규칙적 습관과 긍정적 태도, 그리고

받아들인 지식을 관점을 달리하여 재해석 하는

사유하고 질문하는 생각열기 학습 습관으로

인류는 생명체의 장엄한 서사시를 그려나갈 수

있었다.


평범했으나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생각,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은 그렇게 생각열기의

품에서 탄생해서 인류의 인식의 지평선을 무한정

확장한 생각열기 보고서다.


Plato Won


Plato Won 作,환경에 적응하면 화려한 꽃을 피우며 살아남고,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어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은 자연생태계든 기업생태계든 매 한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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