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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의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정하는가.

by Plato Won


중산층의 기준은 무엇이고 누가 정하는가?


나라마다 시대마다 기준이 다르다.


프랑스의 경우,

외국어 하나 정도는 할 수 있고,

일 년에 서너 권의 독서로 토론을 즐기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가 있어야 하고,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하며,

남들과는 다른 요리를 만들 수 있고,

공분에 의연히 참여해야 하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 사람을

중산층으로 여긴다.


영국의 경우는

페어플레이를 하고,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독서를 하고 글을 쓸 것,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불의, 평등, 불법에 의연히 대처하며 사는 사람을

중산층으로 여긴다.


조선 시대 선비의 기준으로는

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전답이 있고,

서적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햇볕 쬘 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하나,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가 있고,

의리를 지키고 도의를 어기지 않으며

나라의 어려운 일에 바른말을 하고,

매일 아침 글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을

선비로 여긴다.


고대 그리스 시대 아테네의 시민의 조건 중

하나는 매일 아침 철학책을 읽고 오후에 아고라

광장에 나가서 토론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반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경우

중산층의 기준을 오직 재산과 급여 수준으로만

따진다.


예금잔고가 1억 이상이고

연봉이 5천만 원 이상이며,

자가 집을 소유하고,

2000CC의 중형 자가용이 있고,

1년에 1차례 이상 해외여행을 다니면

중산층으로 여긴다고 한다.


2022년 통계층 발표에 따르면

연봉 4천만 원 이하의 직장인이 전체의 70%를

차지한다고 하니. 연봉 기준으로만 따지면

중산층이 30%도 안 된다.


믿거나 말거나 하는 우스갯소리로,


일하지 않아도 재산이 늘어다면 부자,

일하면 재산이 늘어나면 중산층,

일 안 하면 재산이 줄어들면 서민층,

일해도 재산이 줄어들면 빈곤층이라는

말도 있다.


프랑스나 영국의 기준처럼

저 정도의 지적 수준과 지적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중산층의 삶을 살려면 어느 정도의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지 대충 감이 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을 팔 만큼의 빈곤도 문제가 있고

남을 살 만큼의 부도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플라톤은 너무 없는 결핍도 인생을 불행하게

하지만, 너무 많은 부도 인생을 망친다고 하였다.


중산층의 기준이 나라마다 시대마다

다르기 마련이지만 확실한 것은 소득과 재산만이

유일한 중산층의 기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행복한 삶의 질을 유지하기 위해서

富를 무시할 수 없지만, 富만 쫓는 삶은

반드시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富만 쫓는다고 富가 쌓이고 행복한 중산층의

삶이 보장된다면 인생 좌고우면할 일도 없겠지만

세상 그리 간단치 않다.


부만 쫓으면 부가 오히려 달아나니

그것이 문제 아니겠는가?


富가 쉽게 쌓이면 그 富를 꽁꽁 묶어놓고

있을 것 같지만 쉽게 쌓은 富는 유지하기 쉽지 않고,

부를 쉽게 쌓으려는 그 생각이 인생을 더

빨리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된다.


프랑스나 영국의 기준이든, 한국의 기준이든

조급증만 내지 않고 노력과 열정만 보장된다면

중산층이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하다.


다만 그냥 노력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

그냥 열정이 아니라 효율적인 열정이

담보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끊임없는 노력은 알겠는데,

열정이면 다 같은 열정이지 효율적인 열정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다음에 사유하고 질문해 보기로 하자.


중산층의 기준을 누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정하고 그 기준에 만족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중산층에 올라선 사람인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왜냐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미

주체적 삶의 기준으로 세상을 살고 있기 때문에.



Plato Won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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